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셈블리 필리버스터 국민진상 진상필 의원의 의사방해연설
북한이 지뢰도발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우리는 대북 확성기를 철거하기로 약속하면서 전쟁의 위기감마저 돌았던 남북대화가 극적으로 타결됐습니다. 무려 43시간여 동안의 마라톤협상이 이어진 끝에 극적 타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만 <사과>가 아닌 <유감>이라는 표현이 심히 <유감>이긴 하지만, 무력충돌 없이 협상이 마무리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어느 국회의원은 한 해수욕장에서 향우회 회원 180여명과 야유회를 열고 술자리를 가졌다가 맹렬한 비난의 화살을 맞는가 하면 또 어느 국회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생일파티를 열어 구설수에 올랐다고 합니다. 당사자들이야 개인적인 저녁자리를 두고 북한 문제와 연계시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좀 가혹한 일이 아닌가 싶을지 모르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누구보다도 나라와 국민을 염려해야 할 국회의원이 보여주기엔 매우 조심성 없는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능력은 뛰어나지만 도덕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총리후보를 사퇴시키기 위해 장장 25시간을 필리버스터(Filibuster)라는 합법적인 의사방해연설로 '국민진상'이라는 애칭까지 얻은 진상필 의원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훌륭한 진상필 의원은 아쉽게도 실재인물이 아닙니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KBS2 휴먼정치드라마 [어셈블리](Assembly) 를 최인경 보좌관(송윤아)과 함께 이끌어가고 있는 배우 정재영이 맡은 극중 국회의원이니까요. 현실에서 종종 보게 되는 몇몇 국회의원들의 작태가 워낙 더 기막힌 경우가 많아서인지 1회부터 계속 시청해 오고 있는데도 그 동안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밋밋한 스토리가 그리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12회에서 드디어 본때있는 스토리를 제대로 보여주었네요. 덕분에 마치 국회의사당에 함께 있는 기분으로 진상필 의원이 무기로 내세운 필리버스터가 마침내 성공에 이르는 것을 보고는 울컥하는 심정과 더불어 작은 감동도 느꼈습니다.
어셈블리란 정당 정치제도에서 '국회'를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회, 게르만족의 부족집회, 프랑스의 국민의회, 미국 일부 지역의 주의회, 국제연합(UN) 총회 등 주기적으로 회의를 여는 상설기구에도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낯선 용어인 필리버스터란 의회 등에서 갖가지 방법을 써서 합법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일을 말합니다. 법안의 통과/의결 등을 막기 위한 장시간의 발언, 유회(流會), 산회(散會)의 동의, 불신임안 제출, 투표의 지연 등을 꾀하는 것이 바로 필리버스터, 의사방해연설입니다. 원래는 16세기의 해적 사략선을 가리켰으며, 19세기 중반 라틴아메리카 폭동에 참가했던 미국인들처럼 변칙적인 군사모험가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이는 이 용어는 1800년대 중반부터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진상필(정재영) 의원은 도덕적으로 하자가 많은 주철순 국무총리 후보자가 국무총리가 되는 것을 막고 싶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에 빠집니다. 그런 진상필의 모습을 보고 보좌관 최인경(송윤아)은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가 헌법/국회관계법에서 무제한 토론이라는 묘책을 생각해 냅니다.
이른바 필리버스터, 즉 안건의 통과를 막기 위해 장시간 발언을 함으로써 합법적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연설을 떠올린 것입니다. 최보좌관은 곧 제1야당인 한국민주당의 원내 수석부대표 조웅규(최진호)를 찾아가 야당 국회위원 100명과 함께 임시국회 폐회시간까지 필리버스터를 하기로 약속합니다. 즉 이번 회기의 남은 25시간 동안 100여 명이 차례로 발언을 계속하면서 임명동의안 자체가 처리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속셈입니다. 하지만 최보좌관과 필리버스터를 하기로 철썩같이 약속했던 조웅규 의원은 국민당 사무총장 백도현(장현성)이 필리버스터를 무산시키고자 내민 ‘여야 영수회담’이라는 떡밥을 덥썩 물고는 당연한 일이지만 아주 간단하게 배신을 때립니다.
결국 단순무식용감으로 똘똘뭉친 용접공 출신의 진상필 의원은 그 동안 현장에서 다져온 뚝심으로 남은 25시간 동안 혼자 발언을 계속해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상정을 막기로 하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갑니다.
진의원의 단독 필리버스터가 12시간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주철순 후보는 설사 제기된 의혹이 사실무근이라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비리가 많은 점을 감안해 사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필리버스터 14시간째입니다. "주철순 후보는 스스로 물러나십시요. 이것이 지금이라도 국민들에게 박수를 받고 국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쳐가는 다른 의원들은 이제 알았으니 제발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야유하지만 그래도 계속하겠다는 그의 얼글에는 굳은 의지가 가득합니다.
필리버스터 16시간째입니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시간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진의원은 이제 헌법조항을 읽기 시작합니다.
필리버스터 18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시간을 끌기 위해 진의원은 급기야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신라 장군 이사부 백결 선생 떡방아 삼천 궁녀 의자왕 황산벌의 계백 맞서 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말목 자른 김유신 통일 문무왕 원효대사 해골물 혜초 천축국 " 하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까지 지친 목소리로 읊조리며 버팁니다. 이에 누리꾼들의 응원이 시작됐고 방송사에서는 생중계까지 시작합니다.
22시간째입니다. 진의원도 지치고 회의장에 있는 의원들도 지칠 대로 지쳐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계속됩니다.
22시간 20분이 지나고 있습니다. "주철순 후보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국은 총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면서 물러나는 것입니다." 체력이 떨어진 진의원은 다리에 쥐가 나 쓰러질 뻔하지만 그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배달수(손병호)의 아들 김규환(옥택연)을 보며 다시 의지를 불태웁니다. 그가 좋은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이유는 배달수였기 때문입니다.
22시간 40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진의원은 딸의 친구들이 보내왔다는 엽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 엽서에는 '의원님 저희 아빠는 간이 안 좋아서 얼굴이 갈수록 까매집니다. 제발 야근 좀 안 하는 법 좀 만들어주세요!'라고 씌어 있습니다. 또 '엄마가 학원비 때문에 마트 나간 뒤부터 신경질이 많이 늘었어요. 마트 손님들이 좀 친절했으면 좋겠어요'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진의원은 "뭐가 열심히 사는 겁니까. 약삭빠르고 꼼수 피우고 그게 열심히 사는 겁니까. 이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겁니다. 법 안 어기고 아등바등 사는 이 학생들의 엄마 아빠들이 열심히 사는 겁니다"라고 말해 모두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24시간 30분째입니다. 지치고 힘들고 땀에 젖은 진의원은 속기자들을 향해 "다른 말은 안 적어도 좋으니 우리 애들을 위해서라도 이 말은 적어주십시요. 주철순 후보자가 총리로 당선되더라도 국민들은 그 사람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 국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했었다고.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을 단 하루도, 1분 1초도 우리들의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25시간의 무제한토론을 마치며 진의원은 필리버스터를 성공시킵니다. 아무리 뚝심이 있고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만의 어떤 신념 없이는 해내기 어려웠을 쾌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결국 결국 주철순 후보는 총리가 되지 못합니다.
회의장에 있던 모든 국회의원들이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고 난 후 가까스로 장시간 버텨왔던 진의원은 탈진해서 쓰러집니다...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코까지 골면서 완전한 꿀잠을 잡니다. ㅎㅎ. 마음속에 거리끼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천하태평의 모습입니다. 가히 국민진상 진상필이라는 별명을 얻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진상필 의원입니다. 이렇게 국민을 위해 온몸을 던지는 국회의원을 현실에서도 볼 수 있다면 국민들도 사는 맛이 날 것 같습니다.
이상, 어셈블리 필리버스터 국민진상 진상필 의원의 의사방해연설이었습니다. 흥미있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