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와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
2년 전쯤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조선 16대 왕 인조(이덕화)를 움직여 소현세자(정성운)를 독살시키고 세자빈 강씨(송선미)를 음해한 조선 최고의 팜므파탈 소용 조씨(김현주) 등 왕의 여구들의 암투를 그린 드라마였는데, 이 드라마에서 인조 역할을 맡은 이덕화씨가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례(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에 찧는 것을 세 번 하는 의식)를 하다가 이마에서 피까지 흘리는 참으로 굴욕적이고 처참한 장면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나오는 부분을 봤었습니다. 그때 청나라 왕 앞에서 우리 조선 왕이 그런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도 참으로 충격적이었던데다 이덕화씨가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장면을 워낙 실감나게 연기한 덕분인지 그 장면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인조와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
최근 드라마 화정에서는 인조 역할을 김재원씨가 맡고 있는데, 이덕화씨보다 나이도 적은데다 선이 덜 굵은 탓인지 찌질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약한 인조의 모습을 더 그럴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국의 정세를 전혀 살피지 못하고 청나라를 오랑캐라고만 무시한 대가로 정묘호란 후 또다시 병자호란이라는 혹독한 전쟁을 발생케 한 인조와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에 대해 [역사저널 그날]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병자호란은 비록 한 달여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발생한 전쟁이었지만 그 피해나 충격은 임진왜란 못지않았습니다. 조선은 이때부터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양국의 군신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어좌를 지키는 데에만 급급하다가 결국에는 두 차례나 전쟁을 발생케 해서 백성들을 비참하고 혹독한 삶으로 몰아넣었던 무능한 인조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하급관리의 의복색인 남색 옷을 입고 서문을 나선 죄인은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였다. 1월 30일, 인조는 한강 동편에 있는 삼전도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홉 단으로 높이 쌓은 수항단(受降壇)과 크고 작은 황색 장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끌려나온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조선과 청이 군신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삼배구고두례를 올렸다. 그때까지 조선 왕이 삼배를 했던 대상은 종묘, 사직, 문묘 혹은 명나라 황제와 황태자였으며, 이때도 실제로 그 대상을 보고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국왕이 대상을 보고 직접 삼배를 한 것은 청태종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청태종이 이렇듯 항복의식에 집착한 이유는 그 동안의 조선과 청의 관계가 형제관계였다면 이후로는 임금과 신하, 즉 군신관계로 전환되었음을 확실하게 못박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즉 삼배구고두례는 조선과 청의 군신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의식으로, 청은 조선 왕을 확실히 무릎 꿇게 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조의 이마에서 정말로 피가 흘렀는지 궁금해하는데, 사실 정확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청태종은 삼배구고두례 후 곧바로 인조를 단상 위로 올라오게 함으로써 한 나라의 왕으로 예우해 주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치욕일 수밖에 없었다.
이 항복의식은 거의 오후 6시가 다 되어 끝났으며, 인조는 단상에 올라가 있다가 유시(5시-7시)에야 환도를 허락받았다. 그런데 삼배구고두례는 인조만 한 것이 아니라 소현세자와 신료들도 모두 함께 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환궁을 하기 위해 송파나루로 가자 준비된 배가 두 척밖에 없었는데, 강가에 이르자 백관들이 앞다투어 인조의 어의를 잡아당기면서 자신들이 먼저 배에 오르려 했다고 하니, 왕으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던 셈이다.
병자호란 후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삼전도비, 즉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운다. 삼전도비에 새겨진 내용은 조선이 청나라와의 맹약을 먼저 어겼지만 청태종이 그런 조선을 너그러운 은혜로 보살피고 항복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이때 비문을 작성하도록 명령받은 사람은 이경전, 장유, 조희일, 이경석이었으나,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빠지고 조희일은 글을 거칠게 적었다고 물리쳐졌으며, 장유는 인용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탈락하여 결국 이경석의 글이 채택된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당한 데 있었다. 본디 강화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적 방어에 유리했다. 게다가 경작이 가능해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으며, 특히 겨울에는 일부 지역의 결빙으로 유빙 때문에 외적이 접근이 어려워 금성탕지(金城湯池.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이라는 뜻)라고 일컬어지는 매우 견고한 요새였다. 하지만 청군은 조선의 예상을 무너뜨리고 1637년 1월 22일 강화도에 전격 상륙한다. 조선군은 저항했지만, 오랜 세월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었던 강화도는 한나절만 엄청난 청의 병력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강화도가 이렇듯 쉽게 함락된 이유는 청군이 강화도 공략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배를 만들 계획을 세웠던 청군은 심양에서부터 기술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조선의 장인들을 모아 한강 근처의 집을 헐어낸 목재로 조선에서 병선을 제작했다. 게다가 강화도 대안에서 맹렬하게 사격을 해온 홍이포(紅夷砲)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명나라가 네덜란드 화포를 모방해서 만든 무기인 불랑기보다 화력이 뛰어났던 홍이포의 위력에 사기를 잃은 조선군들은 도주하느라 바빴다.
사실 조선도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병자호란 1년 전부터 강화도에 수군 병력 배치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대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가 함락된 것은 청이 수군에 약할 것이다, 추운 겨울에 쳐들어올 리 없다는 안이하고 관성에 젖은 조선 조정의 잘못된 정세 판단에 기인한다.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져오던 때도 아니고 불과 10년 전에 정묘호란을 겪었는데도 청과 잘 지내보려는 외교적인 노력도 없고 군비 확충도 하지 않은 인조의 근거없는 자신감이 초래한 치욕이자 당시 조정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강화도 함락이었다.
당시 강화도에서는 전세가 워낙 불리해지자 강화도를 지키던 사람들 중 자결의 길을 택한 사람도 있었다. 대표적인 척화파였던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도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폭약을 터뜨려 자살했다.
그리고 그 외 많은 사대부가의 부녀자들도 청군에 의해 정절을 못 지킬 것을 우려하여 자결을 택했는데,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머리수건이 물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여전히 빨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월 26일, 강화도 함락 나흘 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남한산성에서는 비축된 식량도 떨어지고 외부의 지원군도 모두 격파당하고 청군의 홍이포 공격은 점점 맹렬해지자 사기가 떨어진 조선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까지 보였다. 이때 청은 반드시 인조가 출성항복을 해야만 회친이 성립될 수 있다고 요구했는데, 당시 인조가 출성을 꺼려했던 것은 자신을 청나라 심양으로 끌고 갈까봐 우려한 때문이었다. 자신이 없어도 왕통을 이을 세자가 있으니 "이 모든 죄는 내가 지고 가겠다"고 했어야 하는데 인조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계속 버텼던 것이다. 이로써 처절했던 47일간의 전쟁은 인조의 항복으로 막을 내린다.
1637년 1월 28일 청은 조선에 11가지 항복조건(정축화약)을 보낸다.
2 조선은 명의 연호를 버리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하며 수호를 끊을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가도를 공격할 때 배 50척을 보낼 것
6 성절/상삭/동지/중궁천추/태자천추/경조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를 따를 것
7 포로들이 도망쳐 오면 체포해서 돌려보낼 것
8 내외 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할 것
9 신구 성곽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10 일본과의 무역은 허락하나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에 조회하도록 할 것
11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로 바칠 것
철저히 조선을 길들이려고 했던 청태종이 강조한 것은 거의 멸망할 것을 구해준 은혜, 즉 재조지은(再造之恩)이었다. 이미 죽은 인조의 목숨을 자신이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다는 것이어다. 그러니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항복문서의 내용들대로 실현이 되면 백성들은 또 목숨을 내걸고 전쟁터에 나가야 하고, 또 허리를 졸라매고 세금을 바쳐야 하니, 청의 항복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도 이런 분위기를 느꼈던 듯 교유문을 내린다.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이 도를 잃은 나머지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교유문을 더 읽어보면 "팔도의 사민과 진신 대부들은 나의 어쩔 수 없었던 까닭을 양해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잘못을 가지고 나를 멀리 버리지 말고.."라는 식으로 변명 일색이다. 즉 이렇게 된 것은 근왕병이 오지 않아서라느니, 내가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고 명에 대한 의리만을 고수했다면 이씨 왕조가 끊어질 뻔했으니 오히려 나라를 지킨 셈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 내준 조선, 하지만 이것으로 조선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병자호란 기간 동안 청군은 조선 곳곳에서 인간사냥을 일삼았다. 전쟁에서 적에게 사로잡힌 민간인을 가리켜 피로인이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간 피로인은 적어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피로인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걸어야 했지만 불평조차 할 수 없었다. 혹독한 행군을 피해 도망치려다가 희생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청이 조선인을 끌고 간 이유는 조선인들을 상품으로 생각해 사고 팔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병자호란 후 심양에는 조선인을 사고 파는 시장이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피로인들의 몸값을 주고 데려오는 속환(俗寰)의 값이 시간이 갈수록 폭등해서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나라에서 나서서 송환 노력을 기울이는 게 당연한데도 개인의 일로 맡겨버리 점점 더 해결 불가능한 일이 되어갔던 것이다. 병자호란을 수습한 주화파 최명길의 지천집(遲川集)에 따르면, 당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50만 명이었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의 인구가 850만 명이었는데 이 중 50만 명이 끌려갔으니 그와 관련된 백성들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상, 인조와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