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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육룡이 나르샤 포은 정몽주 일편단심의 고려충절가

 

육룡이 나르샤 포은 정몽주 일편단심의 고려충절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는 죽음을 예측하고도 패망해 가는 고려를 택한 포은 정몽주의 유명한 [단심가]입니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태조 이성계(천호진), 삼봉 정도전(김명민) 등 육룡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그린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에는 최영 장군(전국환)과 더불어 혼탁하기 그지 없던 고려를 지켜낸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일편단심의 고려충절가이자 조선건국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포은 정몽주(김의성)입니다.

 

제 몫을 챙기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배신과 변절을 마다하지 않는 요즘, 목숨을 건 정몽주의 충절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신조선 건국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인 만큼 충절가로서의 정몽주의 존재감이 미약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패자의 길을 걸은 사람의 설움을 짙게 느끼게 됩니다. 이덕일의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을 바탕으로 일편단심의 고려충절가 포은 정몽주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포은 정몽주 일편단심의 고려충절가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인 포은 정몽주는 133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부원군 정운관(鄭云瓘)과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유명한 시조로 아들을 훈계했던 어머니 영천이씨 아들 4형제 중 장남이었다. 총명하고 영특해서 20대 초반에 3차에 걸쳐 치러지는 과거시험에서 세 번 모두 장원을 차지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함께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딘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누구보다 부지런하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고 치하했으며, 정도전도 정몽주를 일컬어 “사람마다 이견이 있게 마련인데 선생은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지만, 역사는 결국 그 두 사람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조선시대의 주자학자들인 기대승, 김장생, 송시열, 등은 한국 유학의 원류을 밝히면서 한결같이 정몽주를 비조(鼻祖)로 꼽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할 것은 외교 면에서 정뭉주가 이룩한 업적이다. 고려 말에는 명나라와 일본 등과의 외교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 고려 조정에서는 정몽주를 여러 차례 외교사절로 파견해 이들과 교섭을 벌이게 했다. 정몽주는 이 두 나라를 오가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큰 외교수완을 발휘했는데, 그 수완이 워낙 뛰어나 국내외에서 그를 우러러볼 정도였다. 

 

 

리더십에는 두 유형이 있다. 한 유형은 리더 자신이 앞장서서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행동에 옮기는 경우다. 이 경우는 목표를 세우면 그에 따르는 비난도 감수한다. 또 한 유형은 목표는 세웠지만 비난은 감수하지 않으려는 유형이다. 그러면서도 목표는 달성하려고 한다. 이런 유형의 리더를 만나면 아랫사람이 힘들다. 이성계가 바로 이런 유형이다. 이성곈계는 우왕 9년(1383) 함길도 함주까지 찾아온 정도전을 만나 새 왕조 개창을 꿈꾸었지만 역신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주위에서 추대해서 할 수 없이 즉위했다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세간의 비난에 신경쓰면서 망설이는 사이 이성계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다. 그런데도 계속 이성계가 망설이고 있으니 고려왕조를 존속시키려는 온건개혁파 유학자들이 반격을 꾀했다. 정도전은 새 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온건개혁파의 리더 이색과 우현보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몽주가 뜻밖에도 이색, 우현보 세력에 가담하면서 회군 세력 내부가 분열되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찬성하고 회군공신에 책봉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공양왕 옹립에도 찬성해서 익양군 충의군에 봉해지고 좌명공신까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반 이성계 세력의 선봉으로 변했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는 찬성하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정몽주에게는 논리가 있었다. 그에게 유학은 일종의 이념이었다. 유학은 잘못 이해하면 중화(中華)사상으로 변질된다. 정몽주는 명나라를 사대의 대상으로 높였다. 그래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요동정벌에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에 찬성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왕조의 국체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상호 모순되어 보이지만, 정몽주에게는 모순이 아니었다. 상국(上國)인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국왕은 다른 왕씨로 교체되어도 좋다, 하지만 고려라는 왕조의 국체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즉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정몽주는 만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려는 마음까지 먹었다면 목숨을 걸고 만류하리라고 각오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표면상으로는 친교를 계속했지만 속으로는 서로 경계하고 배제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양왕 4년(1392)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중 낙마해 벽란도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불렀고,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此亦何如彼亦何如/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하여가, 이방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白骨爲塵土魂魄有無/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단심가, 정몽주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했지만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한 것이다.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선죽교에서 그를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56세였다. 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 이상 이성계 일파를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석 달 후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 조선을 열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던 정몽주는1401년(태종 1년) 태종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정몽주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최영 장군,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삼걸(高麗三傑), 목은 이색과 야은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매년 포은의 출생지인 경북 영천과 묘소가 있는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서는 학술대회와 백일장, 민속공연, 추모제례 등 포은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포은 정몽주 일편단심의 고려충절가였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