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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의 등극과 조선의 개혁작업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의 등극과 조선의 개혁작업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육룡이 나르샤]입니다. SBS 창사 2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인데, 조선의 기틀을 세운 철혈군주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한 여섯 인물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다룬 팩션사극이라고 합니다. 팩션(faction)이란 잘 알고 있듯이 사실(fact)과 픽션(fiction)을 합한 말로,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의 일대기에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낸 것을 말합니다.

 

[선덕여왕]. [뿌리깊은 나무] 등을 통해 ‘사극의 마술사’로 불리게 된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다시 손을 잡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백성들이 살기 힘든 고려 말을 지나 새 나라 조선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에서 고려라는 거대한 악(惡)에 대항해 몸을 일으킨 여섯 용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그 동안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시대적 배경은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수차례 다뤄졌지만, 가상인물이 등장해서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 같습니다. 잘 만들어진 역사드라마의 강점은 단순히 암기 위주로 공부하면서 크게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역사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을 심하게 왜곡시키지만 않는다면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 팩션드라마의 묘미를 톡톡히 느낄 수 있을 듯해서 기대를 해봅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육룡은 누구인가?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의 등극과 조선의 개혁작업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의 건국을 노래한 [용비어천가] 1장의 첫 구절에서 따온 말이고 '나르샤'는 '날아오르다'의 순우리말로, 즉 "여섯 용이 날아오르다"라는 뜻입니다. 단, [용비어천가]에서는 ‘육룡’이 세종의 6대 선조를 의미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정도전(김명민), 이방원(유아인), 이성계(천호진), 분이(신세경), 이방지(변요한), 무휼(윤균상)을 의미합니다.  

 

 

이 중 조선의 창시자 이성계,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 조선의 철혈군주 이방원은 역사적 실존 인물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 즉 삼한제일검 이방지, 조선제일검 무휼, 백성 분이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조선 건국의 과정이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워낙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데 가상의 인물까지 합세해 당시 각 사회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겪었을 시련과 혼란을 오롯이 담아낸다고 하니 역사를 통해 현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육룡 중 특히 태종 이방원에 대한 흥미가 큰데다 이 드라마에서 이방원 역을 맡은 사람이 요즘 대세인 유아인이어서 먼저 태종에 대해 작가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 읽어보시면 더 흥미있게 시청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의 등극과 조선의 개혁작업

 

 

조선의 3대 왕 태종(재위 1401∼1418)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목표로 한 목적을 확실하게 이루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아들로 이름은 방원(芳遠)이고 자는 유덕(遺德)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다. 용기있는 리더였던 그는 어디에 가도 기필코 승자의 자리에 올라설 사람이었으며, 인간적 고뇌와 정치적 갈등의 순간에도 거침없는 용단을 내렸다. 아버지 이성계가 차마 제거하지 못했던 정몽주를 제거했고, 이성계가 즉위한 후 최측근인 정도전이 자신의 왕위 승계에 걸림돌이 되자 역시 주저하지 않고 제거했다. 이처럼 태종은 조선의 기틀을 닦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어떤 오명을 뒤집어쓰든 마다하지 않았다.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해 요동정벌론이 대두되었다. 정도전은 막대한 군사력이 필요한 요동정벌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병이 혁파되어야 하며, 병권이 나라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방원은 자신의 세력기반인 사병이 혁파될 위기에 놓이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을 제거한 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정벌 직후에는 형제들간의 권력관계를 고려하여 세자 추대를 사양했으며, 단지 정안군(靖安公)으로 봉해지면서 의흥삼군부 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한다. 그리고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후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된다.

 

세자로 책봉된 방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집권의 틀을 다져나간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자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히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종 어진(효령대군 기념관에서 제작.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태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한층 박차를 가했다. 한편으로는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고려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했으며 토지, 조세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세자시절에 이미 손댄 바 있던 노비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교육과 과거제도 개국 당시 유학자들은 대부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죽임을 당했는데, 이는 대명외교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겼으며, 기술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두었다. 과거제도에도 공거(貢擧), 좌주 문생제(座主門生制) 등 귀족 위주의 관리등용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는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했다.

 

종교정책 숭유억불이라는 개국 이념에 따라 불교와 도참사상을 억제했다. 그 일환으로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시켰으며, 처녀로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시켰고, 연등제, 초파일제 등을 폐지시켰다. 한편 유교를 장려하여 문묘제도를 정비하고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했다. 이와 함께 단군, 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키는 등 개인적인 자연신앙을 국가신앙으로 이끌면서 민족신앙을 유교 속으로 끌어들였다.

 

대외정책 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켰다. 왜인에 대해서는 왜인범죄존결법을 마련해 왜인들의 범죄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왜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하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했다. 이 밖에도 수도를 개경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선원록(璿源錄)을 정비하여 비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켰고,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했다.

 

헌릉 <이미지 출처 조선왕릉관리소>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이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자 시절부터 빠르게 추진하던 이러한 일련의 개혁정치는 1418년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인 1418년, 장자 양녕대군이 절제없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권을 이양했다. 상왕이 된 뒤에도 그는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沈(沈泟), 박습(朴習)의 옥을 치죄하였고, 병선 227척, 군사 1만7000여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1422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418년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고, 1421년에는 성덕신공태상왕으로 가봉(加封)되었다. 이듬해에는 성덕신공 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 文武光孝大王)의 시호를 받고 1683년(숙종 9)에 예철성렬(睿哲成烈)의 호를 더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공정(恭定)의 시호를 받았다. 정비 원경왕후(元敬王后)를 비롯해 10명의 아내에게서 12남  17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헌릉(獻陵)으로 현재 서초구 내곡동에 소재하고 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쌍릉이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의 등극과 조선의 개혁작업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