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 죽음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생사탐구기획 '데스'(Death)를 방송했습니다. 1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에서는 공포관리이론(TMT, Terror Management Theory)을 기반으로 좋은 죽음의 이미지와 나쁜 죽음의 이미지가 우리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았고, 2부 '비탐 에테르남'(Vitam aeternam: 영원한 삶)에서는 의학적 죽음을 맞은 후 남아 있는 의식과 사후세계의 존재를 양자물리학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리고 3부 '카르페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에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우리 삶의 질이 어떻게 향상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이 중 3부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현재를 즐기라면서 행복의 문을 열쇠 죽음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것이 좀 의아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가장 피해야 할 것이 죽음이라는 단어일 듯한데 말입니다. 하지만 삶을 이해하려면 이 세상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합니다. 이 프로에서는 바로 이 죽음이 어떻게 현재를 즐기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카르페디엠에 대해 함께 읽어보시면 좋은 글입니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기면서 사는 3가지 방법
인간을 비롯해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일까?
카르페디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미국 예일대 철학과 교수 셸리 케이건은 “삶의 비밀은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에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죽음이 삶의 자세를 갖추게 해준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삶의 끝, 죽음을 이해하면 보다 긍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동네에서 상가집과 뒷산의 무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상여를 드는 것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식장에서 상을 치른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죽음은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삶은 긍정적인 것이고 죽음은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부느이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에 끌리게 마련이다. 그러니 삶은 우리 주변에 가까이 두려 하는 반면에 죽음은 피하려고만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 무엇이 백 퍼센트 확률을 자랑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있어 가장 명백한 진실은 생명 있는 것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 아닐까.
모차르트는 "죽음은 진정한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영국 이스트런던대 범죄학과 앤드류 실케 교수는 “죽음을 마주하면 사람들의 심리가 변한다”고 말한다. 모차르트나 많은 학자들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 삶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
미국 아이비리그 3대 명강의 중 하나인 죽음 강의는 죽음이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현실적인 답변을 제시하며 세계인의 이목을 죽음에 집중시켰다. 그 주인공 셰리 케이건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서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삶을 다르게 살 수 있죠. 죽음은 당신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그의 죽음 강의에 이렇게 청중이 많은 이유는 죽음이 삶에 긍정적인 동기를 부여한다고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죽음이 당신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리는 화가 안토니아 롤스도 있다. 우아한 죽음(Graceful Death)이라는 전시의 주최자다.
롤스의 그림 속 주인공들 모습은 참 다양하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죽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 스티브가 암 진단을 받은 후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리게 되었고, 그 일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점은 죽음 그 자체를 말하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큰 사랑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롤스 작가의 52번째 무대는 크레어 씨다. 크레어씨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롤스 작가를 만났다. 오랜 시간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았던 그녀는 롤스 작가가 그린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삶에 대한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고,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요. 모든 것이 선물이죠"라고 말하는 그녀다.
롤스 작가는 죽어가는 사람들으 그리며 그 사람들의 진실한 모습과 마주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우아한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롤스 작가의 전시회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우아하다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전시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삶의 의미를 좀더 알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죽음의 질 1위 국가 영국에서는 죽음이 생의 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통해 삶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죽음알림 주간>을 두어 매년 5월이면 다양한 죽음관련 행사를 하는데, 이때 평소에 하지 않던 혹은 할 수 없었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1주일 동안 어디에서든지 자연스럽게하고 깊이있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잘 살고 잘 살기 위한 5가지로 유언장 작성하기며 노후요양 계획 세우기, 장기증서 작성하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망 이야기하기 등이 있으며 그 외에 아이들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나누기 등도 있다. 영국사람들이 처음부터 죽음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바꾼 것은 정부였다. 다잉매터(Dying Matter)는 죽음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창립 이후 5년간 영국의 죽음 금기를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준비가 부족함을 깨달은 영국 정부는 2009년부터 죽음알림 행사를 주관하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현재 죽음의 질 1위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영국에는 데스카페도 있다. 창립자 존 언더우즈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미국 등의 여러 나라에서 죽음은 눈에 뜨지 않도록 숨겨져야 했지만, 죽음을 피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에 관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영국 런던에 있는 데스카페 안은 지금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이야기하며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죽음을 맞이하기 좋은 날이라는 이름의 행사가 한창인 곳이다. 다들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죽음을맞이하기좋은날 행사’ 주최자인 뎁 윌크스 는 “탄생과 죽음은 모두 한 과정입니다. 누국가 죽는다면 숙연해지고 슬프겠지만, 누구나 죽게 마련이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이 행사를 개최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죽음 행사장 어디에도 검은색 옷을 입은 저승사자나 검은 띠를 두른 영정사진은 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임종체험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곳의 모든 죽음 관련 행사는 밝고 활기차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명확하다.
우리가 사는 삶에는 리허설이란 없다. 죽음알림주간 중에 열리는 모든 행사들은 우리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이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매우 평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죽음 관련 행사장에 아이들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습이다. 많은 아이들은 설탕으로 해골을 만들거나 하면서 죽음알림주간 행사를 즐긴다. 죽음에 대해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들 같은데 이 행사가 이들에게 과연 도움이 될까? 실제로 아이들과 학부모,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이들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삶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배워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죽음. 그런데 우리는 왜 피하려고만 하는 것일까?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자신의 저서 [죽음의 역사]에서 그 답을 찾는다.
중세 초기만 해도 사람들은 죽음을 인류 공동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의 죽음보다 공동체, 즉 우리의 죽음이라는 것에 더 집중을 했다. 그런데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개인주의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죽음도 나의 죽음으로 죽음의 주체가 변한다.
그 후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바로크 시대에는 죽음이 나와 멀어질 수도 있겠다고 느끼는 한편 떨어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죽음의 역사도 멀고도 가까운 죽음으로 변한다. 그리고 낭만주의 시대에는 종교의 힘이 전보다 더욱 약해진다. 신앙의 힘보다는 과학의 힘이 내가 갖고 있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시대의 죽음은 나와는 상관 없는 너의 죽음이 된다.
결국 오늘날 죽음은 우리의 것도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즉 삶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된 것이다.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20세기를 기점으로 죽음의 역사의 판도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제프리 고러는 어떻게 죽음이 터부가 되었고 20세기에 들어 죽음이 왜 섹스 대신 주요한 금기사항이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가 후반부터 20세기 이전까지는 생산이 중요했다. 그래서 생산활동을 방해하는 섹스 등의 쾌락을 금기시했다. 그런데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20세기 자본주의는 우리로부터 죽음을 잊게 하여 쾌락과 소비를 조장하게 된다. 문화사상가 로먼 크르즈나릭은 자본주의가 죽음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자본주의는 소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게 하고, 이 소비문화로 인해 상품가치가 없는 죽음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잊어버리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한편에서는 생명을 연장하거나 죽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이론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사실은 여전히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죽음을 외면할 수 있을까?
죽음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14주간의 웰다잉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후 교육 전과 후에 삶의 질과 관련된 질문에 답을 했다. 웰다잉 교육의 효과를 검증해 본 결과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요소인 행복감이 높아진 것이다. 우울증상도 감소하고 긍정적인 정신건강, 정신적인 힘이 증가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줄고 긍정적인 정신건강과 삶에 대한 태도가 좀더 긍정적으로, 그리고 자신에 대한 태도가 수용적으로 바뀌었다.닫아놓았던 죽음의 문을 개방하자 행복감은 높아지고 우리 삶의 질도 향상되는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로먼 크르즈나릭의 말을 들어보자.
"죽음은 상징이다. 이 상징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열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죠. 죽음의 목적은 후회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항상 미래릎 향해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하죠."
그리고 셸리 케이건 교수의 말이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70년 80년 혹은 90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이 짧은 삶을 허비해서는 안 되지요. 죽음을 받아들이면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와 같은 말이 삶에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중 최고의 축복이다"라는 말에 고개가 끄뎍여지는 순간이다.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 죽음. 흥미롭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