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마섬 죽음의 섬 군함도는 왜 관광지가 되었나?
일본의 무인도였지만 지금은 연일 수많은 일본인 방문객들로 붐비는 관광지가 돼버린 섬이 있습니다. 바로 지옥섬, 유령섬으로 불렸던 군함도입니다. 이 죽음의 섬 군함도에는 한일강제병합 때 일본에 저항하다가 남모르게 죽어간 많은 독립운동가들처럼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져간 조선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원치 않게 일본으로 강제징용되어 갔던 민초들이었습니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 7월 5일, 조선인들이 징용되었던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여전히 아물지 않은 강제징용의 상처와 고통이 남아 있는 군함도가 어쩌다 세계가 주목하는 일본의 보물이 된 것인지, 화려한 관광지에 가려진 군함도의 두 얼굴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지 [리얼스토리눈]에서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방영한 하시마섬 죽음의 섬 군함도는 왜 관광지가 되었나?를 바탕으로 알아보았습니다. 하시마섬에 숨겨진 끔찍한 비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하시마섬 죽음의 섬 군함도는 왜 관광지가 되었나?
강제로 끌려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면서 바다밑 1천 미터 갱도에서의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을 견뎌야 했던 하루하루는 끝없는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군함도로 강제징용을 갔던 사람들 중 현재 생존자는 98세의 김한수 할아버지와 95세의 김형석 할아버지 단 두 분뿐입니다. 23세에 가족들과 작별인사도 못하고 강제징용되어 갔다가 돌아온 김형석 할아버지는 몸이 점점 약해지더니 5년 전부터는 시력까지 완전히 잃어서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당시 석탄을 채취하러 들어간 지하갱도가 너무 더워서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팔에 묶은 수건으로 닦곤 했는데, 그때 눈으로 들어간 땀과 석탄가루 때문에 눈을 못 보게 된 거라고 합니다.
나가사키대학교 다카자네 야스노리 명예교수에 따르면, "그 섬에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옥섬 감옥섬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약 30년간 사람이 살지 않았던 일본 나가사키 현의 군함도는 배를 타고 30분 정도 들어가는 곳에 있습니다. 지난 7월 5일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자 일본은 축제 분위기였으며, 그 후 이 군함도를 찾는 방문객들이 배가 만석이어서 예약 취소를 기다려야 할 만큼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군함도 관련 상품들도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형태만 남아 있는 건물들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이 군함도를 찾은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일본인들이며, 특히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에게 그야말로 인기있는 관광지가 된 것입니다. 군함도를 오가는 배편만 무려 하루 10편입니다. 군함도 가이드는 "여러분 눈앞에 있는 이 건물이 이곳의 최대 볼거리"라고 말합니다. 1916년 다이쇼 5년, 일본 최초의 고층아파트로 지어진 이 건물은 99년 된 건물로 내년이면 100년이 됩니다. 또한 이런 건물은 전 세계에서 이곳이 유일하다고 덧붙입니다. 군함도의 건물들은 일본 내부에서는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1890년 미쓰비시사에서 채굴을 시작하여 해저 1000미터까지 석탄을 캐냈던 일본 군함도는 한창 활성화되던 시기에는 연간 무려 41만톤의 석탄이 채굴되었습니다. 1960녀대에는 인구밀도가 도쿄의 9배나 됐으며 근대적 건물이 넘쳐나 당시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첨단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출입을 제한하는 표지가 보입니다. 경고 표지판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 것일까요?
실제로 군함도 코스는 섬의 극히 일부만 보여주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 섬의 반대편에 관한 이야기는 어떠한 말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군함도 가이드는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물어보지 않는 한 일부러 대답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관광코스 이외의 지역은 어떤 모습일까요? 일본의 향토사학자 시바다 토시아키는 "저기 보이는 9층 건물에 조선인이 수용돼 있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입니다.
위에는 일본인들이 살았고 1층에서 지하에는 한국인들이 살았는데, 징용인들은 지상이 아닌 지하의 열악한 환경을 견뎌야 했습니다.
김형석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당신이 지금 머물고 계시는 이 거실보다 조금 더 큰 곳에서 30명이 다 같이 잤는데, 밤이면 빈대가 얼마나 많은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섭씨 40도가 넘는 곳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보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고구마 썰어서 말린 것, 콩기름 짜낸 찌꺼기 등을 밥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마 넝쿨을 썰어서 바닷물에 삶으면 국이 되는데, 처음에는 아무도 그걸 먹지 않고 다 갖다버렸지만 20일 정도 지나자 버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은 지하에서 살았습니다. 파도가 심한 날이면 방안까지 파도가 들어오기 일쑤였습니다. 일본의 한 박물관에는 당시의 갱도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는데, 군함도에서 가져온 석탄과 톱니바퀴도 전시돼 있습니다. 일이 시작되면 허리 한 번 펴보지 못하는 강제노역이 아침반, 저녁반 2교대로 열두 시간씩 계속됐는데, 이렇게 채굴된 석탄은 일본이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데 밑거름이 됐습니다.
다카자네 야스노리 교수는 갱도가 좁아서 "배를 땅에 대고 기어가지 않으면 굴을 팔 수가 없었다"며 일본이 이런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일본의 발전된 근대문화와 조선의 강제징용의 아픔이 뒤섞인 군함도 한쪽 구석엔 번영과 야욕이 버무러진 생명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조선인 광부들이 목숨을 건 작업을 마친 한 후 돌아와서 바라본 계단입니다.
일본의 관광지이자 보물이 된 군함도에서 지난날 일본인들은 "오늘은 너무 힘들어서 일을 못하겠다"고 말하는 광부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며 발로 차고 때렸고, 일하러 가겠다고 말할 때까지 매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희생된 조선인 광부가 모두 120여 명이었습니다.
강제징용을 인정한 일본은 유네스코 일본대사 사토구니를 통해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노역을 했다"고 발언했습니다.
그런데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로 그날 일본 외무상 기시다 후미오는 또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발언한 것입니다.
'forced to work'라는 의미를 일본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한국인은 "강제로 노역하였다"는 것으로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요? 결국 등재 전에 반드시 등재를 시키기 위한 일본의 하나의 작전이었던 셈입니다. 강제노동이 아니었다면 군함도에서 일한 조선인 노동자는 정당한 임금을 받았던 걸까요? 하지만 김형석 할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1년 8개월 동안 일했는데 돈이란 건 한푼도 못 받고 겨우 차비만 줘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심지어 폭행과 학대 등으로 숨진 한국인도 2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인이 강제노동을 했던 일본의 다른 산업시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시절만 떠올리면 산 지옥이 따로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김한수 할아버지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조선인들이 찍혀 있는 사진을 내보입니다. 제일 힘들고 더럽고 고통스러운 일을 한국인 아니면 중국인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과 없이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왜 지난날의 과오를 숨기려고 하는 걸까요? 사회학과 정진성 교수는 일본인들이 패전국의 멍에를 지고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자국의 역사를 미화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강제징용이니 위안부 동원 등을 역사에서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하시마섬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60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과거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광복 70주년, 여전히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수많은 독립군들과 강제징용자들, 한국과 일본 모두 그들이 흘린 피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을 보듬어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상, 하시마섬 죽음의 섬 군함도는 왜 관광지가 되었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