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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 하륜(조희봉) 태종 이방원의 꾀바른 책사

 

육룡이 나르샤 하륜(조희봉) 태종 이방원의 꾀바른 책사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태조 이성계(천호진), 삼봉 정도전(김명민) 등 6명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그려나가는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훗날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책사 하륜입니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었던 하륜은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 이방원에게는 하륜이라는 뛰어난 책사가 있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꾀바른 지혜로 이방원을 도우며 그 곁을 묵묵히 지킨 인물입니다. 그 때문에 태종의 오랜 재위기간 동안 하륜을 시기한 주변 세력들이 여러 차례 정치적인 탄핵을 청했지만 태종은 그를 보호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까닭도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꿰뜷어보는 하륜의 놀라운 직관력 덕분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신연우/신영란의 [제왕들의 책사]를 바탕으로 육룡이 나르샤 하륜(조희봉) 태종 이방원의 꾀바른 책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륜 역을 맡은 조희봉님이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꾀바른 책략가의 면모를 얼마나 멋지게 보여줄지 기대해 봅니다.  

 

육룡이 나르샤 하륜(조희봉) 태종 이방원의 꾀바른 책사

 

이방원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이성계를 돕기 위해 도성에 남아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해동갑족과 사대부파를 만나 최영(전국환)의 병력을 빼돌리는 등 백성들이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으로 아버지가 승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권력을 잡은 이성계에게 남은 일은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장터에서는 "열여덟의 자식들이 왕이 되니 태평성대 번창하네. 북쪽에서 언제 오나 우리 낭군 꽃잎 물고 청류 가세"라는 기기묘묘한 노래가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성계의 이(李)자를 파자(破字)하면 십팔자(十八子)가 된다. 즉 열여덟의 자식들이 왕이 된다는 것은 곧 이씨 성을 가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노래로, 이른바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이었다. 

 

 

한편 이 사실을 전해들은 삼봉 정도전은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정도전은 "이는 민심을 대변하는 도참설이 아니다. 그것에 휘말렸던 이씨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며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성계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계략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이성계는 도당의 경계를 받게 될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에 이방원은 분이와 함께 이  노래가 어떻게 퍼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장터를 돌며 추적을 시작한다.

 


그리고 장터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 노래를 가르치는 사람을 발견한 이방원은 그에게 대체 뭐하는 작자냐고 다그친다. 그러자 그는 "소인은 본디 이 장터 저 장터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인데 이 노래를 퍼뜨려주면 은자를 준다기에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있었을 뿐입니다"고 대답한다. 이방원 다시 은자를 주겠다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었다며 그 어르신한테서 받은 은자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이인겸(최종원) 가문에서 쓰는 백매화였다. 이로써 그 장돌뱅이가 이인겸의 사주를 받은 것임을 직감한 이방원은 이인겸을 추포하기 위해 그가 있는 유배지 경산부로 향했다. 하지만 이인겸은 보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이방원은 모든 일의 배후가 그 장돌뱅이였음을 깨달았다.

 

 

이 장돌뱅이의 정체가 바로 하륜이었다. 그는 이인겸을 사칭해 도당회의를 흔들고 권문세족의 힘을 다시 모으기 위해 은밀히 조민수(최종환)를 움직여 이성계와 정도전을 위기에 빠뜨린 것이다. 


 

 하륜 태종 이방원의 꾀바른 책사

 

 

고려시대 순흥부사였던 하윤린의 아들인 하륜은 공민왕 시절 문과에 급제했으나 신돈과 불화로 파직됐다가 다시 복직하는 등 파란을 겪었으며 고려말 우왕 때는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다가 양주에 유배를 가기도 했다. 천문학과 음양오행 연구에 전념하여 많은 지식을 쌓은 그는 이때부터 남의 사주나 관상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을 얻었는데, 이런 그가 이방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우왕 8년인 1382년 방원은 당시 대제학이던 민제의 딸과 결혼식을 했는데, 하륜은 이때 우연히 잔치집에 갔다가 방원을 처음 보고 "훗날 세상의 으뜸가는 지위에 오를 상이니 두고 보십시요"라며 민제에게 이제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사위를 인사시켜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리고 민제의 주선으로 방원을 만나게 된 이후 하륜은 나이가 20년 연하인 방원을 항상 깍듯한 예의로써 대했다. 

 

1,2 차 왕자의 난

 

 

그로부터 16년 후인 1398년 8월, 태조가 왕위에 오른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갈등이 극한을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하륜은 충청감사가 되어 한양을 떠나게 되었다. 하륜이 이방원의 1급 참모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정도전이 이 둘을 떼어놓기 위해 하륜을 지방으로 좌천시켜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뻘 되는 하륜을 스승으로 예우하던 이방원은 그날 하륜의 집으로 갔는데, 하륜이 평소와 달리 호들갑을 떨며 이방원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가 방원의 옷자락에 술을 쏟았다, "임금의 신임을 얻지 못한 왕자라고 해서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하륜마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욕보인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오른 방원은 하륜이 사과하는 말도 들은 척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하륜의 계략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방원과 은밀한 자리를 갖기 위해 일부러 술에 취한 척하며 술을 쏟은 것이었다. 헐레벌떡 방원의 뒤를 쫓아 집까지 달려간 하륜은 방원에게 이제 곧 세자책봉이 있을 것이며, 그 대상은 계비 강씨의 소생 중 하나일 것임을 알렸다. 그리고 그 후 후 정비 한씨 소생 왕자들에 대한 급작스러운 숙청이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이것은 이방원의 동복형제들도 늘 불안해하던 문제였다.
 
당시 태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던 강씨는 정도전의 강력한 배후세력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 무렵 태조의 병을 핑계로 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 왕자들의 대궐 출입이 금지돼 있었고, 왕족들을 호위하던 사병들마저 정도전이 이끄는 의흥삼군부 소속으로 흡수된 상황이었다. 방원은 하원의 말에 분노로 부르르 몸을 떨면서도 "저들이 우리 형제들을 다 죽이려 든다 해도 우린 힘이 어쩌겠습니까.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하륜은 그 정도쯤 문제가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안산군수 이숙번에게 잘 훈련된 별초군이 3백여 명 있고 제가 이미 대군의 뜻을잘 따르도록 조치해 놓았으니 언제든 상황이 급박하면 그를 불러들이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하륜은 이렇듯 모든 면에서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삼봉을 내치지 않고는 대군께서 무사하실 수 없을 것이며, 두 분 대군에 대해서도 처분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정도전을 죽여 없애야 이방원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일이 그렇게 되면 이복형제인 방석과 방번도 살려두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음날 하륜은 임지인 충청도로 떠났다. 그리고 몇 달 후 1차 왕자의 난이 터졌다. 이방원은 이때 하륜의 조언대로 안산군수 이숙번을 불러들였고, 이숙번이 데려온 병력들은 정도전을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후 계속해서 동복형인 방간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이숙번은 앞장서서 이방원의 심복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된다. 하륜의 지략과 이숙번의 물불 가리지 않는 용맹에 힘입어 이방원은 마침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권 후보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1400년 11월 11일, 정종은 마침내 아우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교지를 내린다. 1차 왕자의 난이 끝난 후 방원의 강압에 못 이겨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2개월 만의 일이었다. 무인년 1398년 8월, 세자로 책봉된 뒤 한 달 만에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을 협박하여 이방원에게 교지를 내리게 한 것은 하륜과 이숙번 등이었다. 지난 2년여 세월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했던 정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든 게 방원의 뜻대로 이루어졌지만 사실 그는 애초부터 왕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한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아우들끼리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이었다.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유능한 학자


 

하륜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시를 읊기만 하면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1365년(공민왕 14) 이인복과 이색이 주관하는 과거에 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문생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동방 유학의 종주로 일컫는 정몽주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성리학뿐 아니라 음양, ·의술, 성경(星經), 지리에도 정통했으며, 재상이 된 이후 각종 외교문서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 문장에도 능통할 만큼 다양한 학문을 구사한 유능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하륜은 천성이 중후하고 식견이 밝으며 도량이 넓었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大體)에 힘쓰고 훌륭한 모책과 비밀 의논을 많이 했지만 물러나서는 남에게 누설하지 않을 만큼 신중함도 지니고 있었다. 또 항상 자신의 직분을 넘어선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몸가짐을 잘하고 사람들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대했고 매우 검소하여 사치를 싫어해 연회나 잔치를 즐기지 않았다.

 

훌륭한 재상

 


즉위 후 10년이 지나면서 태종은 악몽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어찌나 심하게 잠을 설쳤으면 밤에 천둥이 치거나 비바람이 칠 때면 이튿날조회에도 못 나갈 정도였는데, 하륜은 임금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 또한 과거의 죄업이 있는 만큼  태종 즉위 후에는 왕이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왕의 신임이 큰 만큼 하륜을 시기하는 무리들도 많아서 하륜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아 탄핵을 당한 일이 여러 차례 있는데, 그때마다 태종은 하륜을 보호하며 오히려 탄핵을 청하는 대신들을 꾸짖었다. 그리고 탄핵이 이어지는 동안 집에서 근신하고 있는 하륜을 위로하기 위해 그 아들 하구를 불러 안심시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태종 16년인 1417년 11월 6일, 진산부원군 하륜은 황해도 정평의 능침을 살피러 갔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죽은 왕자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태조가 꿈속에 나타나 큰 소리로 꾸중하는 것을 듣고 병을 얻어 그 길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태종은 하륜의 부음을 듣고 예조좌랑 정인지를 보내 가족들을 위로하고 남편을 잃은 슬픔에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한 그 아내에게 술까지 내려주었다. 그리고 쌀, 콩 각각 50석과 종이 2백 권을 가족들에게 하사한 뒤 3일 동안 조정을 열지 않았으며 시신을 정평에서 한양으로 옮겨온 뒤에는 친히 빈소에 들르기까지 했다. 또한 하륜이 "나로 인하여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국장을 없애기를 청하라"고 했지만 태종은 "정승이 죽으면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상례인데 하물며 하륜의 공덕으로 국장으 없애는 것이 옳겠는가? 하며 직접 국장을 지시하고 가족들에게 장례용품을 보내주게 했다. 그러나 하륜의 아내는 남편의 유지를 거역할 수 없다며 끝까지 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하륜(조희봉) 태종 이방원의 꾀바른 책사입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육룡이 나르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