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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조선통신사 일본열도를 뒤흔든 최초의 한류

 

징비록 조선통신사 일본열도를 뒤흔든 최초의 한류

 

 

징비록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김규철)가 이끄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오라는 선조(김태우)의 지시에 따라 조선통신사를 이끌고 왜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정사 김성일(박철호) 과 부사 황윤길(김종수)은 서로 전혀 다른 결과를 보고한다.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눈빛에 광채가 깃들어 탐욕과 지략을 갖추었고, 전국을 통일한 직후라 자신감과 야심으로 가득차 금방이라도 조선으로 쳐들어올 것으로 보였다며 침략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할 것으로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행동은 과장되고 허세에 가득차 있었다. 만일 군사를 움직일 저의가 있었다면 은밀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과 지위를 대등하게 하기 위한 허세일 뿐"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징비록 조선통신사 일본열도를 뒤흔든 최초의 한류

 

이것이 동인과 서인의 경쟁관계로 인해 나온 의견인지 아니면 정말로 서로 전혀 다르게 본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아무래도 동인과 서인의 대립관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조정은 더욱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리하여 류성룡(김상중)을 비롯한 대신들은 서정관(書狀官) 허성(許筬)에게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자 함께 자리한다.

 

 

허성은 정사와 부사가 객사에 머무는 동안 왜국을 살피기 위해 몰래 왜인처럼 변복을 해서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며, 제한된 곳이 많아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동안 알지 못햇던 왜국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가징 인상적인 것은 남만인(南蠻人, 중국 남쪽의 오랑캐, 배를 타고 온 서양인)들과 그들의 문물이었다. 왜인들은 남만인들과 다양한 문물을 교류하고 있었고 그 문물들은 너무도 생소한 것들이었다.

 

 

조총도 그들이 전해 준 문물의 하나라고 들었다.

 

 

게다가 남만인들이 타고 다니는 상선은 그야말로 괴물처럼 거대했는데, 만일 남만인들이 그러한 배를 만드는 방법까지 왜인들에게 가르쳐주었다면 왜국은 우리 조선을 위협할 만한 큰 전선(戰船)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선조가 조선통신사의 부사 황윤길과 서정관 허성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더라면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통신(通信)>의 의미가 "믿음을 통한다"는 의미여서 좀 놀랍다.   


 조선통신사 - 1만 리 일본 여행길 위에 펼쳐진 문화교류

 

우리나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만큼 좋든 싫든 교류를 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역사상 끊임없이 교류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후기로 갈수록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고 조선시대에도 크고 작은 왜구의 침입이 잦아 급기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우리나라는 일본을 왜구로 인식하며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일본의 사회와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외교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일본에 대한 이런 무관심과 무지 때문에 결국 임진왜란과 같은 비극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1428년(세종 10년) 정사 박서생(朴瑞生) 사절단이 일본 막부 장군 습직(襲職) 축하를 위해 파견된 것으로 시작된 조선통신사는 1811년(순조 11년)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한 역지통신(易地通信)이 행해질 때까지 20회나 이어진 외교사절단이었다.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단은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 후 왕래가 끊어졌지만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끈질기게 요청해 오는 바람에 다시 파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조반정 후 청나라가 세워지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청나라 중심의 책봉 체제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상호연대를 강화할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18세기 들어셔먼셔 대륙정세가 안정되자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는 일은 의례적인 형식에 가까웠으며, 19세기 이후에는 외교적인 의미가 상실되어 1811년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역지통신으로 조선통신사 파견은 끝난다.

 

통신사 행렬도(국사편찬 위원회 소장)

 

그런데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이유와 목적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다소 차이가 있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왜구 문제였고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직후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교섭과 국정탐색 등 정치외교적인 문제였다. 또 일본과 조선 두 나라 정부의 정치적 의도도 달랐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보낸 이유는 무엇보다도 평화를 위해서였다. 일본이 다시 침입해 오지 않도록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회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피로인(被擄人)들을 쇄한(刷還)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임진왜란 특히 정유왜란 때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그들은 이리저리 팔려다니며 노예와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구해내는 것이 나라의 큰 일이었으며,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한편 일본이 조선에 사행을 요청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새로 건립한 막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해 일본인들이 조선의 사신행차를 관람케 함으로써 마치 조선이 도쿠가와 막부에 조빙하러 온 것처럼 과시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통해 막부의 공적을 과장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며 도쿠가와 시대가 왔음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한양에서 에도(도쿄)까지 왕복 8개월이 소요되는 조선통신사의 긴 노정은 단순히 정치외교적 의미뿐 아니라 문화교류라는 문화적인 의미도 있었다. 조선통신사에는 사행의 책임을 맡은 정사, 정사를 보좌하는 부사, 그리고 사행의 결과를 기록하는 종사 등 공식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 외에도 문화교류를 위해 문사를 비롯해 음악, 미술, 잡기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다양한 직역들의 인물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1년 가까이 일본 전역을 여행하면서 조선의 문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망을 채워주었다.

 

 

일본일기에 따르면 조선통신사가 오면 온 섬의 남녀노소가 구름처럼 몰려와 산과 들을 메웠고 장막을 치거나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관람했다고 한다.

 

 

총인원 30만 명, 말 8만 마리가 동원된 조선통신사는 당시 막부 1년치 예산을 웃도는 경비 100만냥이 소요되었고, 일본은 이 비용을 전액 부담했다. 막부는 통신사 군단이 지나가는 곳의 도로나 교량을 정비 및 신설하고 중간중간에 휴게소와 간이화장실을 마련했다. 육로로 이동할 때는 말들을 내주었으며, 통신사 행렬이 도중에 선박을 이용할 때는 선박들을 호위할 일본 선박들을 따로 준비했다. 6척의 조선 선박과 50척의 대마도 선박을 일본 선박 9백여 척이 호위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사절단원들은 지금의 한류스타들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는데, 그 중 달마도로 유명한 도화서 화원 김명국은 상한서화가표기집에 "하늘의 솜씨와도 같은 조화에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극찬하는 글이 씌어질 만큼 인기가 높아 왜의 요청으로 두 번이나 방문했다고 한다.


 

이상, 이화여대 김경숙 교수님의 [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과 EBS 역사채널e [한류 믿음을 통하다]를 바탕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본 징비록 조선통신사 일본열도를 뒤흔든 최초의 한류에 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드라마 징비록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