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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육룡이 나르샤 원경왕후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내조자

 

육룡이 나르샤 원경왕후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내조자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지난회에서는 태종 이방원(유아인)의 정비였던 원경왕후 민씨(공승연)가 처음 모습을 보였습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 등 네 명의 왕자와 정순 경정, 경안, 정선공주 등 네 명의 공주를 두었던 원경왕후는 총명하면서도 담대한 성품으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충녕대군인 세종대왕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경왕후의 내조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한 이방원은 정작 왕위에 오르자 아내를 소홀히 대해 그 후 원경왕후의 삶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아마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원경왕후의 친정 배경이 필요했지만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자 자신을 비호해 주던 그 힘이 오히려 자신을 억누르는 큰 짐으로 여겨졌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정란의 [조선왕비 오백년사] 중 원경왕후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내조자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육룡이 나르샤 원경왕후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내조자

 

드라마에 등장하는 원경왕후 민다경과 해동갑족(海東甲族)의 수장인 그녀의 아버지 민제(조영진)입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고도 불리는 해동갑족은 본디 신라 초기 시대부터 고려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개국공신 성씨를 가리킵니다. 민다경은 이인겸(최종원)을 쳐내고 도당을 장악한 홍인방(전노민)이 큰 실수를 한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큰 방패막이였던 이인겸을 쳤으니 스스로 자기 갑옷을 벗은 셈이 아니냐"고 합니다.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딸의 영특함에 민제는 무척 흐뭇해합니다. 

 

그 후 홍인방은 해동갑족의 세력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3남의 사주를 민제에게 전하며 혼담을 청합니다. 하지만 민다경은 아버지에게 홍인방의 세력은 오래 가지 못할 터이니 이 혼사는 안 된다고 하며, 결국은 홍인방과 이성계가 아니라 최영과 이성계의 투쟁이 될 것임을 내다보는 예리한 정치감각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성계(천호진) 측에서도 해동갑족 민제의 딸 민다경을 며느리로 들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홍인방 측에서 혼담을 넣은 것을 알고는 자칫 큰 대립으로 번지게 될까봐 고민하던 중 이방원이 나섭니다. 

 

민제의 집을 방문한 이방원은 민다경을 만나 자신들과 연합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 들며 함께할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민다경은 그 세 가지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저희는 귀하의 가문과 연합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이방원은 “민씨 가문은 정녕 고려가 돌아가는 추세를 읽지 못하는 겁니까”라며 “저와 혼인합시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합니다. 

 

 

한편 자신의 세력을 더 키워나가기 위한 권문세족들의 투쟁 속에서 죽어나는 것은 죄없는 백성들뿐입니다. 땅새 이방지(변요한)나 연희(정유미)도 그들로 인해 굴곡진 삶을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어린시절 사랑하는 연희를 지켜주지 못해 늘 자책에 빠져 살던 이방지는 연희가 화사단의 흑첩인 것도 모자라 이중세작(이중간첩) 역할까지 하는 것을 알게 되자 제발 그 위험한 일에서 빠져나오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삼봉 정도전(김명민)을 도와 새 나라를 만드는일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연희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난세란 약자의 지옥이야. 난세엔 여러 종류의 약자가 존재하지. 그 중 언제나 빠지지 않는 약자는 아이와 여자야"라고 말하며 아이인 동시에 여자였던 자신은 아이였기에 힘이 없었고 여자이기에 그들이 탐내는 게 있어서 참혹하게 짓밟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던 우리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어"라고 덧붙이는 연희나 그런 연희를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방지의 표정이 너무나 처연합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의 투쟁으로 인한 난세가 아니라면 큰 욕심 없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사람들인데, 이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은 먼 나라 이야기가 돼버린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의 비 원경왕후

 

 

태조 7년(1398) 어둠이 짙은 경복궁 근정전 앞에는 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의 아들들이 모여 있었다. 환후가 깊어진 태조 이성계가 보고 싶어한다는 부름을 받고 모인 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다른 왕자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모여야만 궁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명령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왕자들이 모두 궁궐 안으로 들어왔을 때 몰살시키려는 정도전 일파의 술책이었다. 하지만 왕자들은 정계의 실력자인 정도전이 이런 무서운 음모가 꾸미고 있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아내 민씨만은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역시 이 날을 거사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방원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일단 경복궁 근정전에 모습을 보였다가 별안간 부부인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말을 타고 집으로 달려갔고,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다른 왕자들도 하나둘씩 방원의 뒤를 따랐다. 한편 집에서 거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민씨는 방원을 반갑게 맞아들인 후 미리 친정집에 숨겨둔 병기들을 내주었다. 이 날이 바로 방원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날이었다. 방원 옆에는 이렇듯 뛰어난 판단력과 대담성을 갖춘 민씨가 지키고 있었다. 

 

유교명문가 출신

 

 

민씨는 개경 철동에서 아버지 민제(여흥부원군)와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훗날 많은 왕비를 배출한 여흥민씨 가문은 고려말 유교적인 명문가였다. 민제는 청렴하기로 소문난 학자적 관료로서, 당시 권문세족의 후예이면서도 신흥사대부의 사상인 주자학을 받아들여 그 실천에 힘썼다. 이방원도 왕위에 오르기 전 민제를 항상 사부(師傅)라 부르며 잘 따랐다. 인물됨이 겸손하고 경학에 밝아 태종의 존경을 받은 민제는 당시 개국 초기여서 권력다툼이 심한 소용돌이 속에서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몇 번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태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고려 때 종1품인 중대관 여량군 송선의 딸이었던 어머니도 온건한 사람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민씨는 정숙하고 지혜로운 여성으로 성장했다.

 

민씨가 방원과 백년가약을 맺은 것은 18세 되던 해였다. 그때 방원의 나이가 16세였으므로 그녀가 두 살 더 많은 셈이었다. 1382년(고려 우왕 8) 이방원과 혼인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1400년 이방원이 세자에 책봉되는 동시에 정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왕위에 오르자 정비에 진봉되었다. 민씨는 시어머니 강씨를 모시면서 남편 방원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강씨와 티격태격하던 방원을 잘 이해해 주는 아내였다. 또한 방원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동생 민무구, 민무질과 가깝게 지내면서 함께 앞날을 도모하기도 했다.

 

정치적 내조자 원경왕후

 

 

방원이 왕위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은 민씨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방태종은 차츰 그녀에 대해 소홀한 태도를 보이며 민씨보다는 다른 후궁들과 더 가까이 지냈다. 태종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후궁을 거느린 임금이었는데 그 첩의 수가 무려 12명이나 되었다. 민씨는 태종에 대한 배신감이 점점 커져 갔다. 태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헌신하듯 몸과 마음을 바쳐 도움을 주었던 민씨였기에 그 배신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두 사람 사이에는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다.

 

이 와중에 민씨 가문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펴던 민씨 형제들이 탄핵을 받게 되었다. 민씨의 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이 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자신들의 공이라며 떠벌리고 다녔던 것이다. 평소 민씨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너무 교만한 것을 알지 못하고 고치지 못하면 반드시 파하는 수가 있다"며  항상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었지만, 이들은 집안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려 하다가 오히려 화를 자초한 것이다. 민씨집안의 권세가 갈수록 커지자 그 세력을 분산시켜야겠다고 생각한 태종은 후궁을 계속 늘려갔다. 결국 두 사람의 불화는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심해졌으며, 민씨집안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국모의 자리가 오히려 더 서러웠을 원경왕후

 

 

그러던 중 드디어 민씨 집안에 서슬 퍼런 칼날이 떨어졌다. 태종 7년(1407) 발생한 민무구 형제의 옥사사건이었다. 태종은 재위기간 네 번의 선위파동을 일으켰다는데, 1차 선위파동이 민무구 형제의 옥사사건과 관련 있었다. 이 일은 하나의 파동으로 끝났지만 민씨 집안의 화가 되었으며 이 일로 민씨 형제들은 귀양을 떠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민씨는 동생들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국모의 자리도 별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국모의 자리에 앉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뼈저린 아픔만 되새기게 되었을 뿐이었다. 부원군 민제는 아들들이 모두 귀양을 떠나자 그만 병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민제가 죽자 조정대신들은 민무구 형제들도 처형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민무구 형제는 태종 10년(1410) 태종의 명령 아래 죽음을 당했다.

 

동생들이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민씨는 몸져 누웠다. 그런데 병문안을 온 오라버니 민무휼과 민무회에게 두 동생의 억울한 하소연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두 오라버니마저 죽음을 당하자 민씨는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남편의 명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조선시대였다. 비록 국모의 자리에 올라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 선망의 대상으로 그려봤을 최고권력을 가진 국모의 자리,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민씨의 친정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이제 민씨는 폐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신하들은 친정이 역모를 꾀해서 절멸했고 왕비 민씨도 역적의 딸이니 당연히 폐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태종은 일말의 양심 탓인지 세자와 왕자들을 위해 폐비시키지는 않았다. 민씨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을 당했지만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효성이 지극한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이 곁에서 힘이 돼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민씨는 모든 것을 체념하며 지내다가 세종 2년(1420) 학질에 걸려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경왕후의 능은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내에 위치한 헌릉이며 태종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묘호는 원경태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숙종 때 송시열의 상소로 원경왕후(元敬王后)로 수정되었다. 남편을 왕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로 남동생들이 숙청을 당한 비극의 여인 원경왕후 민씨였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원경왕후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내조자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