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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전시회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프리다 칼로 전시회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프리다 칼로, 절망에서 피어난 천재화가 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데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당대 멕시코 작가 10인의 작품도 전시돼 있었습니다. 총 5관 중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사진이 전시된 4관을  빼고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소마미술관 외부에서 찍은 사진과 MBC 문화사색과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를 바탕으로 칼로의 일생을 정리하는 것으로 포스팅했습니다칼로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프리다 칼로 전시회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소마는 Seoul Olympic Museum of Art에서 첫 글자를 따온 이름입니다. 88올림픽 개최를 기념해서 만든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미술관 이름답습니다.   

 

 

소마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있던 조각상과 벽화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는 벽화 속 사람들이 부러울 만큼 여유롭게 느껴집니다.

 

 

프리다 칼로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그늘에 가려 살아 생전 조명을 받지 못한 비운의 화가입니다. 1939년 초현실주의의 거장 앙드레 브르통이 “그녀의 예술은 폭탄을 둘러싼 리본이다”라고 찬양하고, 칸딘스키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피카소도 반해 선물공세를 펼쳤던 칼로는 루브르박물관에 최초로 입성한 남미의 여성화가이기도 합니다. 숱한 역경을 딛고 예술로 당당히 일어선 프리다 칼로, 그녀의 그림들이 특별한 울림을 주는 것은 불행과 절망 속에서 피워낸 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32번의 수술을 거치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았던 칼로, 세 번의 유산과 남편의 외도로 정신적인 고통까지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에게 유일한 비상구는 그림이었습니다. 숱한 역경을 딛고 예술로 당당히 일어선 칼로의 그림이 특별한 울림을 주는 것은  피를 토하듯 고통을 끄집어내 그린 그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20세기 멕시코의 대표화가로 일컬어지는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시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6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칼로는 18살에 끔찍한 대형사고를 당합니다. 하교길에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전신이 찢기고 망가지는 큰 부상을 입고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것입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전신에 석고붕대를 한 채 침대 위에 누워 지낸 9개월 침대에 붙들린 딸을 위해 어머니가 가져다준 미술도구가 칼로의 인생을 바꾸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 리베라”라고 말했을 만큼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은 그칼로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칼로가 남긴 회화작품은 모두 143점이며 그 중 자화상이 55점인데, 그 중 남편의 초상화는 딱 한 점 그린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만큼 남편에 대한 애증이 깊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칼로가 입었던 멕시코의 전통의상입니다. 칼로는 평상시에도 멕시코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전통의상을 즐겨입었다고 합니다. 

 

 

칼로가 살아 생전 착용했던 장신구들을 모아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1920년대 이후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화가입니다. 그림 스승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찾아갔던 칼로는 결국 스물 한 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1929년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합니다. 칼로의 부모님은 육중한 코끼리와 가냘픈 비둘기와의 결합이라며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전성기를 맞은 디에고 리베라 옆에서 칼로는 깊은 외로움과 고통을 나날을 보내야 헸습니디. 칼로를 더욱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결혼 후 이어진 세 번의 유산이었습니다. 타향에서 그녀의 고통은 더욱 깊어갔습니다.

 

 

칼로는 많은 자화상들에서 콧수염을 거무스름하게 그려넣고 눈썹을 짙게 그려 서로 연결시켜 놓는 등 자신의 모습을 중성적으로 표현했는데, 그녀는 청소년시절부터 남장을 하며 양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린시절 앓았던 소아마비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리고 싶었던 마음과 남편에 대한 애증에서 빚어진 내면의 상처가 덧붙여져 강인한 인상을 주기 위해 칼로가 설정한 모습입니다.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던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심지어는 칼로의 여동생인 크리스티나에게도 깊은 애정을 보입니다. 1930년 남편과 이혼한 크리스티나는 자녀와 함께 언니 집에서 거주하며 디에고의 벽화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결국 남편과 여동생의 깊은 관계를 알게 된 칼로는 깊은 절망과 배신감에 시달립니다. 

 

 

1934년 남편과 동생의 불륜사건 이후 집을 나온 칼로는 그 후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 평생 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남깁니다.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야 했던 탓도 있지만, 자신의 절망과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해 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두 사람은 이혼을 하지만 채 1년도 안 돼 재결합니다. 그리고 1954년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프리다의 칼로는 47세로 고단했던 이 세상 여행을 마치고 눈을 감습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죽음을 앞두고 프리다 칼로가 남긴 말에서 극단의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내야 했던 한 여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옵니다. 

 

이상, 프리다 칼로 전시회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