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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화정 이괄의 난과 인조의 기찰정치

 

화정 이괄의 난과 인조의 기찰정치  

 

 

조선의 16대 왕 인조는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선조만큼이나 찌질한 소인배였습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명나라가 망한 후 돌아온 장자 소현세자가 청과 조선의 통로 역할을 하면서 양국을 조정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 청의 신뢰를 받자 그것을 시기해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며느리인 세자빈에게도 사약을 내려 죽입니다. 그리고 손자인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 풍토병으로 죽도록 방치해 버립니다. 조선 왕들 중에 형제를 죽인 태종(3대)이나 아들을 죽인 영조(21대)가 있긴 했지만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죽인 왕은 인조뿐입니다. 덕분에 이 찌질하고 멍청한 인조가 왕으로 있었던 27년 동안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백성들만 죽을 고생을 합니다.

 

게다가 인조가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안 돼 발발했던 이괄의 난 역시 반정공신 이괄(李适)을 홀대하고 뒤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기찰정치를 펼친 탓에 앙심을 품게 만든 것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역사저널 그날 [이괄, 반란의 칼을 들다]와 재미사학자 백지원의 [왕을 참하라]를 바탕으로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어이없을 만큼 쉽사리 한양을 점령하고 찌질한 인조는 도망가느라 바빴던 이괄의 난과 이괄이 반란의 칼을 들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던 인조의 기찰정치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인조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화정 이괄의 난과 인조의 기찰정치

 

드라마 화정에서 인조(김재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정명공주(이연희)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하려다가 포도대장 이괄(유하복)과 조여정(김민서)이 밀서를 주고받았던 사실이 밝혀져 궁지에 몰린다. 그러자 김자점(조민기)은 이괄을 찾아가 모든 계획이 이괄의 과잉충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달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괄은 “나더러 덮어쓰란 것입니까. 포청의 기찰을 독단적으로 했다구요? 사냥이 끝났다고 개를 버리겠다는 것입니까?”라며 분노한다.  

 

 

이괄의 분노에 김자점이 답답하다는 듯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느냐고 말하자 이괄은 “네 이놈 김자점! 이러려고 내게 모든 걸 맡긴다 했던 것이냐? 일이 틀어지면 날 내세울 작정으로 날 이용한 게 아니냔 말이야!”라며 더욱 분을 참지 못한다. 

 

 

김자점이 떠나고 나자 이괄은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나를, 이 이괄을 네놈들이 이리 짓밞을 수 있을 것 같으냐"라고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쥔 두 손을 덜덜 떤다.


 인조의 기찰정치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세력은 기찰정치를 강화했다. 기찰이란 특정한 인물과 집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행위를 말한다. 반정의 명분도 약했던데다 국정을 이끌 준비가 안 돼 있던 인조와 반정세력은 기찰을 통해 남은 북인세력은 물론 남인세력까지 탄압하고 숙청반했다. 이괄은 이 기찰정치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이괄은 자존심도 강하고 문재도 있던 무과 출신의 뛰어난 장군이었다. 이런 이괄을 신임한 인조는 그를 좌포도대장으로 임명해 기찰의 총책임을 맡게 했던 것이다.

 

 

이괄이 맡은 임무는 기찰 대상자를 감시하고 연행하여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고 처형하는 일이었다. 이 기찰을 통해 이괄은 인조에게는 큰 신임을 받았지만 사대부들에게는 원성을 듣고 반정세력에게는 견제를 받게 됐다. 인조실록에는 "좌포도대장 이괄이 기찰한다는 명목으로 전 부사 박진장의 집에 난입해 끌고 나오게 했는데, 노모를 때리고 모욕을 가하는가 하면 집을 부수고 재물을 탈취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이괄의 세력이 점점 강해져 가자 반정세력은 인조를 부추겨 이괄을 변방인 평안도로 보내버렸다. 사실 반정이 일어났을 때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였으나 그 지휘는 경력이 풍부했던 이괄이 맡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이괄은 반정에서 핵심역할을 했다. 그런데 반정 후 논공행상에서 김류는 일등공신이 되고 이괄은 이등공신이 되자  내심 병조참판을 기대하고 있던 이괄은 불만이 컸다. 한편 이귀는 이조참판에 올랐고 김류는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러나 이괄은 인조를 믿고 변방으로 갔다. 

 

이괄이 변방 지휘관으로 내려간 후 반정세력들은 이괄에 대한 기찰을 시작했다. 기찰의 책임자였던 이괄이 이젠 기찰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분노한 이괄은 결국 평안도의 병력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이괄의 난이다. 당시 친명배금정책을 펼치고 있던 서인세력은 평안도 가도에 주둔한 채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던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에게 병력과 군량을 가득 실어보내면서도 후금과는 사신 왕래도 끊어버린 상황이었다. 이괄은 이렇듯 조선에 대한 후금의 의구심이 깊어갈 때인 1624년, 인조가 16대 왕으로 즉위한 지 1년도 채 안 됐을 때 반란의 칼을 들었던 것이다.  

 

 이괄의 난- 이괄, 반란의 칼을 들다  

 

 

이괄은 한명련, 기자헌 등과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밀고를 당했다. 그런데 이 역모 고변에 이괄이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괄의 아들 이전(李栴)이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이괄은 추국 결과가 끝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전을 잡아올리라는 인조의 명이 떨어지자 분노가 폭발하고 만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밖에 없는데 그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라며 분노한 이괄이 아들 이전을 잡으러 온 의금부도사를 한칼에 베어죽였다. 결국 이 사건은 중앙에 있던 서인세력들이 변방에서 막강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이괄을 제거하려고 꾸민 역모였던 것이다.

 

 

평안도 토병(土兵)과 전라도에서 올라온 국경수비대 부방군(赴防軍) 만 2000명, 그리고 일대의 항왜(降倭) 병력을 이끈 이괄의 반란군은 영변에서 한양까지 약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이괄이 장만의 정부군을 격파하고 한양으로 질풍처럼 육박해 오자 이괄의 기세에 놀란 인조는 급히 공주로 도망쳤다. 무능하고 찌질하기 짝이 없는 인조는 얼마나 급했는지 가도에 주둔해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부산의 왜관에 머물러 있던 왜인들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웠었다. 이괄의 난은 조선 역사상 반란에 의해 왕이 도성을 떠난 유일한 사건이었으며, 이 덕분에 이괄은 한양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인조는 조선 왕들 중 누구도 따르지 못할 기록을 세우게 된다. 즉 수도 한양을 세 번이나 버리고 도망간 왕이라는 기록이다. 1624년 이괄의 난 때는 공주로,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3관왕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한편 이괄은 한양에 입성하여 선조의 서자이자 인조의 숙부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옹립한다. 조선 하늘 아래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조정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곧 전열을 정비한 정부군을 이끈 도원수 장만, 정충신 등의 활약과 이괄 진영의 내분으로 이괄의 난은 가까스로 진압된다. 사흘만에 끝난 이괄의 3일 천하였다. 

 

이상, 화정 이괄의 난과 인조의 기찰정치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