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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비밀의 문 천의 얼굴 혜경궁 홍씨 박은빈..조선의 왕비

 

비밀의 문 천의 얼굴 혜경궁 홍씨 박은빈과 조선의 왕비에 관한 포스팅입니다 

  

비밀의 문 천의 얼굴 혜경궁 홍씨 원망이 가득한 차갑고 매서운 표정으로 시부 영조와 한판승부를 벌인다

 

 

SBS 드라마 비밀의 문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등장인물 소개에 따르면, 박은빈이 연기하는 혜경궁 홍씨는

지적이고 자색이 수려한 재원으로 남에게 꿀리는 것도 싫고 동정받는 것은 더욱 싫어하는 강인하고도

단호하며 차가운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수많은 나’를 탑재하고 상대에 따라 걸맞는 성향을 빼들고 적절히 요리할 줄 아는 여자이자

웃전에겐 절대신임을, 부리는 이에겐 절대충성을 얻어낼 줄 아는 지략가로, 그야말로 치마 속까지

정치적인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그 소개에 참으로 걸맞게 비밀의 문에서 박은빈은 세자빈 혜경궁 홍씨에 빙의된 듯 표독스러운가 하면

단호하고, 단호한가 하면 애틋하고 여린 카멜레온 같은 변화무쌍한 모습을 자유자재로 펼쳐

천의 얼굴 혜경궁 홍씨라고 일컬어지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밀의 문 천의 얼굴 혜경궁 홍씨 지아비인 국본 이선 앞에서는 더없이 다소곳한 아녀자의 모습이다

 

 

오늘 포스팅은 혜경궁 홍씨 박은빈이 비밀의 문에서 펼쳐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 그리고 세자 혹은

왕의 배우자로서 부과된 많은 직무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는 힙겹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왕실의 세자빈/왕비에 관한 내용을 [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김경수/이영화)를 통해 알아본 것입니다. 

 

비밀의 문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자진을 해! 그 단도 니놈 목에 박아, 당장!


 

 

"자진을 해. 그 단도 니놈 목에 박아, 당장!"
세자빈 혜경궁 홍씨는 동궁전 장내관(김강현)에게 칼을 던져주며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어서 자진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신흥복 살인사건 배후를 쫓다가 강필재 살해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세자(이제훈)를 구하기 위해 나선 

세자빈은 장내관을 불러와 "뭘 꾸물거리는 게야? 웃전을 제대로 보필치 못한 놈에겐 이만 벌도 아깝지"라며

서슬퍼런 압박을 가하고, 살려달라고 용서를 구하는 장내관에게 목숨을 보전하고 싶으면

그 동안 동궁전에서 일어난 일을 하나도 빠짐 없이 낱낱이 고하라고 몰아붙입니다.

결국 장내관은 모든 일이 서지담(김유정)이 대궐에 들어온 날부터 시작되었다고 고합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하지 않았느냐? 너의 증언이 필요하다.

 

 

 

장내관의 말을 들은 혜경궁 홍씨는 곧 사람을 시켜 지담을 보쌈을 하여 납치해 오게 합니다. 

그리고 서지담이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이런 식으로 납치해 온 것에 대해 당돌하게 따지자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하지 않았느냐? 너의 증언이 필요하다"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세자빈이 세자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임을 알게 된 지담은 신흥복 사건 때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음에도 이를 은폐했다고 털어놓습니다. 혜경궁홍씨는 지담에게 국청에서 살인사건을

목격했던 당시를 낱낱이 증언할수 있느냐고 묻고, 지담은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백천간두로 몰릴지 날개 달고 날아오를지는 두고봐야 알 일입니다!

 

 

 

지담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후 혜경궁홍씨는 의금부 판사인 아버지 홍봉한(김명국)을 만나

"전 좌포청 종사관 민우섭을 당장 잡아들이세요. 잡아들여서 국청에 세워야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홍봉한이 "진정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민우섭은 민백상의 아들입니다.

민백상은 노론 중에서 실세 중의 실세여서 이렇게 당과 척을 지면 이제 아비의 처지가

백천간두에 몰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우려를 표하며 난감해하자 "백천간두로 몰릴지 날개 달고

날아오를지는 두고봐야 알 일입니다"라며 아비의 머리를 뛰어넘는 정치적이고 지략가다운 말을 합니다.

 

 

 저하께서 살인이라니요! 국청을 다시 열어주십시요!

 

 

 

이제 혜경궁 홍씨는 세 살 난 아들 이산(훗날의 정조)과 함께 영조의 처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처연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태도로 시부 영조(한석규)를 향해

"다시 국청을 열어주십시오. 저하께서 살인이라니요! 누명이면 어찌합니까? 진실을 밝히고자

하옵니다. 국청을 다시 열어주십시요!"라고 대죄하며 영조와의 한판승부를 시작합니다.

사태 파악에 참으로 능란할 뿐 아니라 그 신속함 또한 놀라운 가히 여장부다운 면모입니다.

 

 

 눈빛을 단정히 하세요. 왕자로서의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에게 이끌려나와 울음을 터뜨리며 대죄를 하다가 지친 원손 이산이 가엾은 표정으로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떼쓰듯 흔들어대자 혜경궁홍씨는 그 어린 아들을 딱해하면서도 

"눈빛을 단정히 하세요. 왕자로서의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엄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곁에 있던 상궁이 안타까운 마음에 원손을 안아주려 하자 “어허. 이 무슨 당치 않은 짓이냐.

원손께서 대죄를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나서지 마라!”고 날선 목소리로 내뱉습니다.

 

 

 국본이 위기에 몰렸음에도 돕지 못하면 그 또한 국모 된 자의 바른 도리는 아니지요.

 

 

 

결국 손주 원손까지 대동하고 나와 대죄를 하는 며느리 혜경궁 홍씨와의 기싸움에서 백기를 든

영조가 처소를 나와 분노와 미움이 섞인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

안 보이느냐"라고 말하자, 혜경궁 홍씨는 "아이가 아니라 원손이옵니다. 저하.

원손은 지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구하고자 대죄를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국청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저와 원손 모두 이곳을 무덤으로 삼을 것이옵니다"라고 맞섭니다.

 

그리고 영조가 “알았으니 물러가 있어. 앞으로는 이런 일에는 나서지 마라”며 국모의 품격을 운운하자 

"국본이 위기에 몰렸음에도 돕지 못하면 그 또한 국모된 자의 바른 도리는 아니지요”라며

한치도 물러설 뜻이 없음을 내비치며 영조와 대립합니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들 이선도 버릴 작정인 영조와 어떻게든 지아비 이선을

지키고자 하는 며느리 혜경궁 홍씨의 날선 대결이 참으로 팽팽합니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지요.

 

 

 

하지만 이렇듯 서슬푸른 카리스마를 내뿜는 혜경궁 홍씨도 지아비인 이선 앞에서는 참으로 

다소곳한 아녀자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옥에서 나온 이선이 모처럼 아들 이산과 함께 놀아주면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던 중 혜경궁 홍씨를 향해 "부인,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어제와 같은 일이, 아니, 어제보다 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쳐도 그 일로 인해

이 아이가 동원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라며 간곡히 부탁하자, 그녀는 이산을 향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억누르면서 다소곳한 표정으로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지요"라고 말합니다.

 

국본 이선의 진실을 추구하는 올곧은 정신과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인애의 마음,

그리고 담대함과 지략이 뛰어난 여장부이면서도 현명함과 다소곳함을 잃지 않는 혜경궁 홍씨를

보고 있노라니,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죽지 않고 영조의 뒤를 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천의 얼굴로 노회한 영조를 쥐락펴락하고, 교활하고 음험한 영의정 김택(김창완)의 뒤통수마저

가볍게 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혜경궁 홍씨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잘 다스린 왕 중

한 사람으로 길이 후세에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왕 노릇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 왕비의 역할이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청사에 길이 남을 왕비를 간절히 꿈꾸었건만 안타깝게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정조 이산의

어미로 만족해야 했던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며 조선의 왕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의 왕비

 

 왕비의 직무

 

조선의 왕비는 왕의 배우자로서 부과된 직무가 많았다.

궁궐 내 여러 가지 일을 주관하고 왕을 내조할 뿐 아니라 종묘의 제사 받들기,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가 생존해 있다면 웃전 모시기, 왕자와 왕손의 양육과 대통을 잇게

하는 일 등을 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왕자, 왕손의 양육과 대통을 잇게 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여성이 남의 가문으로 출가하는 것은 오로지 그 집안의 후사를 이어주기 위해서였다.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효도였는데, 모든 출발점이 가문에 있었던

조선시대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왕비는 오히려 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왕과 왕비의 베개 중에 종사침(螽斯枕)이라는 것이 있다. 종사란 한 번에 아흔아홉개의

알을 낳는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인데, 많은 자손을 바라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합방도 길일을 택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아 왕비가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의 경사였다.

 

간택제도의 연원  


조선왕실은 철저하게 이성혼(異性婚)을 지켰다.

같은 친족끼리의 혼인을 오랑캐의 풍습으로 보는 유교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욍비가 되려면 일단 간택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간택제도의 시작은 태종 대부터였다. 태종은 이속(李續)의 아들을 부마로 삼고자 하여

장님 매파 지화를 보냈지만, 이속은 손님과 바둑을 두다가 찾아온 지화를 보고

“짚신을 삼기에는 새끼날이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즉 상대가 맞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거절당한 태종은 화가 나서 이속을 서민으로 강등하고 그 아들을 영영 장가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사대부의 자제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직접 부마를 선택했다.

 

이렇게 시작된 간택제도는 초기의 경우 왕비나 세자빈을 선택할 경우에만 입궐시켜 선발했고

그 외에는 상궁 혹은 감찰중사씨(監察中司氏)를 내보내 선택하게 했다.

선조 이후부터는 서자 출신의 배우자도 모두  입궐시킨 후에 친히 간택했다.

 

간택 절차  


왕비 간택시 먼저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다.

좋은 배필을 구하기 위한 조처라고는 하지만 이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왕비 간택에는 정치적인 고려가 훨씬 강하게 작용했다.

금혼령에 해당하는 인물은 사대부집의 규수로 아홉 살에서 열일곱 살 정도의 처녀였다.

 

사대부 집안의 규수라고 해서 모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국성(國姓) 및 본관과 관계 없이 이씨의 경우, 대왕대비전과 동성인 자는 5촌 이내, 혼인 당사자의

이성 친형제 항렬로서 종8촌 이내, 혼인 당사자의 이성 친형제 항렬로서 종8촌 이내,

부모 중 한 사람이 없는 경우는 제외되었다. 부모가 병중에 있거나 병에 걸린 경우도 제외되었다.

 

이상과 같은 경우에 해당되지 않은 사대부 집안의 규수는 반드시  왕비 후보로 신고해야 했다.

만일 신고하지 않을 때에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실제로 현종 때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응모자가 기대에 못 미치자 신고하지 않은

집안에 대해 벌을 주겠다는 교지를 내리기도 했다.

 

금혼령을 내려 자격조건이 되는 처녀의 단자를 받은 다음에는 택일을 하여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앉은 자리에서 아버지의 성명을 쓰게 하는 초간택에서부터

최종 세 명의 후보를 선택하기까지 세 번의 절차를 거쳤다.

마지막 삼간택은 왕과 왕비 앞에서 치러지며,

이를 전후로 정승들과 논의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이들 가운데 삼간택까지 올라간 처녀는 시집을 갈 수 없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며,

처녀로 늙든지 후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삼간택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금혼령이 풀렸다.

간택된 처자는 그 날로 왕실에서 마련해 둔 별궁으로 가서 가례를 올리기 전까지

국모로서 갖추어야 할 교육을 받았다. 가례를 올리고 나면 종묘에 고한 다음

중국 황제의 고명을 받고 마지막으로 책봉의식을 거행한 후에야 비로소 국모로서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간택방식이 전형적이긴 했지만 조선시대 내내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변수에 따라 다양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자빈에서 왕비로 책봉되는 경우, 즉 적장자 상속의 원칙이 지켜지면서

왕위 계승이 정상적이었던 경우는 13명뿐이이었다.

첫번째 왕비가 폐서인되거나 사망해 계비로 간택된 경우, 후궁이 왕비로 책봉된 경우,

군부인이나 부부인이 세자빈을 거쳐 왕비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중전의 간택은 정치적인 변수가 많이 작용되었으며

실제로 중전들은 친정식구들을 대거 정계에 등용시켰다.

 

 


 

 

왕비배출 가문 


조선시대 왕비는 합법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왕실에서 최고의 연장자가 되면 후계자 임명과 수렴청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다음 왕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왕이 사망하거나 정치적인 변수로 폐서인되었을 때

왕실의 최고 연장자인 왕비 혹은 대비가 후계자 임명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물러났을 대가 대표적인 경우다.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조선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후계자 임명권과 수렴청정의 권한을

여자에게 주었던 것은 왕위 찬탈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전주 이씨가문이 500년 동안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정치운영상의 묘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사회에서 입신양명의 기회로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다.

3년에 한 번씩 실시되는 식년시에 급제하는 것은 개인의 영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었으며 관료를 진출하여 정치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둘째, 국혼이다.

왕실과의 결혼은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왕과 사돈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정치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는 주효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권력과 부를 가진 명문가와의 결혼을 통한 세력확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경유착, 정정유착, 경경유착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국혼임은 말할 것도 없다.

명문가문에서 딸이 태어나면 왕비로 들이는 것을 학수고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이상 비밀의 문 천의 얼굴 혜경궁 홍씨 박은빈..조선의 왕비에 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