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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화정 역적의 대명사 김자점의 최후

 

화정 역적의 대명사 김자점의 최후

 

 

드라마 화정에서 인조(김재원)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에 등장해 비열하고 교활한 행보를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역적의 대명사 김자점(조민기)입니다. 김자점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대북파들이 득세하던 광해군 때였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성리학자, 정치인이었던 성혼(成渾)의 문인이었지만 성혼의 다른 문인들이 화려하게 벼슬길을 시작한 것과 달리 음보(蔭補, 가문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것)로 나갔기에 딱히 자신을 받쳐줄 세력이 없었던 그는 인목대비가 폐위당하자 대북파들이이 득세하는 조정에서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벼슬을 그만둡니다. 누구보다 야망이 컸던 그가 벼슬을 포기한 것은 현실에 대한 상황판단이 그만큼 남달랐음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합나다. 하지만 평범한 일개 선비로 살아가기엔 야망이 너무나도 컸던 그는 이귀와 최명길이 찾아와 인조반정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자 받아들입니다. 

 

화정 역적의 대명사 김자점의 최후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그에 따른 논공행상에서 김자점은 적극 가담한데다 군사동원에도 힘을 쏟았던 점을 인정받아 1등공신으로 책록됩니다. 이렇게 인조의 총애를 업은 김자점은 그 후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하지만 갑질과 배신을 일삼다가 결국 유배-복귀-유배를 거듭한 끝에 결국 희대의 역적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드라마 화정과 임채영 작가의 [조선의 추악한 배신자들]을 바탕으로 [화정 역적의 대명사 김자점]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시류에 몸을 맡긴 채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오로지 자신의 안위에만 집착해 거침없이 배신을 때리는 자들이 마땅히 처하게 되는 말로를 김자점 역시 그대로 걸어갔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쟁 발발의 위기가 코앞에 닥쳤음에도 서북쪽 병력을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은 궐에서 온 장계를 무시한 채 유유자적하게 낚시나 즐기고 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심산인 그는 부하들이 장계가 왔다고 거듭 고하자 "조용히들 하거라. 고기들 다 도망간다"고 되려 역정을 냅니다. 더군다나 장계가 바람에 날려 연못에 빠져버리자 깜짝 놀라는 부하들에게 "괜찮다. 어차피 봐도 아무 소용 없을 테니"라며 풍전등화인 나라를 수수방관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마 후 의주로부터 봉화가 올랐다는 부하들의 보고에도 김자점은 대낮이라 연기가 뒤섞여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느니, 장계는 하루 더 상황을 지켜보고 확실해지면 보내겠다느니 하며 도무지 무슨 꿍꿍잇속인지 알 수 없는 궤변만 늘어놓습니다. 

 

 

결과적으로 김자점이 신속히 움직였으면 청과의 전쟁에서 이기진 못했더라도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할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결국 파죽지세로 들이닥친 청군에 무릎을 꿇은 인조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다른 나라의 왕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병자호란과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병자호란과 김자점

 

 

인조반정 성공 후 광해군을 옹위하던 대북파들이 없어지자 조정에 김자점의 출세를 방해할 세력은 더 이상 없었다. 더욱이 인조는 김자점의 충성심과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터여서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은 김자점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후 후금의 심기를 건드린 조선은 전쟁에 휩쓸리고, 병자호란 때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조정으로부터 황해도까지 진출한 청군을 임진강 이북에서 궤멸시킬 것을 촉구받지만 그 명령을 어기고 철군을 지시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조정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가 김자점이 황해도에서 방어진을 펴지 않은 점, 그나마 방어진을 펼쳤던 황해도 토산전투에서 크게 패한 책임을 물어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부 간관(諫官)들은 김자점을 처형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디딤돌이 되어준 김자점을 그렇게 내칠 수가 없어 벌을 내리되 외딴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짓는다.

 

 김자점의 위기와 또 다른 기회  

 

 

외딴섬에서의 유배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김자점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인조가 왕위에 있는 이상 언젠가는 자신을 다시 불러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헛되지 않아서 1640년(인조 18년) 1월 그가 목을 길게 늘이고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인조가 그를 강화유수로 임명한 것이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직위였지만 그로서는 한양을 향해 절을 올릴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강화유수로 부임해 미처 짐도 풀지 못한 그해 2월 인조는 다시 그를 호위대장으로 기용했다. 그 동안 그가 그토록 갈망해 왔던 한양으로의 복귀였다.

 

도원수까지 지낸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며 한양으로 복위한 김자점에게는 간관들의 비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서는 참고 넘어가갸 할 비난이었다. 그는 이를 갈면서도 간관들의 비난에 일절 대응하지 않앗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처신방책이 생겼다. 왕실과 인연을 맺어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것과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인조는 1646년 김자점을 영의정에 올렸고, 일언지하 만인지상 자리에 오른 그는 그때부터 서서히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왕실과의 혼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자인 세룡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와 결혼시키는 데 성공했다. 낙흥부원군에 봉해진데다 영의정에 오른 그는 조정을 한손 안에 거머쥐었다. 같은 서인 일파인 공서파(攻西派)가 양분되자 반대파인 원당(元黨)의 영수 원두표를 가혹하게 탄압한 것도 그가 그와 같은 권력을 쥐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자점의 음모

 

 

김자점이 영의에 봉해진 그 무렵 인조는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인조가 반청 입장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해 소현세자는 청에서 익힌 신과학기술과 문명 등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절대 왕위를 물려주어서는 안 될 인물로 점찍혔고, 결국 소현세자는 비운의 생을 마쳤다.

 

그런데 인조는 소현세자를 제거한 후에도 청에 대한 불신을 버리지 않았고, 그 불신은 며느리 강빈에게까지 이르렀다. 김자점은 인조가 소현세자 일족의 씨를 말릴 작정을 하고 있지만 차마 세간의 눈이 두려워 어쩌지 못하고 있는 속마음을 알아채고 심복을 시켜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풀게 했다. 그리고 그 죄를 며느리 강빈에게 덮어씌워 사사되게 만들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까지 제주도로 유배보내 버렸다. 또한 김자점은 임경업에 대한 옛날의 원한도 잊지 않았다. 줄곧 반청적인 입장을 취하던 임경업, 줄곧 자신과 대비되는 인물로 세상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임경업에 대한 옥사를 일으켜 처형시킨 것이다. 

 

 김자점의 몰락 

 

 

그러나 인조가 살아 있었을 때까지가 김자점의 전성기였다. 인조는 재위기간 20년을 넘긴 1649년 세상을 떠났고, 그 왕위를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물려받았는데, 그가 바로 효종이다. 형인 소현세자와는 달리 반청이 골수에 뿌리박힌 효종은 왕위에 오른 즉시 북벌을 계획했다. 그리고 조정은 명망 있는 서인 중심의 학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편 자신의 지위에 갈수록 불안을 느끼던 김자점에게 김경록, 송준길 등 사림(士林)에 묻혀 있다가 등용된 서인들이 집중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반청적인 입장이 강했던 효종도 김자점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간관들의 집중탄핵을 받은 김자점은 파직을 당하게 된다.

 

파직을 당한 김자점은 어쩔 수 없이 놓아버린 권력이 너무나도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효종의 등장과 함께 조정 내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진 상태였다. 믿을 데라고는 청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어리석게도 자신에게 충성하던 역관(통역사) 이형장과 정명수 등을 시켜 청에 은말하게 문건을 건넨다. 그 문건에는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자신을 탄핵하는 데 사살상의 배후라고 할 수 있는 송시열이 장릉(長陵)이라는 지문(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을 누설한 것이다. 김자점의 문건을 받은 청에서는 즉각 사신을 파견해서 사실 유무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효종은 "조정에서 쫓겨난 자의 한풀이에 불과한 것이니 크게 개념치 말 것과 변치 않는 청에 대한 우호"를 약속한 후 청의 사신을 볼려보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청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이 순순히 물러가자 김자점은 크게 당황했다.

 

 

청의 사신들이 물러가자마자 대간들의 탄핵이 빗발쳤다. 효종은 대간들의 청을 받아 김자점을 광양으로 유배시켰다. 두번째 유배에서 김자점의 족적은 확실하지 않다. 그가 다시 조정 대간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한참의 세월이 지난 1651년이었다. 광양의 진사 신호가 장문의 상소를 올려 김자점의 반역행위를 고발한 것이다. 김자점이 청에 의존하는 정도를 지나 직접 거병을 꾀하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사실 그 고발 내용은 김자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가문의 몰락에 울분을 느낀 김자점의 아들 김익의 역모에 관한 것이었다. 신호의 고발을 접한 조정에서는 긴급히 김자점을 한양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효종이 직접 심문한 끝에 원두표 등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역모죄로 결론을 내리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효종 2년 1651년의 일이었다.

 

이상, 화정, 역적의 대명사 김자점의 최후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