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 능양군과 인조반정

 

화정 능양군과 인조반정 

 

 

선조의 딸 정명공주(이연희)의 기구한 삶을 그린 드라마 화정은 이제 조선 15대 왕 광해군(차승원)의 시대를 지나 능양군(김재원), 즉 16대 왕인 인조의 시대로 접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 둘 있는데, 하나는 중종이고 또 하나가 바로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차지한 능양군 인조입니다. 

 

화정 능양군과 인조반정

 

화정 22회에서 능양군은 사람들을 선동해 광해군이 있는 궁궐 앞으로 몰려가 결연한 얼굴로 "이 자리에서 목을 내어놓을 각오로 왔다. 이대로 전하께서 독단을 거두지 않는다면 도끼로 목을 베는 지부상소를 올리겠다"고 외칩니다. 또 파병을 하지 않으면 명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올 것이라고 불안감을 조성하며 광해군을 향해 강력한 도전장을 던집니다. 

 

 

그  이전에 이미 능양군은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도성에 나타나 여기저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시작한 바 있습니다. 김재원이 인조 역을 맡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도 그가 처음 출연했을 때 금방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그만큼 상복차림에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데다 강팍해 보이는 김재원의 모습이 낯설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늘 달콤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보여 미소천사라는 애칭까지 얻은 김재원의 파격적이고 성공적인 변신이었습니다. 

 

능양군은 그때도 궁궐 앞으로 가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명나라에 파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석고대죄를 합니다. 재조지은, 조선은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군자의 길이며 공맹의 가르침인데 왜 그 길을 버리고 폭정을 이어가려 하는 거냐며 힐난합니다. 그리고 호위군들에게 끌려나가면서도 “언젠가는 밀물이 지나가고 썰물이 올 것"이라며 권좌를 향한 욕심마저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목대비(신은정)의 처소인 경운궁에도 찾아갑니다. 그리고 정명공주와 함께한 자리에서 "인두겁을 썼으면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주상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광해군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날도 더운데 지내시기가 어떠냐. 이런 날에는 영창대군이 많이 생각나시겠다"며 죽은 영창대군까지 들먹입니다.

 

그러자 정명공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능양군을 향해 "그 아이의 일은 상처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하지 말아달라. 또 경운궁을 찾는 것도 조심해 달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게 왜 안 되는 일이냐. 대군은 주상 손에 죽었다. 나도 주상한테 아우를 잃었다"며 "주상은 오래 가지 못한다. 마음을 바꿔라. 지금 잡고 있는 것은 썩은 동아줄이다"라고 잘라말합니다.

 

느물느물 능청스럽게 치고 빠지면서 다음에는 어디로 튈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모습으로 종횡무진하는 능양군이 앞으로 어떻게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좌를 두고 대립하게 될 정명공주에게는 어떤 승부수를 띄울지 기대가 됩니다. 드라마 화정에는 정명공주에 관한 가상의 스토리가 가미되어 있지만, 오늘 포스팅은 인조반정에 관한 실제 역사를 [역사저널 그날]과 청운대 김경수 교수의 [조선왕조사]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드라마를 보시는 데도 도움이 되고 또 인조반정에 대해서도 좀더 상세히 알게 되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드라마 화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인조, 반정의 칼을 들던 날

 

 

선조는 본디 광해군이 아닌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런 선조의 바람은 대신들의 반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세자 책봉이 미루어지다가 임진왜란으로 어쩔 수 없이 광해군에게 세자의 자리가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불만을 품은 김씨의 아들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는데, 광해군으로서는 이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빈 김씨에게는 이미 죽은 신성군 외에도 아들이 셋 더 있었는데, 이 중 다섯째아들인 정원군은 능양대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두었고 능창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1615년(광해군 7) 신립 장군의 조카인 신경희는 정원군의 셋째아들 능창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국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장살이란 사형방법 중 하나로 때려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사형 중에서 능지처참 다음으로 잔인한 사형방법이었다. 대북파는 신경희의 옥사 후 능창군도 이 사건과 연루시켜 유배보냈다가 죽여버렸다.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인조)

 

 

한편 능양군은 태어나면서 모습이 범상치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았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선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선조의 이 말은 곧 누설되었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는 등의 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동생 능창군이 사형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또한 광해군은 왕기가 흐른다는 정원군의 집터에 궁궐(경덕궁 지금의 경희궁)을 지었다. 졸지에 아들을 잃고 집까지 빼앗긴 정원군은 술로 시름을 달래다가 숨을 거두었다.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된 능양군은 이때부터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능양군은 대북파 반대 진영의 사람들을 만나며 거사를 준비해 나간다. 그리고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키자 능양군 일파는 이를 광해군을 비난할 수 있는 호기로 삼고 불효와 패륜적인 국왕으로 몰아세웠다. 결국 대북파와 서인의 충돌이 불가피해지자 광해군은 서인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1623년 3월 12일 중종반정에 이은 두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이 발발했다. 반정군은 북을 울리며 궁중으로 밀어닥쳤고, 미리 포섭된 훈련도감은 약속대로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았다. 김류, 이귀 등이 침입했고, 훈련대장 이흥립은 안에서 호응했다. 호위무사들은 흩어지고 피비린내나는 숙청작업이 이어졌다. 반정군은 기세를 몰아 곧장 왕의 침소로 들이닥쳤고, 놀란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후원으로 도망쳤다. 인조반정의 세력은 하룻밤 만에 조정을 장악했고, 날이 밝자 비어 있는 옥좌에는 서둘러 새로운 왕이 들어섰다. 바로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즉위한 것이다.

 

 당시 반정군들은 어떻게 궁을 장악했을까?

 

 

능양군을 중심으로 무장한 서인의 대표적인 무인은 이귀, 김류, 이괄이었다. 이귀는 평산부사였고 이괄은 함경도 병마사, 김류는 강계부사였다. 이귀와 김류는 오래 전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이로 능양군은 이들과 먼저 손을 잡고 이괄은 뒤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들의  반정모의는 누설되어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광해군과 대북파 중신들은 이러한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당시 조선은 몇 년째 큰 풍년이 들어 물자가 풍족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던 탓에 광해군과 대북파 실세들은 앞으로 닥칠 위험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사가 일어난 그 날도 광해군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이상 반정군의 입장에서는 거사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능양군 일파는 1623년 3월 13일 거사를 실행하기로 하고 전날부터 홍제원에 모여 군사들에게 세부적인 행동지침을 지시했다. 

 

 

그리고 3월 12일 밤 10시, 반정군은 약속된 장소 홍제원에 집결했다. 반정군 총대장 김류의 뒤늦은 합류로 예정된 시간보다 좀 늦은 밤 12시경에 반정군은 광해군이 있는 창덕궁을 향해 쳐들어간다.

 

 

창의문을 거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간 반정군은 별다른 충돌 없이 창덕군으로 진입했고, 곧이어 능양군과 이괄, 김류는 승전을 알리는 횃불을 올렸다. 그때서야 광해군 주변에 있던 내시와 신하들이 예사로운 사태가 아님을 알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리고 광해군도 그제서야 정신없이 곤룡포를 입은 채 편전을 나와 대궐의 담을 뛰어넘었다. 무혈입성이었다.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사체계

 

 

오합지졸에다 1300여 명밖에 안 되는 군사 규모였다. 더욱이 이 중 600명 정도는 노복이나 길거리에서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도성과 궁궐을 지키는 병력들이 수천 명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어떻게 이처럼 쉽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박금수 박사에 따르면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대체계는 여러 가지 안전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5위 체계 도성을 지키는 전군을 위흥위, 용양위, 충무위, 충좌위, 호분위 등 5개의 부대로 나누었다, 궁궐을 지키는 금군도 내금위, 우림위, 겸사복 등 세 개의 부대가 독립적으로 존재해서 한 부대가 역모에 가담하더라도 군 체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군사체계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무너져 훈련도감 하나의 부대만이 도성을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임금의 최측근을 지키는, 오늘날로 말하면 청와대의 경호실 같은 무예청이라는 병력이 있었는데, 이 무예청의 병사들 역시 훈련도감에서 차출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궁궐에 왕의 호위체계는 훈련도감 하나뿐이었다.

 

 

또한 반정세력의 이귀 등은 호랑이를 핑계로 전시가 아닌데도 지방 병력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호환이 두려웠던 탓에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잡는 군대인 착호군(捉虎軍)을 움직인 것이다. 이귀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조정에 상소를 올려 "평산에서 개성에 이르는 길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서 사람들을 해치고 민가의 피해가 극심하니 호랑이 사냥을 하는 군사들이 도의 경계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도록 윤허해 달라"고 했다. 이귀가 상소와 함께 큰 호랑이를 잡아 보내니 광해군은 크게 기뻐하며 기꺼이 그렇게 조치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스스로 군사를 내어준 셈이 된 것이다. 

 

 

한편 능양군은 재빨리 서궁으로 달려가 인목대비를 찾았다. 왕의 결정권은 이번에도 인목대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능양군이 인목대비를 모시고 궁궐로 들어와 어보(御寶)를 바치자 그녀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인목대비는 능양군과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인 후 능양군에게 어보를 넘겼다. 이에 능양군은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대비의 뜻은 변치 않았다. 결국 이를 받아들였고 능양군을 따르던 신하와 부하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을 즉시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왕비와 그의 아들, 며느리까지 유배보냈다. 이로써 능양군이 조선 제16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인조다. 인조는 즉위 후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했고, 광해군 시절 권력을 독점해 오던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세력 2백여 명을 제거했으며 반정에 가담한 서인들에게 대거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이로써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세상으로 탈바꿈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친명배금(親明拜金)을 선언했다.

 

이상, 화정 능양군과 인조반정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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