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와 병자호란..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드라마 화정에서 인조반정으로 어좌를 차지한 능양군(김재원)은 붙들려온 광해군(차승원)에게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던 내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며 으스댑니다.
인조와 병자호란..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하지만 광해군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너는 이것을 승리라고 하는구나. 그래, 나는 너한테 패했다. 나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너같이 무도한 자에게 어좌를 내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러자 능양군은 "입을 다물라! 네가 아직 임금인 줄 아느냐! 이 나라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나란 말이다!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던 바로 이 능양이 너를 이긴 거라구!"라고 소리칩니다. 그 동안 품어왔던 광해군에 대한 적개심도 컸던데다 별볼일없는 인간 취급 당했던 데 대한 분노가 함께 터져나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슬픔 어린 표정으로 "너는 결코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너는 언젠가 이 땅에 가장 뼈아픈 패배를 가져올 것이며, 이 나라를 가장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날 너는 또한 네놈들은 오늘 이 순간보다 더한 고통과 모멸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다만 오직 이 하나만을 기억해라. 오늘 내가 네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어좌를 내어줄 것이지만, 너는 결코 같은 일을 겪는 군주가 되지 마라. 오늘의 나를 기억하고 장차 네가 누구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도록,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그리 될 수 있도록 깨어 있어라"고 말하고 능양군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후금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는 것을 알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왔던 광해군은 인조와 서인들이 택한 친명배금 정책으로 장차 조선에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오랑캐라며 후금을 업신여겼던 인조와 조선 조정의 경거망동은 후금의 심기를 건드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삶까지 말할 수 없이 힘겹게 만듭니다. 이로써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하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임금이 됩니다. 삼배구고두례란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아홉 번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묘호란 후 10년이 채 안 돼 발발한 병자호란과 무려 47일간 남한산성에 고립돼 있다가 청태종 앞에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려야 했던 인조의 무능함이 나라와 백성을 어떤 지경에 이르게 했는지 EBS [역사저널 그날]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인조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 병자호란, 인조 남한산성에 고립되다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하는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군이 두번째로 조선을 정벌하면서 시작되었다.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조선은 중강과 회령의 무역을 통해 많은 물자를 공급해 주었다. 하지만 후금은 지속적으로 식량과 병선을 요구하는 등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또 모문룡 일당의 준동을 막는다는 이유로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을 자행해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후금이 행패에 분개한 조선에서는 화의를 꺾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당시 후금은 만주를 석권하고 만리장성 너머 북경에까지 공격하는 등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었다.
■ 1636년 12월 병자호란 발발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군대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다. 무려 12만 8천여 대군이었다. 조선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온 그들은 불과 닷새 만에 도성을 점령했다.
인조는 가까스로 수구문을 통해 한양을 탈출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만 순식간에 쫓아온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돼 버렸다. 한 나라의 왕이 험준한 산성에 고립된 것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날은 음력 12월 15일로 양력 1월 중순경, 가장 추운 때였다.
여기엔 도원수 김자점의 결정적 실책이 있었다. 평안도 지역의 방어를 위해 나가 있던 김자점은 적이 나타난 것을 알리는 비상봉화가 올랐지만 사흘 후에야 보고를 했고, 이때는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무인지경의 평안도 지역을 통과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초기 대응에 굉장히 미흡했던 셈이다. 도원수라면 당대 지휘관 중 최고 직책의 장수인데 그런 어이없는 대처를 한 것은 엄청난 오판을 한 탓이었다. 12월이라면 한겨울이니, 이 추운 겨울에 군대를 이동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10년 전 청은 1627년 1월에 쳐들어와 정묘호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한 지휘관의 근거없는 안이한 판단이 한 나라를 전쟁 속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후금이 병자호란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1636년 2월 16일, 중국 대륙의 패권을 노리며 힘을 키워가던 후금은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를 조문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그들의 또 다른 목적은 홍타이지의 황제 추대를 알리고 조선의 동의를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명나라와의 대의를 내세우며 그들이 가져온 국서를 받지 않았다.
게다가 빈전(왕 또는 왕비의 관을 두는 전각)와 좁다는 이유로 금천교 위에 친 장막에서 재를 행하게 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바람이 불어 날아가버렸고, 마침 장막 뒤에는 조선 군사들이 있었다. 이는 조선 조정에서 잠복시킨 것으로 오해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임시빈소 뒤에 군사를 배치한 것은 궁 안인데다 청나라 사신단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탓에 경호 차원에서 행한 일이었는데, 푸대접을 받은 후금의 조문사절단은 혹시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화를 내며 궁을 박차고 나가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아이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졌다. 당시 후금은 무시할 나라가 아니었는데 조선은 푸대접을 한 것이다.
청나라는 시조 누르하치가 17세기 초에 설립한 군사/행정조직인 팔기군(八旗軍)을 만들어 확장시키고 있었다. 강력한 유목민족인 몽골, 중원을 장악했던 한족까지도 자신들의 팔기군과 똑같은 조직으로 묶고 있었다.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해나가고 있던 청의 실체를 조선 조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족에게 칭기스칸의 후예이자 중국대륙의 지배자를 상징하는 옥새를 받은 홍타이지를 몰라본 것이다.
아무튼 청의 침입에 기겁을 한 인조는 보통 왕이 드나드는 큰 문도 아닌 수구문, 즉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을 통해 도망쳤다. 수구문이란 물이 나가는 문이지만 보통은 시체들이 나가는 시구문(屍口門)이었다. 이괄의 난 때도 평안병사이자 부원수인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 실패하자 이괄은 이 광희문을 통해 탈출한 바 있었다.
이 문을 통해 왕이 탈출한 것은 상당한 치욕이었다. 원래 목적지는 전쟁 준비가 되어 있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던 거였지만 청군이 너무 빨리 쳐들어오는 바람에 갈 길이 막혀 차선책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었다. 곧 강화도로 가려고 했지만, 인조실록에 따르면 "산길이 얼어 왕이 말에서 내려 걸었으나 끝내 강화도로 갈 수 없음을 깨닫고 산성으로 되돌아왔다. 임금이 발에 동상이 걸려 걸을 수가 없어서 털방석으로 받들고 남문에 도착하니 비로소 가마가 왔다”고 한다. 게다가 청군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을 봉쇄해 놓은 상태였다.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이유는 도망쳐 온 한인을 명에 넘긴 것, 정묘년에 맹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누차 그것을 어긴 것,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에게 유시문을 보내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한 것 등이었다.
여기에다 홍타이지 즉위식에서도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즉위식에 간 조선 사신은 나덕헌과 이확이었다. 그런데 홍타이지 황제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외국 사절들이 단 아래에서 엎드려 절을 해야 할 때 이 두 사람은 고개를 들고 꼿꼿이 서 있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다른 나라 대통령 취임식에 간 외국 사절이 대놓고 딴 짓을 한 셈이다.
이에 분노한 홍타이지는 죽지 않을 만큼만 때려서 돌려보내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식으로 자꾸 외교적인 결례를 하면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국서를 두 사람 편에 들려 보낸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돌아오면서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몰래 버린다.
한편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더욱 관심을 쏟았던 일은 바로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일이었다. 추숭이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을 말하는데, 인조는 즉위 직후부터 이 일을 밀어붙였다.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던 만큼 강한 왕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의 아들이라는 정통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원군 추숭 논란으로 조정 신하들은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1635년 마침내 인조는 10여 년의 논쟁 끝에 명나라의 승인을 얻고 원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신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의 일이었다.
10여 년에 걸친 추숭 논쟁으로 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던 해에는 백성들은 굶어죽어서 시신이 널려 있을 정도였고 인조 6년에는 돌림병이 돌아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갔으며 인조 7년에는 용골대가 쳐들어와 약탈을 해가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이 심했고 심지어 공신들이 백성의 재산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인조 9년에는 지진이 일어났는데도 추숭 논쟁을 하고 있었다. 인재에 천재까지 겹쳐 백성들이 그야말로 어육이 되고 있는데도 인조는 정말 민생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던 왕이었을까? 인조실록에는 "인조도 요순의 마음은 갖고 있는데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으나 돌보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나 정책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인조는 12월 17일 하루 동안 네 번을 통곡한 적이 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인조가 보여주는 행동은 달랐다. 정묘호란 후 늘어난 명/금의 조공 또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특히 당시 기울어가던 명나라는 조선에 와서 한재산 챙겨가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그로 인해 파산한 한 상인이 명나라 사신이 가는 길을 막고 길가에서 답답한 심정을 호소한 일이 있는데, 인조는 그 백성을 가엾이 여기기보다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결례라며 주동한 자를 옥에 가두고 평시성의 관원을 잡아다 추고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자 참다못한 가평군수 유백증은 인조에게 직설적인 상소를 올린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국가의 흥망은 전적으로 군덕의 잘잘못에 있다. 인심이 흉흉하고, 뇌물 꾸러니가 조정에 횡행하고 있다. 국가의 위험이 마치 끊어지려는 실끈과 같은데, 광해가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다"는 내용으로, 왕을 바꾼 것이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는 토로였다. 아직 광해군이 살아 있을 때였다.
■ 남한산성 47일의 기록
남한산성 고립 2일째, 왕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라는 청의 요구에 조선은 가짜 아우와 가짜 대신을 보낸다. 인조의 종친인 능봉수를 능봉군으로 품계를 올려 가짜 아우를 만들고 형조판서 심집을 정승급 대신으로 해서 보낸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심집은 청나라 진영에 가서 자신은 진짜 대신이 아니며 능봉군도 가짜 아우라고 밝힌다. 이에 분노한 청은 조건을 강화시켜 이제 왕의 아우나 대신이 아니라 세자를 보내라고 요구한다.
인조는 나름대로 남한산성을 지키려는 의사를 보였고, 두어 번의 소규모전에서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 삼남지방의 근왕병(임금이나 왕실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이 모여서 청군이 남한산성의 공략에 매진하고 있을 때 후방을 교란시킨다면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김자점 같은 경우 청나라의 매복기습을 받아 5천여 병력을 잃고 도주하고 만다.
12월 28일 남한산성 고립 14일일째, 점괘를 본 결과 29일은 화친을 해도 좋고 공격을 해도 좋은 길일이라는 말에 조선은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한강변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북문에서 청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을 본 김류는 강제로 병사들을 내려보낸다. 하지만 이 포로들은 조선군을 유인하기 위해 청군이 쳐놓은 덫이었다. 결국 이날 중견 지휘관이 8명, 군사 300여 명이 전멸당하고 만다.
임시로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신했던 터였기에 항전이 길어지자 모든 것이 부족했다. 성안의 사람과 짐승은 모두 굶주려 말과 소들이 서로의 꼬리를 뜯어먹었다는 소문이 있돌 정도였다. 군사들은 방한복 대신 빈 가마니를 쓰고 버티다가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얼어죽었다. 인조조차 침구가 없어 옷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드는 처참한 나날들이었다. 차츰 조정에서는 강화를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한산성 고립 16일째인 12월 30일, 행궁 근처에 까치가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청군이 물러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보지만, 이와는 반대로 더 치명적인 일이 일어난다. 다음날인 1월 1일 청의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출병을 해서 남한산성에 도착한 것이다. 청나라 군이 30만명이라는 소문이었다.
남한산성 고립 19일째에는 근왕병의 패전 소식이 들려온 터였다. 경기도 이천지역에서 벌어진 쌍령전투였다. 여기에 투입된 조선군은 4만명이고, 이에 맞서는 청군은 3백 기였다. 이 정도면 조선이 승리할 수 있음에도 조선군은 대패를 한다. 전력이 우세함에도 대패한 이유는 기마병과의 전투가 처음이었던 터라 당황한 나머지 조직력이 무너진 것이 원인이었다. 도망가다가 압사당하기도 하고 화승을 화약상자에 떨어뜨려 폭발하기도 하는 등 자중지란이었다. 모든 장수들이 항상 진군한다고 하면서도 머뭇거리고 도원수 김자점도 쌍령전투 대패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미원에 있으면서도 들어와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충청도 병력, 경기도 병력, 경상도 병력 등 출정을 하지만 모두 청군에 패해 남한산성은 더욱 고립되고 만다.
1월 1일 고립 24일째, 식량 담당관 나만갑이 인조를 찾아와 들어올 때 군량이 6천 석이었으나 이제 남은 식량이 2천 800석이라고 보고한다. 그 동안 3200석을 소비했으니 하루 13석씩 소비가 된 셈이니 앞으로 20일 정도밖에 버틸 수 없는 군량미였다. 하지만 인조는 지구전을 준비하면서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지구전을 계속 펼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오라고 한다. 한편 청군은 조선 백성들의 민가를 마음대로 약탈해서 식량을 조달하고 있었다.
남한산성 고립 33일째에 마침내 홍타이지는 조선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살고 싶으면 인조가 직접 나와서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청나라에 국서를 보내지만 청은 조선 국왕을 신(臣) 이종으로,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청태종의 연호인 숭덕(崇德)으로 바꾸라고 종용하는 등 트집만 잡았다.
항복 국서에 신하의 나라로서 예를 다 갖추었음에도 청은 끝까지 인조에게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을 요구한다. 조선 왕이 진실된 복종의 태도로 항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청태종 홍타이지 즉위식 때 조선의 신하에게 받지 못한 절을 기어이 조선의 왕에게 받겠다는 심산이었다. 후금을 오랑캐라며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이상, 인조와 병자호란..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