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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불행과 절망 속에서도 예술혼을 잃지 않은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부러진 척추 나의 탄생 외 5점

 

프리다 칼로는 불행과 절망 속에서도 예술혼을 잃지 않은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입니다.

멕시코 현대회화의 아버지이자 벽화운동의 거장인 리베라 디에고의 아내이기도 했던 그녀는

원시주의적인 양식으로 그린 강렬하고 화려한 색조의 자화상으로 유명합니다. 

 

솔직히 칼로의 그림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흉측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어떤 그림은 똑바로 보는 것조차 저어가 될 정도였지요. 하지만 칼로의 아픈 삶을 알고는

그런 느낌을 갖는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삶 속에서도 "창조는 고통의 구원이자 삶에 대한 위로"라고 

되뇌면서 세계사에 길이 남을 창조적인 그림을 그려낸 칼로였기 때문입니다.

 

칼로가 그린 자화상만도 200여 점이 넘지만, 오늘 포스팅에서는 그녀의 치명적인 불행을 

연상케 하는 부러진 척추나의 탄생, 그리고 그녀가 또 하나의 일생일생의 사고였다고

말하는 남편 리베라와 자신을 함께 그린 그림 위주로 몇 작품 올립니다. 

 

 

프리다 칼로. 불행과 절망 속에서도 예술혼을 잃지 않은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칼로는 7세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지만 똑똑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했다.

그녀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이던 에스쿠엘라 국립예비학교에 진학했으며

생물학, 해부학 등을 공부해서 장차 의사가 될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18세 때 전차와 버스가 부딪치는 바람에 고통사고를 당했고,

이때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긴 쇠파이프가 배를 관통하면서 허벅지로 빠져나왔고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은 짓이겨졌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의사들은 아무도 그녀가 다시 걸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1년간 깁스를 하고 있어야 했고, 그 후 30여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멕시코의 진보적인 여성 의사로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은 칼로가 계획한 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의 부러진 척추. 전차 충돌사고로 척추가 부러진 그녀는 그 후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꿈도 많고 하고 싶었던 것도 많은 10대 후반에 병실에 누워 우울한 삶을 보내야 했던

칼로에게 그림은 일종의 해방구였다. 그녀는 사고 후 병실에 누워 있을 때도 그림을 그렸고,

퇴원해서는 침대 밑에 거울을 달아놓고 거기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평생 동안 그린 자화상 2백여 점 속에는 그녀의 다양한 고통이 그대로 담겨 있다.  

 

 

프리다 칼로와 리베라 디에고.   

 

 

“일생 동안 나는 사고를 두 번 당했다. 첫번째는 열여덟 살 때 나를 부러뜨린 전차 충돌사고다. 

이때 부러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두번째는 바로 리베라 디에고와의 만남이다.

 

이 말처럼 칼로의 일생을 가장 크게 지배한 것은 남편 리베라였다.

그녀가 리베라를 만난 것은 1923년 16세 때였다.

당시 멕시코시티 국립예비학교에서 프레스코 벽화작업을 하고 있던 리베라는 

‘인간의 창조’란 주제로 벽화 초안을 그리고 있었는데, 어린 소녀였던 칼로는 그에게

‘일하는 모습을 좀더 지켜보고 싶으니 계속 작업을 하세요“라고 말했다.

 

 

디에고와 나

 

 

남편과의 만남은 칼로에게 일생일대의 ‘사고’였다.

스물 한 살이나 연상인 리베라는 이미 결혼한 경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외도가 잦아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교통사고가 그녀에게 준 또 다른 고통은 세 번에 걸친 유산이었다. 이미 리베라와 전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지만 결혼 전부터 반드시 아이를 갖겠다고 말했던 칼로에게

남편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재앙이고 불행이었다.

 

 

디에고와 나

 

 

“이 출발이 기쁜 것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1954년 47세로 세상을 떠난 칼로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살아 생전 남편의 그림자였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인 리베라는 총 116점의 작품을 남겼고,

멕시코 대통령궁에 그린 벽화도 그의 작품이다.

당연히 그녀는 한 유명화가의 아내로만 기억될 뿐 미술계에서는 무명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됐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했다.

계속되는 불행과 절망 속에서도 그녀는 ‘예술혼’이라는 희망을 끝까지 피워올렸던 것이다.

 

 

  

내 마음속의 디에고

 

 

칼로는 주로 자신을 그린 자화상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를 그린 것은 혼자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언제나 별 생각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린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병원 침실에 누워만 있기에는 너무나 지루해서 깁스에 그리기 시작했던 그림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미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된 칼로에게 전차사고는 더욱 큰 충격이었다.

부러진 척추와 망가진 온몸에서 전해지는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평생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적인 압박이 더욱 컸다.

 

 

나의 탄생

 

 

그래서일까? <나의 탄생>이라는 그림 속의 칼로는 축복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태어나는

모습이 아니라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자궁을 스스로 헤치고 나오는 장면으로 표현됐다.

그녀는 보디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좋아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없었기에, 그녀의 그림은 자아가 찢어지는 아픔을 통해 탄생했던 것이다.

 

 

우주와 지구, 멕시코, 나, 디에고, 솔로들이 벌이는 사랑의 포옹

 

 

다음은 칼로가 남긴 글이다.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난 하루 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겟지. 불쌍한 미친 여자라고.

 

나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들과 조화를 이루리라."

 

 

죽음에 대하여

 

 

"누구도 다른 누군가과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

이들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다."

 

 

▶ 참조도서 내 인생을 바꿔준 위대한 명언(진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