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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 영조의 균역법..영조의 경제정책

 

비밀의 문 영조의 균역법..탕평정치를 펼친 영조의 경제정책

  

비밀의 문 영조의 균역법 영조 한석규가 국본 이제훈에게 균역법 시행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SBS 드라마 비밀의 문 12회에서 영조 한석규는 국본 이제훈과 함께 자신의 어미인 숙빈 최씨 묘를 찾은 후 눈물을 보이면서 균역법 시행에 대한 의지를 밝힙니다. 백성들에게 세 끼 밥만은 푸지게 먹게 하고 싶어서 균역법을 정성껏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당쟁싸움으로 인해 나이만 먹고 있으니 남은 시간 동안 과연 균역법을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합니다.

이선은 그런 영조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오래오래 강녕하시어 균역법보다 더 훌륭한 업적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며 부왕을 격려합니다. 그러자 영조는 균역법이 완성되어서 반포될 때까지 자신이 친히 정사를 돌보고 싶다고 말하고, 이선은 영조가 맹의에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부왕의 평생의 뜻인 균역법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기로 마음먹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영조 한석규가 균역법을 시행하기 위해 난항을 겪는 과정과 영조의 대표적 경제정책인 균역법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본 것입니다. 비밀의 문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비밀의 문 영조의 균역법 국본 이제훈과 박문수, 홍계희, 채제공과 함께 균역법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영조

 

 

영조는 세자 이선과 호조판서 박문수(이원종), 병조판서 홍계희(장현성), 홍문관 채제공(최원영)과 함께 균역법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먼저 박문수는 반상의 구별 없이 매 가구마다 군포(軍布)를 한 필씩 바치게 하자고 말한다. 군포란 군역 대신 납부한 베를 말하는데, 당시 일반 장정들은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1년에 베 두 필을 바쳤고 정부는 이 군포를 군비에 충당했다. 그런데 이 부담이 너무 크니 두 필받던 것을 한 필로 줄이자고 한 것이다.

 

박문수의 말에 영조는 "그래, 나라를 지키는 데 반상이 따로 있나" 하며 찬성의 뜻을 보인다.

그러나 홍계희는 양반들의 조세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신에서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호전론(戶錢論)에 대한 반발이 심할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호전론이란 양반, 상민의 구분 없이 가구당 동일하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자 영조는 그렇다면 자신이 직접 백성들에게 나아가 지지를 모으겠다고 하며 순문(임금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묻는 일) 일정을 잡으라고 지시한다.

 

 

 

 

 

순문을 위해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간 영조가 백성들을 향해 군포를 반으로 줄여주겠다고 하자 백성들은 기뻐하면서 만세를 외친다. 영조는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세자와 함께 반드시 균역법을 시행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강하게 내비친다.  

 

 

 

 

그런데 그 다음 순문을 나가는 날 박문수는  황망한 얼굴로 홍화문을 막아서며 영조와 국본 이선을 향해 순문 일자를 다른 날로 잡을 것이니 오늘은 발길을 거두어달라고 읍소한다.

 

 

 

 

하지만 돌아갈 뜻이 없는 영조는 기어이 홍화문을 나서고,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반들과 유생들을 보고 놀란다. 양반과 유생들은 영조와 국본이 나타나자 "호전법은 불가하옵니다. 반상이 유별하거늘 어찌 상것들과 한묶음이 된단 말씀이옵니까?"라고 외친다다. 영조가 언짢은 얼굴로 물러가라고 하지만 그들은 호전론을 폐지한다는 약조를 먼저 해달라며 상것들과 한묶음이 될 수는 없다고 잘라말한다.

 

 

 

 

분노한 영조는 "나라를 지키는 데 신분이 무슨 소용이냐! 이 나라가 어디 양반만의 나라더냐"고 소리치지만 그들은 군포를 내는 것은 상것들의 몫이고, 양반들은 그들을 지도하고 순화하는 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되는 일이라며 물러설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 말에 영조는 "군포는 왕실에서도 낼 것이다. 내탕금(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 한푼도 쓰지 않고 군포로 다 밀어넣을 수 있다. 왕실에서도 모범을 보일 터이니 그대들은 부디 이 과인의 뜻을 꺾지 마라"고 말한다. 그리고 "군주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세 끼 밥이다. 군포 부담으로 세 끼 밥조차 해결 못하는 백성들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가 어찌 군주라 할 수 있겠느냐"고 안타까우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러나 양반과 유생들 역시 도끼로 관을 내려찍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상것들과 한묶음으로 삼느니 차라리 이 몸을 쳐서 관 속에 넣어달라고 말한다. 또 반상의 도를 허물고자 하면 전하는 군주가 될 자격이 없다며 맞서는 그들은 군포마저 같이 부담한다면 반상의 법도가 무너질 것인데, 그러면 이 나라가 오랑캐의 나라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오랑캐국의 군주가 되시려 하느냐며 "폭군의 길을 자처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강경한 주장을 펼친다.

 

 

 

 

그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영조는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니놈들이 죽던 이 과인이 죽던 내 오늘 아주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겠다"고 소리친다.

 

 

 

 

국본 이선 또한 "내 그대들의 오늘을 기억하겠다. 백성들과 결코 한묶음이 될 수 없겠다고 한 그대들의 아집과 또한 이기심을 내 똑똑히 기억하겠다"며 분노를 금치 못한다.

 

 

 

 

하지만 이선은 곧 분노를 가라앉히고 흥분해 있는 영조에게 차분한 태도로 이만 물러가자고 하면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왕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라며  영조를 달랜다. 영조는 아들의 말에 간신히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물러갈 뜻을 보이고, 이에 이선은 "왕은 내가 직접 뫼실 거다"며 스스로  등을 들이대어 영조를 업고 처소로 돌아온다. 맹의로 인해 영조에 대한 의혹을 크긴 해도 아들로서의 효심 또한 극진함을 보여주는 이선이다. 

 


 

 

이번 일은 사실 이선 때문에 영의정에서 강등된 김택(김창완)의 계략으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양반과 유생들이 홍화문 앞에 모여 영조의 순문에 적극 반대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니 당시의 양반과 유생들이 그 동안 면제됐던 군포를 내게 될까봐 걱정하기보다는 소위 상것들과 똑같이 세금을 내게 되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못 견뎌하는 것 같아서 그 들의 오만과 아집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새삼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다음 글은 영조가 그토록 백성들을 위해 온마음을 다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균역법에 대해 간단히 알아본 것입니다. 

 

 

 영조의 균역법

 

조선사회에서 양인(良人)들은 장정이 되면 누구나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양인이란 양반과 천민 사이의 중간 계층을 말한다. 그런데 16세기 이후로는 군역 의무자라도 현역에 나가지 않고 군포를 대신 바치는 방법으로 바뀌었으며, 이 군포는 병역을 치르는 사람들의 경비를 마련하는 데 쓰였다.

 

 

 

 

하지만 국가질서가 문란해지자 군포를 내지 않는 무리들이 생겨나고, 일부 관리들은 군포 부과를 가지고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숙종 이후 양인에게 괴로움을 주는 군포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잘 알려진 폐단인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 족징(族徵), 인징(隣徵) 등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백골징포란 죽은 사람을 산 사람인 것처럼 군적과 세금대장에 올려놓고 군포를 징수한 것을 말하고, 황구첨정이란 병역 적령에 이르지 못한 젖먹이 어린애까지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던 횡포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족징이란 군역을 피해 도망간 자를 대신하여 그 친척에게 군포를 납부하게 한 것이고, 인징은 도망하거나 실종된 병역 의무자의 군포를 그 이웃에게 부당하게 징수하던 것을 말한다.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 중에는 심지어 스스로 성기를 자르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군포제의 폐해가 잇따르자 영조는 1750년 균역청을 설치하고 균역법을 시행했는데, 이로 인해 줄어든 국가수입은 종래의 권세가와 왕가에서 받아 오던 어장세, 염세, 선박세 등으로 보충했다. 영조가 시행한 균역법은 국가 수입은 줄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의 부담이 가벼워지고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뜻있는 개혁이었다.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한 것은 영조가 친히 홍화문에 나가서 백성들을 만나 여론을 수렴하는 소통의 정치를 펼친 것과 함께 그 의의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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