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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비밀의 문 무소불위의 왕좌에서도 늘 불안초조한 한석규(영조) 조선의 왕 이래도 하시겠습니까?

 

비밀의 문 무소불위의 왕좌에서도 늘 불안초조한 한석규(영조)

조선의 왕 이래도 하시겠습니까?

 

비밀의 문 무소불위의 왕좌에서도 늘 불안초조한 한석규 영조

 

 

SBS 드라마 비밀의 문 - 의궤살인사건에서 영조(한석규)는 맹의 때문에 늘 불안초조합니다.

남이 차려준 밥상을 받아 왕위에 오른 영조였기에 노론과 맺은 맹의가 만천하에 알려지면 

자신의 정통성이 무너지는 수치를 겪어야 하므로 노론의 영수 김택(김창완)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마음대로 분노도 터뜨리지 못합니다.

 

 

비밀의 문 영조, 노론의 영수 김창완(김택)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마음대로 분노하지도 못한다

 

 

정사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자신의 발목을 잡는 맹의를 찾아야 한다고 눈물을 흘리고 호소하면서

영조는 자신을 포함하여 권력에 영혼을 팔아버린 군왕이라는 족속들이 얼마나 모질고

진저리나는 족속들인지 자탄하기도 합니다.

 

 

 

 

분노하고 좌절하고 한탄하는가 하면 잔뜩 공포에 떨다가 맹의를 찾아달라며 박문수(이원종)의 손을

부여잡고 한없이 불쌍한 표정으로 눈물짓기도 하는 한석규가 연기하는 광기조차 느껴지는 영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렇듯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전전긍긍하는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이 왕이라면 굳이 왕이 되고 싶어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왕(王)이라는 글자는 삼(三)과 곤(丨)의 합성어입니다.

즉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하는 '삼'자를 하나로 꿰둟는 '곤'자가 합해진 글자입니다.

하늘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땅 위의 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통치권을 위임받은 군주의 권한은 글자 그대로 무소불위였습니다.

그의 말이 법이었고 천명으로 인식되었던 만큼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은 이러한 무한대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반면에 그만큼의 의무도 다해야 했습니다.

특히 조선의 왕은 유교적인 이념에 위배되면 안 되었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경연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무한권력을 손에 쥐는 대신 무한책임을 다해야 하는 왕은 

그야말로 고달픈 직업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조선의 왕 이래도 하시겠습니까?>라는 주제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왕의 자리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님을 살펴본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함께 올립니다.

 

 

 

 

흔히 왕 하면 떠오르는 것은 으리으리한 구중궁궐에서 아름다운 궁녀들과 내관을 곁에 두고

최고급으로 차린 수라상을 받으며 신하들을 호령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그래서 어린시절에는 누구나 한 번쯤 "아, 내가 왕으로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왕의 24시를 나타낸 위 시간표에서 보듯이 매일 저렇듯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 내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 그런 상상을 하는 일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왕의 하루는 해뜨기 전인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왕실어른들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해뜰무렵 조회를 한 뒤 신료들과 학문토론 겸 정치토론인 경연에 참석한다.

아침식사 후 곧바로 신료들에게 업무보고를 받고 각 행정관리들과 회의를 한 후 간단히 점심을 먹고

또다시 신료들과 함께 주강에 필요한 학문을 익힌 다음 오후 3시부터는 상서를 검토한다.

 

 

 

 

그 후 다시 저녁 경연이 이어진다. 오후 7시부터 시작되는 저녁경연은 보통 서너 시간 동안

계속됐는데, 그렇게 업무를 마치고 왕실어른들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면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렇게 바쁜 일정 속에 왕이 처리하는 직무는 만 가지나 될 정도로 많다고 하여 만기(萬機)라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왕의 움직임은 모두 신하들에게 노출되고 정확하게 기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은 용변마저 자유롭게 볼 수 없었는데, 반드시 궁녀가 보는 앞에서

왕의 전용 요강인 매화틀에서 용변을 봐야만 했다. 그리고 왕의 배설물은 궁중 의사들에게 옮겨졌는데,

궁중의사들은 용변을 직접 맛보고 왕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를 판별해 내야 했다.

바쁜 일정 속에 용변조차 마음대로 볼 수 없었던 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왕을 힘들게 했던 존재는 바로 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들이었다.

 

 

 

 

1. 태종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이자 조선의 기틀을

다진 창업군주다. 왕자시절 왕위싸움에서 조선의 중신들을 처단하고 피를 나눈 형제들까지

무력으로 제압했던 천하무적 태종이었지만 유일하게 무서워했던 존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편전에서 업무를 보면서 태종을 몰래 엿보고 있던 사관(史官)이었다.

 

 

 

 

그는 태종을 몰래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는데, 사관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한 태종은 어느 날 "앞으로 사관의 입궐을 금지하도록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런데 사관은 이에 굴하지 않고 병풍 뒤에서 엿듣고, 절차도 없이 숨어들어오고,

얼굴을 가리고 몰래 미행까지 하면서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다치게 된 태종은 이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싫어서

"이 사실을 절대 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신하들에게 은밀히 명했다.

하지만 사관은 "왕께서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기록하지 말라는 것도 "기록하지 말라 했다" 하며 기록하는 사관을

태종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천상천하유아독존 태종은 투철한 사명감과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사관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영조  

 

 

조선의 21대 왕 영조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며 탕평책, 균역법을 실시하고 신문고를 설치하여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이다. 그런데 1737년 3월 26일 영조가 "임금 노릇이 이렇게 하기 힘들단 말이냐"

하고 엉엉 울며 불만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과거시험에서 이현필이라는 선비가 제출한 답안지에 있었다. 

이현필은 답안지에 영조가 궁녀를 너무 많이 뽑는 것에 대해 질책했던 것이다.

그러자 영조는 무슨 왕이 궁녀 하나 도 마음대로 못 뽑느냐며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실제로 왕실에서 궁녀를 봅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이 궁녀를 더 뽑으려고 하면

신하들이 나서서 제동을 걸며 왕을 비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때문에 병력 증강보다 더 힘든 것이 궁녀 증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신하들은 왜 왕의 궁녀 선발에 제동을 건 것일까?

그것은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내시든 궁녀든 왕 옆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왕은 그만큼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동시에

왕권 강화로 가는 길이었기에 신하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즉 궁녀 증원에 대한 논란은 왕권과 신권(臣權)의 힘겨루기에서 비롯됐다.

 

결국 왕들은 신료들의 견제에 맞서 실제적으로는 궁녀의 일을 했지만 궁녀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일종의 비정규직 궁녀인 무수리를 뽑는 것으로 궁연 증원을 대신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자신을 보필할 궁녀조차 함부로 뽑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셈이다.

영조가 임금 노릇 하기 힘들다며 눈물을 흘렸던 것은 이런 견제세력에 대한 통탄스러움 때문이었던 것이다.

 

 

3. 중종

 

1506년 연산군의 폭정에 시달리던 조선의 조정.

이조참판 성희안,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 주축이 된 반정군이

궁궐로 진격해 연산군의 측근을 살해하고 연산군을 폐한 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11대 왕 중종이다.

중종은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 준 반정공신들을 등에 업고 왕도정치를 시행하기 위해 애썼는데,

그 과정에서 조광조 같은 훌륭한 문신을 등용한다.

 

 

 

 

그런데 중종은 툭하면 "대체 공부를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혹시 요즘 혼자 계실 때

마음공부를 소홀히 하고 계시는 건 아니옵니까?" 하며 조광조에게 혼이 나곤 했다.

즉 중종은 자신이 등용한 조광조에게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야단을 맞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하들 때문에 중종은 조강지처와 이별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종의 조강지처는 단경왕후 신씨였다. 연산군 재위 시절 이조판서를 지냈던 신수근의 딸인

그녀는 12살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이었던 중종과 혼례를 올렸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다. 신씨는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녀에게 허락된 행복은 고작 1주일뿐이었다.

 

"왕비를 폐하셔야 하옵니다. 신씨 집안은 패주 연산군과 인척간이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에 염려가 되기에 처단하기를 청하옵니다"라며 중종의 신하들이 왕비를 폐하라고 탄원했기 때문이다.

 

신씨의 아버지 좌우정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아

중종이 집권한 이후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는데, 이에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반정공신들이 역적의 딸을 왕비로 둘 수 없다고 하여 신씨를 폐하라고 간한 것이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신하들을 위해 매우 사랑했던 조강지처를 버려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신하들의 말을 따를 것인가 사랑을 택할 것인가 고민하던 중종은 결국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라 밖으로 내치겠다"며 신하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자신을 왕위에 옹립해 준 신하들의 강압에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쫓겨난 신씨에게 중종은 힘없고 나약한 존재였다.

 

 

 

 

그 외에도 태종과 영조, 중종의 서자 등용문제를 놓고 재임기간 내내 신하들과 싸워야 했던 성종,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의 복상(服喪)문제로 신료들과 충돌해 예송(禮訟)논쟁을 벌여야 했던 현종,

청을 벌하겠다는 북벌론을 주장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그 뜻을 접어야 했던 효종 등의 사례에서

신하들 때문에 곤욕스러웠던 왕들의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다.

무소불위의 군력을 누렸을 것으로 예상되는 조선의 왕들이지만, 어쩌면 그들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평민들의 삶을 간절히 원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