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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징비록 임진왜란을 예견한 이순신과 거북선

 

징비록 임진왜란을 예견한 이순신과 거북선

 

 

임진왜란 일어나기 직전 남해안 방어의 중책을 맡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다가올 전쟁을 예견하고 방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는 장차 틀림없이 왜란이 있을 것으로 내다본 몇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피폐해진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고 화약을 만들어 비축하는 한편 봉수대를 쌓고 큰 돌을 날라다가 구멍을 뚫고 쇠사슬을 박아 앞바다에 질러놓았으며, 불철주야로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임전태세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황원갑의 [부활하는 이순신] 에 따르면 이순신은 한마디로 준비된 장군이요 완벽한 승리를 위한 철저한 투자와 노력을 기울인 명장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도 원균에게는 병력과 장비, 군량 등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는 국왕 선조와 대신들의 철저한 외면, 윤두수 등 서인들의 시기와 질시, 모함 속에서 거의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임진왜란 전 류성룡의 지시 아래 이순신이 선조 몰래 거북선을 건조하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어 분노하는 선조와 난감해진 류성룡, 그리고 임진왜란을 예견한 이순신과 거북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드라마 징비록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위 사진은 한산 충무사 영당에 모신 이순신 장군 영정(1977년 정형모 그림)입니다. 

 

 

 

징비록 임진왜란을 예견한 이순신과 거북선

 

징비록 11회에서 선조(김태우)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거북선을 건조하고 있다는 장계가  전라감영에서 도착하자 즉시 류성룡(김상중)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분노한 선조는 류성룡에게 “과인이 분명 거북선 건조를 중단하라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나라의 국고가 모자라 수군 폐지까지 논의됐던 차에 이순신이 무슨 여력으로 이와 같은 일을 벌인다는 말이냐”며 다그친다. 또 “만약 과인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진행된 일이라면 세곡이라도 빼돌렸다는 것이냐”며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드는 사실을 정말로 몰랐느냐고 몰아붙인다.

 

 

그러자 류성룡은 선조를 향해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시킨 일이라며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으니 부디 이순신을 벌하여 거북선 건조가 중단되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청한다. 거북선은 우리 바다, 백성, 종묘사직을 지켜줄 유일한 전함임을 알았기에 목숨을 걸고 눈물로 호소하며 이순신과 거북선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누구에게나 명분이 있다며 "어명을 무시하고 과인을 속이면 명이 무슨 소용이고 국법이 어디 있나? 류성룡, 이순신은 과인의 명을 기다리라"며 노여움을 거두지 않았다. 쪼잔하게도 신하들만 백성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매우 불쾌했던 선조는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서성거리다가 내관(고규필)에게 이 일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내관의 대답이 참으로 귀담아들을 만하다. "류성룡은 어명을 어겼다 하나 결과적으로는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 것이니, 만약 이를 엄벌에 처한다며 옳고 그름을 떠나 조정은 전하의 눈치만을 보는 대신들로 가득찰 것이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선조가 다시 "네 놈은 나만 바라본다 하지 않았느냐. 어찌 한입으로 두말을 하느냐"며 다그치자 "신과 같은 내관이야 오직 전하만을 위해 존재한다지만 조정 대신들은 전하와 백성 모두를 근심하는 사람들이 아니옵니까"라고 입바른 말을 한다. 참으로 당연한 말인데도 선조에게는 자칫 분노를 가라앉히기는커녕 불을 지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말이다. 

 

 

그 후 선조는 이순신이 보내온 서찰을 받아들게 된다. 그 서찰에는 "나라 살림이 큰 어려움에 놓여 있음을 알고 계획에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을 때 군영에 그 많은 쌀이 당도한 것을 보고 신은 너무도 놀랐사옵니다. 국고가 그토록 핍진함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시어 바다만은 왜적들에게 결코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전하의 진심을 알고 신은 눈물지었나이다. 다행히 거북선은 은밀하고 차질 없이 건축되고 있으며 이제 곧 전하와 백성들에게 그 위용을 드러낼 것입니다. 약조드리옵니다, 신 이순신의 붉은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왜적은 단 한 발 자국도 조선땅을 밟지 못할 것이옵니다. 부디 강녕하시옵소서"라고 씌어 있었다.

 

 

이순신이 보내온 서찰을 읽은 선조는 자신이 류성룡을 오해한 것임을 알게 됐다. 류승룡이 자신이 직접 거북선 건조 비용을 마련했으면서도 선조의 명인 것처럼 해서 이순신에 건조 비용을 조달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선조는 류성룡을 불러 "이순신에게 과인의 명인 것처럼 쌀을 보냈느냐"며 "과인이 좌상을 곡해했다. 고맙다. 좌상이야말로 진정한 충신이다"라고 사과한다. 방계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늘 의심도 많고 시기심도 많아 쪼잔한데다 고집도  센 선조였지만, 이렇게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선뜻 사과를 하는 것을 보니 내심 성군이 되고 싶어했던 선조의 진심이 엿보여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김규철)는 조선 침공을 위한 출정을 앞두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먹을 갈게 하더니 먹을 다 갈고 나자 일어나 발에 흠뻑 먹을 묻힌 후 지도 위의 조선땅을 쾅 밟아 짓누른다. "조선이 내 발 아래에 있다!"는 의미를 담은 행동이었다. 끝간 데를 모를 그의 야망에 소름이 돋을 뿐이다. 

 

 

마침내 13만 일본군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년 4월 14일(양력 5월 23일) 일본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조선 침공을 위해 대한해협을 건넌다.  

 

 

희희낙락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잔뜩 겁을 먹은 선조, 근심어린 류성룡 등 3인의 대비되는 표정이다.  


사실 이 무렵 조선의 군사력은 건국 초기의 튼튼했던 국방체계가 거의 무너져 유명무실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국방상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육성한 조선수군은 당대 최강의 해군이라 할 만했다. 일본의 수군은 육군을 실어나르는 수송선단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명나라 수군도 독자적인 편제와 작전 능력이 매우 부실했지만 조선수군은 원양해군이 아니었을 뿐 독자적인 편제와 작전능력을 갖춘 강력한 함대였던 것이다.

흔히 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말하면 거북선을 연상하기 십상이지만 거북선은 특공 돌격선으로 초기에 3척에 불과했고, 사실은 판옥선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주력함이었다. 이 판옥선과 거북선은 목질이 튼튼한 소나무 통나무 골조에 보통 목선의 2배에 이르는 두께 13센티미터나 되는 판재를 사용했으므로 일본의 전함에 비해 월등하게 견고했다. 그런 까닭에 일본의 전함은 조선수군 전함과 마주 부딪치면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거북선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거북선 연구에 침식을 잊다시피했다. 다행히 그의 부하 중에는 조선(造船)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전라도 나주 출신의 나대용이라는 군관이 있었다. 나대용은 이순신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거북선 건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거의 완공단계에 있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의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 따르면, 거북선은 크기는 판옥선과 같고 위는 판자로 덮었다. 판 위에는 십자형의 좁을 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고 그 외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에 발붙일 곳이 없게 했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아 그 아가리가 총구멍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달아 그 아래 총구멍을 냈다. 그리고 좌우에 각각 6문의 총구멍을 냈는데, 그 전체 모양이 대체로 거북과 같으므로 그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했다. 적을 만나 싸울 때는 거적으로 송곡과 칼날을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갔다. 적이 배에 올라 덤비려 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려 거꾸러지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들면 전후좌우에서 일시에 총을 쏘니 적선이 바다를 덮고 달려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기에 크고 작은 해전에서 이것으로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

 

거북선에 관한 자료는 통제영 귀선도와 전라좌수영 귀선도 두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서도 통제영 귀선도가 보다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정리한 통제영 거북선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밑판(속칭은 본판)은 10매를 이어붙였고, 길이 66척 8촌, 머리쪽 너비는 14.5척이며 꼬리 쪽 너비는 10.6척이다.

 

2 좌우 현판은 7매씩 이어붙였는데 높이가 7.5척이고 가장 아래 제1판의 길이는 68척이며 차례로 길어져서 가장 위의 제7판은 길이가 113척이고 어느 것이나 두께는 모두 4촌씩이다.

 

3 노판은 4매를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4척이고 제2판 좌우에 현자포 구멍을 하나씩 뚫었다.

 

4 축판(軸版)은 7매를 이어붙였는데 높이가 7.5척이고 위의 너비는 14.5척, 아래 너비는 10.6척인데, 제6판 한가운데에 직경 14 2척의 구멍을 뚫고 타(舵)를 꽂게 하였다.

 

5 좌우 현에는 난간을 만들고 난간머리에 횡량(橫梁)을 건너질러 뱃머리 앞에 닿게 하여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씌운 것과 같았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난간을 만들었는데, 뱃전 난간 위에서 패 나간에 이르기까지 높이는 4.3척이다.

 

6 패 위 난간 좌우에 각각 11매의 판자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보게 덮고, 그 뱃등에 1.5척 정도의 틈을 내어 돛대를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에 편리하도록 햇다.

 

7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만들었는데 길이는 4.3척이고 너비는 3척이며 그 속에서 유황 및 염초를 태워서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케 했다.

 

8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고 좌우의 패에 각각 22개씩의 포구(砲口)에 구멍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만들었다.

 

9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구를 뚫었고 그 아래 2개의 문을 만들고 문 곁에 포구를 1개씩 뚫었다.

 

10 좌우 복판(腹板)에도 각각 12개의 포구를 뚫었으며 구(龜)자 기를 꽂았다.


11 좌우 포판(鋪板) 아래 방이 각각 12간인데 2간은 철물을 보관하고 3간은 화포, 궁시, 창검을 보관하며 7간은 군사들의 휴식소로 했다.


12 왼쪽 포관 위의 방 1간은 선장이 거처하고 오른쪽 포판의 방 1간은 장병들이 거처했다.


13 군사들이 쉴 때는 포판 아래 거처하고 전투시에는 포판 위로 올라가 포를 여러 구멍에 걸고 쉴새없이 쟁여 쏘게 했다.

 

한편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구조는 통제영 거북선과 비슷하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두를 달았고 복판 위에 거북무늬를 그렸다. 또 그 좌우에 각각 2개의 문이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2개, 복판 좌우에 각각 6개, 현판 좌우에 각각 10개의 포구가 있으며 좌우의 노가 각각 8개로 나온다.

 

왼쪽 것이 이 통제영 귀선도이고 오른쪽이 전라좌수영 귀선도다. 거북선의 승조 인원은 대략 한 척에 120~130명의 장병이 승선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거북선의 특징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돌격선의 기능을 지닌 특수 전함이었다.
-일반 전함보다 훨씬 튼튼하게 만들어진 무적함이었다.
-우수한 화력을 지닌 공포의 전함이었다.
-공격뿐 아니라 방어에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불침함이었다.

 

이상, 징비록 임진왜란을 예견한 이순신과 거북선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