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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 세자 이선(이제훈)을 지키는 동궁전 최상궁..궁궐 속 제3의 세력 궁녀와 정5품 상궁

 

비밀의 문 세자 이선(이제훈)을 지키는 동궁전 최상궁

궁궐 속 제3의 세력 궁녀와 정5품 상궁 

 

비밀의 문 세자 이선(이제훈)을 지켜라 동궁전 최상궁  

 

 

비밀의 문에서 세자 이선(이제훈)은 신흥복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자빈 혜경궁홍씨(박은빈)를 홀로 두는 시간이 많고,

합궁일로 주어진 길일마저 잊고 맙니다. 그런 이선에게 최상궁(박현숙)은 오늘이 혜경궁홍씨와의

합궁일임을 고하며 “마마를 아껴달라. 험한 궁살이에 힘이 돼달라”고 당부합니다.

 

청운대 교수 김경수님과 역사서 저자인 이영화님의 [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에 따르면

여관(女官)이라고 불리던 궁녀는 관리의 품계를 받았고, 또 품계에 입각해서 매우 엄격한

위계질서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궁녀의 품계는 10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이 등급을 차례로

밟아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 바로 상궁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세자와 혜경궁홍씨 사이에서 갖가지 고초를 겪고, 심지어는 세자를 지키기 위해

혜경궁홍씨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굴욕까지 감내하는 최상궁을 보면서

궁궐 속 제3의 세력이라고도 불렸다는 궁녀와 그 궁녀 중에서도 고위직인 정5품에 속했던

상궁에 대한 부분을 [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를 통해 좀더 자세히 알아본 내용입니다.

 

비밀의 문 - 의궤살인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비밀의 문 궁궐속 제3의 세력 궁녀와 정5품 상궁

 

 

세자 이선은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사건과 의문들로 인해 머릿속이

몹시도 복잡한지라 혜경궁홍씨의 처소를 찾는 일이 내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상궁의 간곡한 당부에 못 이겨 세자빈에게 갑니다.

 

 

 

 

그런데 혜경궁홍씨 앞에 앉는 순간 세자 이선의 머릿속에 갑자기 사건에 대한 단서가 떠오르고,

이선은 혜경궁홍씨에게 “미안합니다. 부인”라고 말하고는 말릴 새도 없이 황급하게 방을 나섭니다. 
홀로 남은 혜경궁홍씨는 전혀 생각도 못한 이 어이없는 상황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결국 분노한 혜경궁홍씨는 세자의 행방을 알기 위해 동궁전 최상궁을 불러오고,

"저하께서 어디 계시는 고하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최상궁은 단호한 표정으로 "모릅니다"라는 대답만 계속할 뿐입니다.

 

 

 

 

그 태도에 더욱 화가 치민 혜경궁홍씨는 "대체 동궁전에서 무슨 모사가 벌어지고 있는 건가.

그대가 저하를 보필하지 못하니 내가 보필할 것이다. 그러니 저하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윽박지르면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지만 최상궁은 끝내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 후 이선은 스승 박문수(이원종)가 신흥복 살인사건의 배후라는 증거가 나오자 

큰 슬픔과 절망에 젖습니다. 십수 년을 부왕보다도 더 따른 스승이었기에 그 상심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최상궁은 세자 이선을 만나러

동궁전에 온 혜경궁홍씨의 앞길을 막아섭니다.

 

 

 

 

혜경궁홍씨가 어서 비키라고 소리치자 최상궁은 아예 무릎을 꿇고 비켜줄 수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최상궁은 이선이 홀로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자가 슬픔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혜경궁홍씨는 더더욱 완강한 태도로

“저하의 슬픔 그 곁을 지키는 것 또한 나의 소임이라 여기지 않나”라고 돌아갈 뜻이 없음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최상궁은 세자 이선이 혜경궁홍씨에게 닫힌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어 마음을 안으로

들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이어서 “마마와 더불어 슬픔을 나누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그러나 오늘은 그 날이 아니라고 혜경궁홍씨를 설득합니다. 

 

 

 

 

결국 혜경궁홍씨는 무릎까지 꿇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간청하는 최상궁의 말을 받아들이고  

발길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갑니다. 

 

최상궁 같은 든든한 사람이 저렇듯 철저하게 지켜주니 세자 이선도 마음껏 울고

다시 기운을 얻어 사건 해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궁녀와 궁녀의 고위직인 상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궐 속 제3의 세력 궁녀 

 

구한말의 궁궐 여인들 가운데 순종왕후 순정효황후 윤씨와 후궁, 궁녀들

 

 

조선왕실은 국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궁중생활이 이루어졌기에 국왕 가족을 시중드는 수많은

여성이 필요했다. 궁녀는 대전, 내전, 대비전, 세자궁과 같은 각종 궁에서 일하던 여성들이었다.
궁녀는 강제로 징발되지는 않았으며, 부모들의 의사에 따라 궁궐로 들여보내졌다.

부모들이 눈물을 머금고 구중궁궐에 평생 갇혀 살아야 하는 궁녀로 딸을 들여보낸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가난한 백성의 딸이 궁녀가 되었다가 일약 출세하는 수도 있었다.

인물이 특출나거나 왕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궁녀와 그 친정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이런 요행은 500~600명이나 되는 궁녀 중에서 한 세대에 고작 다섯 손가락에 꼽힐까말까했으며

대다수 궁녀들의 꽃 같은 청춘은 대궐의 그늘에서 피지도 못하고 졌다.

 

 

 신랑 없는 결혼식

 

궁녀는 대체로 10세 정도에 궁궐에 들어왔다. 심지어는 4세에 입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어린 소녀들은 견습기를 거쳐야 궁녀가 될 수 있었으며, 

견습기의 궁녀는 견습나인이라고 불러 정식 궁녀와 구분했다.
견습나인은 공손히 앉고 일어서는 법, 절하는 법, 조용히 걷는 법과 말하는 법,

글쓰는 법 궁중생활에 필요한 법도를 엄격한 훈련과정을 통해 익혔다.

견습나인으로서의 수련기를 거치고 나면 궁녀는 관례를 치러 나인이 되었다.
나인은 정식 궁녀를 말한다. 관례는 원칙적으로 견습나인으로 들어와서 15년이 지나야 했다
나인이 되면 견습나인들이 ‘항아님’‘이라고 불렀다.


관례식이자 성년식이지만 궁녀의 경우는 관례가 성년식에만 그치지 않아

사실상 혼례식의 의미를 겸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궁녀는 왕이라는

한 남자를 위해 살아야 하는 여인들이었으므로 왕과의 혼례식을 올렸다.

그러나 신랑은 없고 신부만 있는 혼례식이었다.

 

관례식이자 혼례식이 치러지는 날은 궁녀가 일생에 한 번 호사를 누리는 날이었다.

궁녀가 속한 전각의 상전은 축하하는 뜻으로 명주, 모시, 무명, 베 한 필씩을 보냈다.

궁녀의 본가에서는 누비바지, 속치마 등 의류와 장롱, 반닫이 등 세간, 잔치음식까지

장만해서 들여왔다. 집에서도 혼례로 생각하는 것이다.
궁녀의 혼례식은 신랑만 없을 뿐이지 여느 혼례식과 같은 복장과 절차로 이루어졌다.

 

혼례를 치른 궁녀는 견습나인에서 나인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나인이 되면 세간을 장만해 따로 방을 꾸며 살 수 있었다.

또한 나인이 된 궁녀는 ‘방아이’ 또는 ‘각심이’라고 부르는 하녀를 하나 둘 수도 있었다.
마음맞는 궁녀와 한방을 쓰기도 했는데, 동거하는 궁녀들이 간혹 동성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엇다.

평생을 궁궐에서 외롭게 보낸 궁녀의 말년은 초라하고 외로웠다.

궁녀는 일단 입궁하면 종신제였다. 그러나 노후에 근력이 없어져서

근무를 할 수 없거나 병이 나면 본가로 돌아가야 했다.

대궐에서는 왕과 그 직계 및 배우자 외에는 절대 죽지도 말고 병들지도 말아야 했다.

 

늙고 병든 궁녀는 본가의 동생이나 조카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궁녀가 죽으면 대궐에서는 제수품을 내렸다.

그것으로나마 본가의 식구들이 궁녀의 말년의 죽을 지켜보게 한 것이다.

 

 

 궁녀의 고위직 상궁

 

 

 

궁녀는 여성 관리였다. 여관(女官)이라 불리던 궁녀는 관리의 품계를 받았고,
또 품계에 입각하여 매우 엄격한 위계질서를 지켜야 했다.

궁녀의 품계는 10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이 등급을 차례로 밟아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은 상궁이었다.
궁녀가 상궁에 오르는 데 걸리는 세월은 견습나인에서부터 30년 내지 50년이 걸렸다.

그러므로 6세에 입궁한 여인이라면 적어도 36세는 되어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상궁은 모두 정5품의 품계를 받았지만 맡은 직책에 따라 서열은 달랐다.

상궁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급은 제조(提調)상궁이었다

제조상궁은 상궁 중에서도 가장 고참인 상궁으로 궁궐의 모든 궁녀를 총괄했다.

수백 궁녀의 으뜸인 제조상궁은 그 권세와 권위가 영의정에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제조상궁의 임무는 왕의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재산을 관리하는 데 있었다.

왕을 가까이 모시는 제조상궁은 정치의 이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였다.

제조상궁의 다음 자리는 부제조상궁이었다.부제조상궁은 특히 내전의 곳간을 책임졌다.

이곳에는 왕의 사유재산에 해당하는 물품들이 있었다.

 

잠시도 왕을 떠나지 않고 대기하고 있는 대령상궁도 중요한 직책이엇다.
대령상궁은 일명 지밀상궁이라고도 했다.

지밀상궁은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자리였기 때문에 까다롭게 선발했다.

지밀상궁으로 키워질 궁녀는 4세 때 입궁시켜 미리부터 특별한 교육을 시켰다.

 

보모상궁은 왕의 자녀교육을 맡은 상궁으로 동궁에 두 명, 그 밖에 왕자녀 궁에 한 명씩 있었다.

시녀상궁의 직무는 다양했다. 궁궐의 서적을 관장하고 의식이 있을 때는

임금의 교지를 낭독했으며, 궁중 연회에서 왕을 비롯한 왕족들의 시위와 안내를 담당했다.

시녀상궁은 왕실에서각 종실과 외척 집에 내리는 하사품을 전달하는 업무도 담당했는데,

시녀상궁이 왕비와 왕대비의 특사로 본댁에 나가면 봉명(奉命)이라 하여 그 집에서는 칙사로 대접했다.

 

궁녀들을 감찰하는 감찰상궁은 궁녀들의 비행을 감독, 고발하여 진급,상벌 등 인사에 관련되는 자료를 관장했다.

 

 

 궁녀의 외로움과 가뭄

 

궁녀들의 외출  

 


대부분의 궁녀들은 상궁이 되고자 했다. 왕의 승은이라도 입어 출세하는 일은 소망일 뿐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10여 세에 궁궐에 들어가 20여 세에 관례 겸 혼례를 치른

궁녀가 40세 정도에 상궁이 된다면 그나마 위세를 펴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궁녀가 상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상궁도 되지 못한 채 늙어가는 궁녀가 태반이었다.

설령 상궁이 되었다 해도 대궐에 갇혀 사는 궁녀들의 외로운 인생이 별달리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궁궐에 들어온 궁녀의 삶은 외롭디 외로울 뿐이었다.

궁녀가 지었다는 다음 시조에서는 서러움이 묻어나온다.

 

연못이 든 고기들아 누가 너를 몰아다가 여기에 두었느냐.
북쪽 바다 맑고 넓은 연못 어디 두고 이 못에 와 있느냐.
들고서 못 나가는 처지는 너나 나나 무엇이 다르리.

 

사람들은 궁녀의 서러움이 원한을 쌓이게 하고 이 원한이 가뭄을 일으게 한다고 믿었다.
현재나 조선시대나 농작물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재해는 가뭄이었다.

농본국가였던 조선은 가뭄에 대한 공포가 유독 강했다.

조선에서 가뭄은 음양의 조화가 깨졌을 때 일어나는 하늘의 견책이 담긴 재난이었다.

 

가뭄이 들면 국가에서는 궁녀를 궁궐 밖으로 내보냈다.

혼자 사는 궁녀의 원한을 풀어야 가뭄이 그친다고 믿었던 것이다.

가뭄으로 궁녀들을 방출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그러나 궁궐 밖으로 나온 궁녀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궁녀의 혼인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미 왕과 혼례를 올린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궁녀가 남자와 관계를 맺은 경우 남녀 모두 현장에서 참할 수 있었을 만큼

궁녀의 남자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통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