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 한석규(영조)에게 맞서는 책쾌 권해효(서균)와 나주괘서사건
비밀의 문 영조에게 맞서다가 영조의 칼에 죽음을 당하는 책쾌 권해효(서균)
드라마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에서 영조(한석규)는 자신이 경종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글이 씌어진 비망록이 출판됐다는 보고에 분노해서 세책 무리들과 책쾌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합니다. 비망록 출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은 소론의 대신 신치운(백승현)과 책쾌 서균(권해효)입니다. 이어서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노론 세력과 결탁했던 과거를 덮기 위해 영조는 무자비한 살육을 단행합니다.
비밀의 문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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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 영조의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
영조가 맹의에 관한 진실이 담긴 비망록을 출판 및 유통한 사람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세우자 참다못한 신치운이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임을 밝히고 나섰고, 그의 자백으로 결국 박문수(이원종) 등 소론의 대신들과 반란을 도운 서지담(김유정)의 아버지 책쾌 서균까지 모조리 체포된 것입니다.
영조로부터 "과인은 그대를 그렇게 쉽게 보내줄 수 없다.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고 오래도록 살아남아서 고통을 겪어봐"라는 악담을 들었던 박문수도 살육의 현장에 끌려나와 있습니다.
서균 또한 거짓자백이라도 하라는 채제공(최원영)의 권유에도 꿋꿋하게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영조는 직접 추국을 맡으며 소론 대신들과 책쾌 등이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고문을 지켜보는 영조의 광기는 점점 더 그 수위가 높아지고, 정수겸비망록 제작에 앞장섰던 신치운은 인두질을 당하는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죽고 맙니다.
신치운이 죽자 박문수는 고통에 못 이겨 영조를 향해 "제발 소신을 죽여달라"고 울부짖지만 영조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뭘 꾸물거리느냐"며 자복하지 않는 놈은 계속 고문을 가하라고 소리칩니다.
한편 가혹한 고문으로 피범벅이 된 서균은 계속되는 영조의 잔인한 행위에 참다못해 "이 미친 짓을 당장 멈추시오! 형리나리들, 대감들, 이게 잘하는 짓인가. 다들 미친 거 아닌가. 지금 저 임금님 하는 짓 다 미친 짓이다!"며 소리칩니다. "귀가 있어 들었고 입이 있어 말했다. 백성들의 말할 자유를 이렇게 처참히 짓밟냐. 이건 임금이 할 짓이 아니다. 부끄럽지 않나? 그 칼 없이는 백성들 상대 못하는 것 창피하지 않나"며 영조를 향해 절규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입이 있는 자들은 말을 하시오. 훗날 당신 자식들이 뭐라고 할 것 같소. 오늘 지금 이 순간 가장 끔찍한 것은 저 악한 무리들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선한 자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 아니었냐고 묻는다면 그때 당신들은 뭐라고 답을 하겠소"라며 분노의 일갈을 내뱉습니다.
서균의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영조는 광기에 휩싸인 표정으로 서균 앞으로 다가가더니 칼을 뽑아 서균을 죽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문수는 영조의 가공할 행위에 몸을 떨며 말을 잇지 못한 채 비통한 눈물만 흘립니다.
한편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민우섭(강서준)을 설득해서 맹의의 진본이 숨겨진 책이 정족산 서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세자 이선(이제훈)은 그곳을 뒤져 마침내 진본을 찾아낸 후 궁궐로 미친 듯이 말을 달려 돌아옵니다. 궁궐 안으로 들어선 이선은 피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영조와 그 광기에 속절없이 죽어나간 사람들, 그 가족들을 보면서 상상도 못할 만큼 끔찍한 광경에 치를 떱니다.
격분한 이선은 "나서지 말고 물러가!"라고 소리치는 영조를 향해 "살육을 멈추세요 당장! 멈추지 않으면 이제 맹의의 진본이 백성들이 붙인 벽서 위에 붙을 것입니다"라고 경고합니다.
피를 부르는 아버지와 아들의 격돌입니다. 사실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당시만 해도 이러한 재앙이 발생하게 되라라고는 전혀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영조는 “세자의 기품이 뛰어나다”고 말한 바 있으며, 그 후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의 업무 능력이나 정치적 행보도 크게 흠잡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론의 농간에 놀아난 탓이긴 하지만, 부자간일지라도 쉽게 넘겨줄 수 없는 것이 왕좌이자 권력인가 봅니다.
균역법이며 탕평책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긴 영조였지만 자신의 정통성에 의문을 갖는 대신들 및 백성들에 대한 불안과 권좌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탓에 늘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던 영조 때에는 백성들의 원망이 담긴 벽서 등이 자주 나붙었고, 그때마다 영조는 책쾌 서균 등을 압송해 죽인 것과 같은 일을 행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간단하게 살펴본 다음의 나주괘서사건도 그런 벽서사건 중 하나입니다. 드라마에서 본 장면들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 나주괘서사건사건
나주괘서사건사건 혹은 나주벽서사건은 1755년(영조 31년) 소론 일파인 윤지(尹志)가 나주 객사에 벽서를 붙여 역모를 꾀한 사건으로 을해옥사(乙亥獄事) 또는 윤지(尹志)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그 괘서에는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다. 백성이 곤궁한데 가렴주구는 더욱 심하다. 이를 구제하고자 군사를 움직이려 하니 백성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고 씌어 있었다.
윤지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경종 2년에 임인무옥(壬寅誣獄)을 일으킨 김일경의 옥사에 연좌되어 1724년 나주로 귀양을 간 사람이다. 그는 오랜 귀양살이 끝에 노론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나주목사 이하징 등과 모의하여 민심을 동요시키고자 1755년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다. 이것이 윤지의 소행임이 밝혀지자 분노한 영조는 윤지를 직접 심문했고 결국 그는 사형을 당했다.
나주벽서사건(한국화가 우승우)
당시 영조가 나주벽서사건에 충격을 받고 노심초사한 것은 이 사건이 1728년에 발생했던 이인좌의 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탕평세상을 열었다고 자부한 자신의 치세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자칫 이인좌의 난이 재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영조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이 영조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했던 콤플렉스를 들춰낸 데 있었다. 윤지와 사건 연루자들을 국문할 때 이들이 영조가 경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역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심경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박문수 등 몇 사람만 빼고 소론의 명문가문과 유수원 등 우수한 학자들을 대거 처형했는데, 나주괘서사건 등으로 처형당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노론은 이 사건을 기회삼아 소론 세력을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 조정에서 완전히 축출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결국 윤지의 벽서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은 영조로 하여금 탕평책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게 만들고 노론이 독주체제로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이상, 비밀의 문 한석규(영조)에게 맞서는 책쾌 권해효(서균)와 나주괘서사건에 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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