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으로 보는 세상

트라우마 따돌림과 냉담의 상처 극복하는 법

 

트라우마 따돌림과 냉담의 상처 극복하는 법

 

 

요즘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과 함께 심리학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있습니다.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인 아들러의 사상을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라는 형식으로 엮은 책인데 지극히 현실적인 지침들이 삶에 용기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어서 "아들러의 심리학은 곧 용기의 심리학"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특히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 제목만으로도 착한콤플렉스에 빠져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더 발전해서 <미움받을 용기>에서 <미워할 수 있는 용기>로까지 나아간다면 더 좋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사실 트라우마라는 것도 마음이 강하고 이기적인 사람보다는 마음이 약하고 여린 사람에게 더 나타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든 미움받는 것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나아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거침없이 미워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스스로를 마음의 감옥에 가두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들러는 특이하게도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이 소제목에 마음이 끌려서 책을 읽게 된 것인데, 아들러가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트라우마는 본인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똑같이 나쁜 일을 겪고도 어느 사람은 크게 상처를 입었지만 또 다른 사람은 별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그 나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그 나쁜 일을 핑계삼아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트라우마라는 당의정으로 자신의 상처를 감싸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나쁜 경험이라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 용기를 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트라우마를 겪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변함없는 사실은 살아가면서 누구도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따뜻하게 배려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는 상처받기가 더 쉽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쌓여나가다 보면 성격이 강한 사람은 상처가 분노나 폭력으로 표출되어 범죄에까지 이르기도 하고, 반대로 마음이 여리고 약한 사람은 그 상처를 못 이겨 안으로 병들어가게 됩니다. 정신과 전문의 최명기 원장의 [트라우마 테라피]에는 굴욕, 무시, 배신 등 우리를 마음의 감옥에 가두는 상처가 왜 생기는지, 그리고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방법이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 중 따돌림과 냉담의 상처 극복하는 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물 길 없는 상처라도 잘 극복하고 치유하면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믿어봅니다. 그 외 트라우마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트라우마 따돌림과 냉담의 상처 극복하는 법

 

 따돌림의 상처 - 따돌림은 외로움과 두려움이 동반된 고통이다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괴로운 이유는 우선 외로움 때문이다.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산다. 하지만 사람들이 주위에 있음에도 무리에 끼지 못하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다. 진화의 초기단계에서 외로움에 처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은 좋은 사냥감이다. 사자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영양을 노린다. 무리에서 이탈된다는 것은 곧 죽음에 임박해 무리를 더 이상 쫓아가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사자 역시 같은 처지다. 신체적으로 약해져 무리에서 이탈된 사자는 혼자서는 거의 사냥을 하지 못하니 굶어죽게 된다.

 

따라서 혼자가 되면 본능적으로 불안, 외로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무리에서 떨어져서 혼자 있는 것은 목숨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큰 위협인 것이다. 현대문명을 갖춘 대도시도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려고 모여 살다가 마을이 형성된 데서 비롯되었다. 물론 대도시에서는 말벗 없이 혼자가 된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지만, 외톨이가 되면 우리는 여전히 위험에 처한 게 아닌지 불안해하는 본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외로움, 고독, 소외감에 따르는 고통이다.

 

 

 따돌림의 상처를 극복하는 법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라

 

따돌림은 수치, 굴욕, 공포 등의 감정을 동반한다. 하지만 따돌림에 의한 마음의 상처에 고유한 감정은 바로 외로움과 소외감이다.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위축되면 자기주장을 못하게 되고, 그래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절망감에 빠지면 빠질수록 따돌림의 좋은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따돌림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외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따돌림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 있을 때도 의미가 있지만 홀로 존재할 때도 그 자체로 삶은 의미가 있다. 외로움의 순간은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자신만의 삶을 찾고 싶어서 일부러 고독의 순간을 찾는 사람도 있다. 즉 외로움 자체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외로움에 처했을 때 마음의 빈 공간을 인간관계로 가급적 빨리 채우려고 급급하다 보면 빠지게 되는 것이 따돌림의 덫이다. 하지만 인간은 침묵의 시간, 나만의 시간을 통해서도 변화하고 성숙될 수 있다. 또 외로움을 통해 한 단계 삶이 성숙해지면 외로움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닐 뿐더러 모든 형태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벌거벗은 나 자신을 대면하는 성스러운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자기만의 독창성을 인식해서 키워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아이라고 따돌리기 시작하면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창조성도 함께 죽어버린다. 누군가 남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을 보여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따돌려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남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을 지니게 된 것인지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남들이 이해 못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자신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가장 많이 드러내는 시점은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어린시절에는 부모의 영향 아래 자신의 특성은 아직 두드러지지 않는다. 청소년시절에도 여전히 부모와 학교가 삶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되어도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게 되는 시기가 되면 부모의 영향, 학교의 영향, 사회의 영향을 벗어난 자신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된다. 과거에 따돌림에 시달리던 사람 역시 친구를 선택하고, 동료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고,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시점, 즉 성인이 되는 시점에서부터 진정 우월한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자기비하의 세뇌에서 벗어나라 

 

왕따와 학대를 일삼는 사람들이 피해자를 협박할 때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에게 이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반병신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거나 부모에게 알리면 집까지 쫓아가서 불을 질러 가족까지 다 죽여버릴 것이라는 등의 말이다. 물론 그런 흉악한 범죄도 가능하다. 하지만 실현가능성을 놓고 보면 그다지 높지 않다. 피해자가 학대 사실을 선생님이든 부모든 경찰에 알려서 외부에서 개입하게 되면 학대하는 사람들도 멈추게 되어 있다. 남을 따돌리는 사람들은 일단 벌을 받아야 사람들을 따돌리고 소외시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한다. 벌을 받기 전까지는 그게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협박을 하는 것도 자신들의 부당한 행위가 알려질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반복적으로 그런 협박을 듣고, 게다가 그런 협박에 폭력까지 동반되면 협박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공유정신병(Shared psychosis)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뇌를 풀지 못하는 한 그들의 말에 휘둘리게 된다. 세뇌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을 따돌리는 존재들을 자세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그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몰려다니면서 누군가를 못살게 구는 데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찾는다. 따라서 당신의 감정을 이용하고 조정하는 그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먼저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단점, 약점, 추한 점을 찾아내라. 그렇게 당신의 우월함과 그들의 열등한 점을 하나씩 대비하면서 세뇌에서 벗어나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아와야 한다.

 

자신을 받아들여줄 다른 집단을 찾아라  

 

인간이 집단이 필요로 하는 이유는 자기주장, 자기실현 때문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살기 어렵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 어디에선가 당신과 같이 누구에겐가 따돌림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피드백을 통해 변화하는 과정을 정신과에서는 집단정신치료라고 한다.

 

사람들은 위기에 처하게 되면 나보다 우월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누군가 충고를 해주고 길을 제시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려움을 견뎌내는 힘은 결국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같은 따돌림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 돕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인터넷 카페, 블로그, 트위터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만약 모임이 없다면 당신이 최초로 따돌림 당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 수도 있고, 온라인에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오프라인으로 만날 수도 있다. 모임은 너무 작아도, 또 너무 많아도 좋지 않다. 너무 작은 모임은 서로의 절망감이 심해지다가 동반자살등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너무 크면 진정한 도움을 서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8~12명이 바람직하다.

 

 

냉담의 상처 - 냉담은 부조리와 외로움이 결합된 극단적 무관심이다

 

냉담은 부조리와 외로움이 합쳐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 없을 때 외로운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이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그때는 이상한 외로움을 겪게 된다. 사람이 곁에 있음에도 반응이 없는 것이 냉담이다. 냉담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끄는 것이 제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치며 냉대를 참아야만 하는 상황도 있다. 그럴 때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한다. 따뜻한 반응으로 차가운 무반응을 상쇄하는 것이다. 냉담의 상처를 입었는데도 자신을 위로해 줄 사람을 찾지 못하면 그 상처는 마음에 동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 더군다나 냉담 후 분노가 동반되면 피해자는 더욱 힘들어진다. 냉담이 분노의 전주곡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모가 냉담할 때 자식이 말을 걸면 부모가 짜증을 낸다. 그렇게 자란 자식은 나중에 컸을 때 똑같이 부모에게 갚게 된다. 성장해서 자신이 냉담할 때 부모가 계속 말을 걸면 이번에는 자식이 짜증을 내는 것이다. 대화 없는 집안, 냉랭한 집안, 나아가 살벌한 집안이 된다. 냉담의 상처로 인해 소심하게 자란 사람들은 상대방의 무관심을 의도적인 냉담으로 오해하곤 한다. 사소한 일에도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냉담에 의해 상처를 받다 보면 외로움에도 취약해져서 억지로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지겨운 눈치를 보이면 냉담하지 않은지 걱정하곤 한다.

 

 

■ 냉담의 상처를 극복하는 법

  

냉담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그만둬라 

 

냉담한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고 남의 사소한 요청에 대해 일일이 반응하기를 귀찮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냥 한마디 더 설명해 주고, 한 번 더 웃어주면 될 것을 귀찮아서 안 하는 것이다. 이들은 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강자이기 때문에 굳이 상대방을 배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냉담하게 굴어도 상대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냉담하게 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자신이 약자라고 판단될 때는 냉담한 테도를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부하직원의 말은 귀찮아하면서도 상사에게는 별별 아부를 다하는 것이다. 

 

이처럼 당신에게만 유난히 냉담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당신에게 진정한 호감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그러니 그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은 이제 그만두자. 누군가 당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면 있는 그대로 생각해라. 상대방은 당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거나 싫기 때문에 냉담하게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환상을 갖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차라리 상대방의 의도와 상관 없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편이 낫다. 즉 상대방이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냉담한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며 배려하기보다는 나에게는 이 관계가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침묵의 강한 힘을 이용하라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냉담한 사람 앞에서는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다. 어떻게든 그의 말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냉담한 사람에게 질질 끌려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내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나도 상대방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는 인간 세상 밖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힘을 빌리는 것도 도움이 된다. 혼자 암벽 등반을 하거나, 번지점프를 하거나,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서 극한을 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극한의 순간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매일 살아오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느끼고, 사람들이 내게 상처를 주는 세속세계를 잊게 되는 것이다. 

 

또 냉담한 사람과 단둘이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는 두뇌속의 DVD 플레이어, CD 플레이어,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하는 기도 역시 침묵을 이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자신과의 대화는 자신을 알아가는 유용한 도구다. 따라서 자신에게 냉담하게 구는 사람과 억지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 낫다. 꼭 종교가 있을 필요는 없다. 내 안의 신과 대화를 하고, 내안의 신이 외부와 연결된 자연을 상상하는 것 또한 냉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기도인 것이다.

 

따뜻한 사랑으로 업의 연을 끊어라

 

냉담한 사람들은 냉담함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냉담한 태도를 지속하면 당신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다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이 냉담하면 냉담할수록 당신의 마음이 조급해져 달려들게 되리라는 것을 잘 예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되었건, 형제가 되었건, 배우자가 되었건, 동료가 되었건 애정을 구걸하면 자신만 더 비참해질 뿐이다. 더군다나 냉담을 주무기로 삼는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그렇게 냉담은 내 감정과 관심을 블랙홀과 같이 빨아들인다. 

 

문제는 이렇게 냉담한 사람의 냉기에 마음을 뺏길수록 마음의 온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다. 몸에 온도가 있듯이 마음에도 온도가 있다.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리면 삶은 의미를 잃는다. 심장이 멈추는 것만이 죽음이 아니다. 마음이 얼어버리면 그도 역시 죽음이다. 따라서 냉정한 사람에게 온기를 빼앗긴 마음은 어떻게든 다시 원래 온도를 회복하고자 한다. 효과가 있건 없건 마음의 온도를 올리기 위해 냉담한 사람의 관심을 끌고자 더욱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 오히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내 온기를 나눠준다면 어떨까? 그 사람의 마음에 불이 지펴지면 나도 그 불을 통해 마음이 다시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아껴주는 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이다. 나를 아껴주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갈망하는 대신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답을 하는 것이다.

 

내가 냉담해서 상대방이 냉담한 것일 수도 있다

 

남에게 친절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싫어한다. 먼저 연락을 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거만한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강해보이지만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만 항상 신경쓰는 나약한 존재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환대하지 않으면 그들이 자신에게 냉담하게 군다고 생각한다. 이런 거만한 사람들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자신이 필요할 때, 이용가치가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타인에게 냉담하다는 것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도 본의 아니게 냉담하게 비쳐지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남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의건 본의가 아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남이 보기에는 결과적으로 똑같이 냉담한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냉정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낀다는 것은 모순이다. 누군가를 진정 아낀다면 칭찬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윗사람들도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들이 힘들어할 때 칭찬하고 배려하면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상, 트라우마 따돌림과 냉담의 상처 극복하는 법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