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로 보는 세상

육룡이 나르샤 이인임(이인겸)의 세도와 몰락

 

육룡이 나르샤 이인임(이인겸)의 세도와 몰락

 

 

조선의 기틀을 세운 철혈군주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한 여섯 인물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다룬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인겸(최종원)은 사람 젖을 먹인 돼지고기를 먹는 희대의 악행을 보여 충격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이 이인겸은 드라마상의 이름이고 실존인물은 이인임(李仁任)이라고 합니다. 제작진에 따르면. 이인임을 이인겸으로 바꾼 이유는 팩션의 묘미를 더한데다 혹여나 있을 후세의 반발을 피해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인임의 최측근이자 극악무도한 간신배였던 임견미(林堅味)를 길태미(박혁권)로 바꾼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성계(천호진)의 최대 정적 중 한 사람이었던 이인임은 "이화에 월백하고~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라는 시조 다정가(多情歌)를 남긴 성산군 이조년(李兆年)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선조 덕분에 음서(蔭敍)로 조정에 나온 그는 전객시승(典客寺丞)을 시작으로 승진을 거듭하면서 고려 공민왕이 승하한 후 우왕의 뒤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망해가는 고려 말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기세등등했던 이인겸이지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은 그도 처절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와 한국사 명강사 이덕일이 들려주는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을 바탕으로 인임의 세도와 몰락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육룡이 나르샤 이인임(이인겸)의 세도와 몰락

 

드라마에서 이인겸이 보여주는 악행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모유가 나오는 여인들을 납치해 가서  돼지들에게 젖을 물리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의 젖을 먹은 돼지고기는 더 맛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으랴 싶어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고려 말 이런 만행이 저질러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당시 중국 부유층에서는 사람의 젖으로 기른 돼지고를 먹은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패할 대로 부패했던 고려 말이었던 만큼 고려 권문세족이 따라 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국 여행을 할 때 어느 식당에서 딱 저런 모양으로 쟁반에 담겨져 나온 요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애저찜 또는 애저구이라는 요리였습니다. 어린 새끼돼지를 통째로 찜을 하거나 구워낸 거라는 말을 듣고는 먹기는커녕 식탁 위에 올라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기도 끔찍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맛있게 먹겠다고 갓 태어난 어린 돼지를 요리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사람의 젖까지 먹이다니, 인간이 벌일 수 있는 약행은 대체 어디까지일지 정말 가늠이 안 가는구나 싶습니다. 

 

로마가 멸망하기 직전 왕족과 귀족들이 날이면 날마다 연회를 베풀고 부어라 마셔라 했다던 이야기도 생각났습니다. 술이며 음식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식탁 옆에 마련해 둔 그릇에 토해가면서까지 흥청망청거리다가 결국 멸망의 나락으로 내달아갔던 로마처럼 고려 말의 상황도 저 장면 하나만으로도 부패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부패의 극치 속에 정도전(김명민)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원나라와의 수교를 목숨을 걸고 반대하며 정도전은 이인임을 향해 "작금의 원나라와 수교를 하면 명년에 명나라와 대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요. 헌데 자신의 안위와 세력을 늘리기 위해 원과 협상을 하려는 사대부 어르신들은 대체 뭘하고 계시는 거냐. 이것이 협상할 문제란 말인가?" 하고 일갈합니다.

 

특히 "전쟁은 가진 자들이 결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는 자들은 오직 가지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늙은 자들이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죽는 것은 단지 젊은이들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비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옳겠느냐 아니면 아비가 자식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옳겠느냐? 우리는 이미 수많은 자식의 장례를 아비의 손으로 치렀다"는 말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 때문에 애꿎은 젊은이들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 불행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현대에도 유효하며 귀담아들을 말입니다.  


 이인임의 세도와 몰락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공민왕 사후 우왕을 추대했으며 정권을 잡자 친원정책을 취해 친명파를 추방하고 전횡을 일삼았던 이인님도 최영이나 이성계처럼 한때는 외적과 싸웠던 애국적인 벼슬아치였다. 공민왕 8년(1359) 의주를 점령한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2등공신에 책봉된 그는 그 후 홍건적에 맞서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이때만 해도 그는 고려의 충신이었다.

 

이인임은 비록 과거 급제에는 실패하고 음서로 벼슬길에 나왔지만 지략이 많은 인물이었다. 공민왕과 기황후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일이다. 공민왕이 기철 일당을 전격적으로 주살하자 분개한 기황후는 최유(崔濡) 등을 내세워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만들려고 계획했다. 이들이 공민왕 13년(1364) 군대 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하려 하자 공민왕은 경복흥(慶復興)을 도원수로 삼고 이인임을 서북면 순문사(西北面 巡問使) 겸 평양윤(平壤尹)으로 삼아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이때는 아직 원나라가 추원지대로 쫓겨나기 전이어서 나름대로 힘이 있었다. 또한 기황후가 옹립하려는 덕흥군은 충선왕의 아들이니 명분도 있었다. 그러자 변방 장수들이 덕흥군에게 호응할까 두려워진 공민왕은 모든 작전지시를 개경에서 받아 시행하게 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의 상황이다. 현장의 장수에게 지휘권이 없으면 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수들은 지휘권이 없어서 우와좌왕하고, 병사들은 여름에 출병했는데 겨울이 되도록 교대되지 않으니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도순찰사 이구수가 봉주에 이르렀을 때 산하 군졸들이 덕흥군에게 동조했다가 처형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공민왕은 경복흥에게 서북지역을 지키게 한 후 안우경 등 여러 장수에게 압록강을 건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인임은 압록강을 건너고 싶지 않았다. 잘못 건넜다가는 판세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책을 생각해 냈다. 도원부수 진무 하을지에게 이구수의 군졸들이 모반할 때 나왔던 글들을 공민왕에게 전달하게 한 것이다. 이를 본 공민왕은 군사들이 덕흥군에게 동조할까 두려워 강을 건너지 말라고 구두로 명령했다. 결국 경복흥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고, 덕흥군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남하했다가 지금의 평안북도 정주 지역인 수주에서 최영에게 패해 원나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이인임은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자 우왕을 옹립하고 친명파와의 노선 투쟁에서 승리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고려사 [이인임열전]에는 이인임을 비난하는 글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이인임이 "권세를 잡고 자기 사람을 요직에 심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빌불었다"면서 뇌물이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자주 문안을 하러 왔는지를 가지고 관직을 저거나 내쫓았다"는 등의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인임을 신임한 우왕은 이인임과 경복흥에게 교서를 내려 "어린 나에게 조종을 유업을 잇게 해서 사직을 다시 편안하게 만들어 지금에 이르게 했으니 강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 공적을 잊기 어렵다"고 치하했다. 그리고 전(田) 200결과 노비 15구씩을 각각 하사하고 반역죄 외에는 모두 용서하겠다고 다짐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인데, 이인임에게 이런 권력을 주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재물욕이 많은 인물인 그는 남의 재물 빼앗기에 더욱 열중했다. 고려사 이인임열전은 "나라에는 열흘간의 비축도 없었지만 이인임은 온 나라에 걸쳐서 전원과 노비를 소유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의 힘으로 고위 관직에 오른 자마다 이인임을 따라 남의 농토와 백성을 빼앗고 국사를 돌보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두고 제조노비라고 비꼬았다고도 전해진다.

 

 

결국 온 나라 백성들의 원성을 사던 이인임에게도 몰락의 날이 다가왔다. 우왕 14년(1388), 이인임의 일파인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전 밀직부사 조반의 토지를 빼앗은 사건이 발생했다. 밀직부사는 정3품의 고관인데, 이런 고위직을 역임한 조반의 땅까지 일개 가노가 빼앗을 정도면 일반 백성의 처지는 어땠을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이자 염흥방은 조반을 반역죄로 몰아 수군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했다. 이인임이 이런 전횡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우왕의 책임도 컸다.

 

그러나 이인임의 일파인 염흥방의 가노가 조반의 땅을 빼앗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우왕은 비로소 이인임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내치려 했고, 여기에 최영과 이성계 등이 가세하면서 우왕은 동력을 얻었다. 하지만 우왕은 이인임의 우익인 염흥방, 임견미 등은 처형했지만 이인임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인 경산부로 유배보내는 선에서 그친다. 그리고 그해 이인임은 사망하면서 수없이 착복했던 재물이 모두 헛것이 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기강이 무너져 가는 고려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이인임(이인겸)의 세도와 몰락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