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로 보는 세상

화정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세자

 

화정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세자

 

 

선조의 적통딸 정명공주(이연희)의 기구한 일생을 그린 드라마 [화정]에 최근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적장자 소현세자(백성현)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천주교 신부 아담 샬로부터 서구문명을 접하고 반청노선보다 대청 실용주의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볼모로 잡혀간 지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반청사상을 고수하던 아버지 인조와 갈등 끝에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습니다. 드라마 화정과 역사채널e를 바탕으로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세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인조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화정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세자

 

후금의 칸은 후금의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칸을 황제로 칭하겠으며, 조선과는 군신관계를 맺겠다는 내용의 칙서를 인조(김재원)에게 보냅니다. 인조는 분노하며 후금에서 온 호차(사신)를 맞으러 나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에 대신들은 임금이 나서지 않으면 후금이 문제를 삼을 것이고, 자칫 전쟁이 발발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설득하지만 인조는 끝까지 호차를 맞으러 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소현세자는 후금의 사신을 그대로 돌려보냈다가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을 염려해 자신이 그들을 맞으러 가겠다고 합니다. 걱정스러워하며 자신을 말리는 아우 봉림대군(이민호)에게 그는 "아바마마에게 굴욕을 감당하라고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후금의 사신을 만나 아버지 대신 내가 나왔으니 여독은 자리를 옮겨 모화관에서 푸는 게 어떠냐고 권합니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후금의 호차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네가 왕이냐? 이 나라의 왕이 내가 아닌 너냐"고 아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소현세자는 "현재 조선에는 저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버지를 저곳에 내보낼 수 없었다”며 눈물로 간곡하게 호소해 간신히 인조의 마음을 누그러뜨립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소용조(김민서)는 인조에게 차라리 호차를 차라리 들이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면서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심정의 인조를 자극해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그 후 다시 후금의 장군을 만난 소현세자는 조선이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용골대의 직언에 수모를 겪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인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후금과의 맹약식에 참석하라고 진언합니다. "정묘호란 당시엔 전하께서 직접 나서지 않고 중신들이 대신했으니 이번엔 반드시 그 자리에 조선의 군왕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지금으로선 전란을 막을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며 후금과 생피를 나누어 마시는 맹약식에 꼭 가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합니다. 하지만 맹약식에 참석한 인조는 생피가 든 잔을 쏟아버리며 오랑캐들과 짐승처럼 생피를 나눠 마실 수 없다고 소리칩니다. 이로써 인조는 후금을 분노하게 만들고 결국 조선땅에는 또 한 차례의 전쟁이 몰아칩니다. 다음은 병자호란 후 심양으로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 것입니다.  


 

 비운의 왕세자 소현 의문의 죽음을 맞던 날 

 

 

소현세자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것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조선으로 귀국한 뒤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645년 4월 23일 세자의 병을 학질로 진찰했고 침을 놓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고 처음 병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4월 24일과 25일, 소현은 인조의 허락하에 이틀에 걸쳐 침을 맞지만 병이 났다는 기록이 있은 지 3일 만에 돌연 사망한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젊고 건강했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세자의 시신 상태가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곁에 있는 사람도 분변(分辨)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조선 왕들 중에는 정조, 선조, 고종 등 독살설에 휩싸인 왕들이 있긴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독살 정황을 찾아보기 힘든데,  소현의 죽음만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독살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사망 당일 기록에는 의관들의 오진과 잘못된 치료가 사망의 원인이라고 되어 있다. 인조실록에 씌어지니 것처럼 <함부로> 침을 놓은 사람은 의관 이형익이었다. 침을 놓은 후 바로 소현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독살의 하수인으로 의심받았다. 게다가 그는 특별추천을 받아 내의원 의관이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조에게 큰 총애를 받고 있던 그는 중신들이 벌을 주기를 청함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이형익이 신중하지 않았던 것이 없다”며 처벌받지 않았다.

 

장남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이었다. 게다가 장남이 사망했으니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1개월 만에 상복을 벗는다. 그리고 신하들이 예를 갖추기 위해 1년만이라도 상복을 입겠다고 청하는데도 이를 거부한 인조는 관례를 무시하고 세자의 짧은 장례를 지시할 뿐 아니라 이에 항의하는 신하를 해직시키기까지 한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은 일이다. 즉 소현의 장남 석철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도 소현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원칙을 무시한 세자 책봉에 대해 신하들은 대부분 반대했지만 인조는 그대로 밀어붙인다. 

 

 

8년 전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후 소현이  "나에게는 동생이 있고 아들도 있으니 내가 가겠다"며 철병하는 청나라를 따라 심양으로 떠나던 날 인조는 도성 밖 멀리까지 나와 눈물로써 아들을 배웅한 바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조는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로서의 정이 남아 있었다. 47일간 남한산성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인조와 소현세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인조는 소현을 이렇게 미워하게 된 것일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동안 심양의 남쪽 지금은 사허라 불리는 곳에서 소현은 농사를 지었다. 청이 식략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필요량의 세 배가 넘는 곡식을 거둬들일 수 있었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 또한 청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심양관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소현은 농사와 교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사서 농사를 짓게 했고 이렇게 해방시킨 사람만 수백 명에 이르렀다. 당시 심양에는 소현세자 부부, 봉림대군 부부, 궁녀 노비 등 500명이 기거했다. 

 

소현은 이렇게 심양관에서 쌓은 힘을 바탕으로 청나라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무역이 곧 정치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는 마침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으로 입성하고, 소현도 이들을 따라 북경으로 옮겨간다.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 소현은 당시 북경에서 활동하던 예수교회 신부 아담 샬과 만나 천주교와 서양과학을 접하게 된다.

 

 

아담 샬은 명나라와 청나라대 국립천문대인 흠천감의 최고 책임자였다. 아담 샬과 소현의 만남을 기록한 정교봉포(正敎奉褒)에는 "조선국과 이종(인조)의 세자가 북경에 와서 아담 샬의 명성을 듣고 자주 천주당에 왔다"고 씌어 있다. 조선과 청 사이의 외교현안에 대처해야 했던 소현은 외교의 최전선에서 고위급 외교관 역할을 한 셈이다. 청은 조선과의 현안이 생기면 소현세자를 찾음 원래 조선의 세자에게는 전결권이 없어서 외교적 재량권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청과 조선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조선의 국익을 위해 노력했던 소현세자였다.  

 

 

소현은 8년의 볼모생활 중 두 번 귀국했는데, 첫번째는 용골대가 대홍망룡의를 입게 한다. 소현은 대홍망룡의는 왕만이 입을 수 있는 의복이라며 강하게 거절하지만 용골대가 강권하는 바람에 입게 되는데, 인조는 이것을 보고 소현이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두번째는 소현과 강빈이 같이 왔는데, 이때도 인조는 소현이 청과 결탁해 어좌를 뺏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래서 소현이  가져온 각종 서책과 과학기구, 진귀한 물건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심지어는 청황제로부터 받은 벼루를 세자에게 집어 던지기까지 한다. 

 

실제로 청은 조선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소현세자를 이용하여 인조를 길들이기 위해 왕위교체론을 들먹이며 긴장을 시키곤 했다. 게다가 반청의 명분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집권한 인조가 스스로 그것을 허물어뜨렸기에 인조를 반청의 명분으로 몰아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데다 소현의 장인인 강석기는 잠재적 반정세력의 주요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아주 작은 불씨와 오해에도 큰 분란으로 악화될 소지가 다분한 상황이었다. 인조가 생사의 고비를 넘어 8년 만에 돌아온 아들 부부를 인조가 싸늘하게 맞은 것은 아들이 내 자리를 노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즉 인조에게 소현은 최대의 정적으로 부상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심양일기에 "세자가 낮게 신하들을 접견하하다가 책상에 기대어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니 신하들이 차마 우러러볼 수가 없었다"는 글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힘겨운 삶을 살았던 소현세자였다. 그러나 사가에 따르며, 소현세자는 심양에서부터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여서 의학적으로 독살의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소현세자 사후 손자와 며느리까지 죽인 인조의 행동에는 의혹을 거둘 수가 없다. 원손이 세자 책봉이 안 되자 강빈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인조의 처소로 달려가 하소연했는데, 이에 화가 난 인조는 강빈을 유폐시킨다. 그리고 이듬해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요리가 올려진 일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배후로 강빈을 지목한다. 강빈은 결국 역모로 몰려 인조에 의해 사사되고 그 후 강빈 일가는 모두 사사된다. 그리고 소현의 세 아들도 모두 제주도로 유배되고, 귀양간 지 1년 만에 큰아들 석철이 사망한다. 실록에는 풍토병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당시 사람들은 인조가 몰래 석철을 죽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둘째 석린도 3개월 후에 사망하고 막내 석견만 살아남는다.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에 방문한 적이 없다. 후세사람들이 살아 있었다면 훌륭한 군주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분으로 꼽는 소현세자는 고양시 서삼능 소경원(昭慶園) 에 안치되어 있다. 소현의 능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전각마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원래는 일반 묘와 마찬가지로 소현 묘라고 불렀으나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소경원으로 격상된다. 살아 있을 때나 죽음을 맞아서도 외로웠을 소현세자는 지금도 다른 왕능과 떨어져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상, 화정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세자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