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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서애 류성룡의 7년기록

 

징비록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서애 류성룡의 7년기록

 

징비록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서애 류성룡의 7년기록

 

2월 14일부터 KBS 1TV에서 방영되는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징비록]은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였던 서애 류성룡의 저서를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전후의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50부작 정통사극이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다가올 어려움을 대비하자"는 의미를 가진 '징비록'(懲毖錄)에는 류성룡이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겸직하면서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얻은 국가 위기관리의 노하우와 철학이 담겨 있다. 

 

징비록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서애 류성룡의 7년기록

 

드라마 징비록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기획의도에 따르면, 동서 붕당으로 인한 조선통신사의 내부 분열, 백성과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임금 선조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과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과 적대감, 난리통에도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양반들, 조선군의 무능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조정의 갈등은 5백 년 전 조선이 아닌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고민과 이슈임을 환기시킬 것이라고 한다. 연출을 맡은 김상휘 PD는 지금까지 임진왜란을 다룬 콘텐츠가 많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다뤄보려고 한다면서 군사/정치/외교를 강조해 임진왜란 중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을 서애 류성룡의 시선을 통해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성이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류성룡 역을 맡은 김상중은 이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영광스러울 따름이며, 이런 인품을 가진 위인을 연기한다는 것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과 다짐하는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믿고 보는 배우 김상중 때문에라도 본방사수할 생각이다.  

 

 

왕다운 왕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기부터 살겠다고 아들 광해에게 왕궁을 맡기고는 백성과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몹쓸 임금 선조 역은 김태우가 맡았다. 평소 선량한 이미지와 비열한 이미지라는 극과 극의 연기를 자유자재로 펼쳐보여 주는 연기파 배우 김태우가 과연 쪼잔하고 비열한 선조를 얼마나 밉살맞게 표현해 줄지 자못 기대가 된다. 아마 모르면 몰라도 김태우가 나올 때마다 한두 마디쯤은 반드시 분개어린 멘트를 날릴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든다.

 

 

“왕이 곧 나라다”라며 선조를 보필하는 윤두수(尹斗壽)는 오랜만에 출연하는 임동진이 연기한다. 윤두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서인 중 몇 안 되는 퇴계 이황학파 사람이다. 선조 때 동인들로부터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연안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대사헌 때 당쟁 과정에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어 선조를 개성에 호종, 어영대장을 지낸 후 의정부영의정까지 올랐다. 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할아버지이며 임진왜란 때의 장군 원균의 인척이기도 하다.  

 

 

"힘이 있어야 정의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산해(李山海)는 이재용이 연기한다. 이산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교육자, 화가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李塏)의 종고손이다. 동인의 주요 수뇌부이자 전략가로 문장력을 인정받아 명종의 명으로 경복궁 대액(大額)을 썼다. 여러 벼슬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질 때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했다. 정여립의 기축옥사 때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기축옥사의 참혹함을 보고 서인에게 원한을 품고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 된다.

 

 

 선조의 후궁으로 가장 사랑받았던 귀인 김씨는 김혜은이 맡았다. 훗날 인조의 할머니가 되는 귀인 김씨는 14세 때 선조의 후궁이 되어 4남 5녀를 두었다. 19세에 종4품 숙원(淑媛)의 칭호를 받고, 23세에 첫아들 의안군을 낳고 정3품 소용(昭容)에 올랐으며 24세에 둘째아들 신성군을 낳고 종1품 귀인(貴人)에 올랐다. 그리고 50세에 정1품 인빈(仁嬪)이 되었다. 아들 신성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정치적 야심을 불태우는 여인이다. 자신의 아이들과 유력한 정치세력들의 자식을 정략결혼시켜 신성군과 정원군을 세자에 올리기 위해 늘 긴장 속에서 산다.  


 징비록-낙향한 류성룡의 임진왜란 7년의 기록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징비록](김흥식 옮김)에 따르면,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 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임진왜란 이전의 국내외적 정세로부터 임진왜란의 실상, 그리고 전쟁 이후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기록된 책이다. 류성룡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에서 유래한다. 즉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르는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래서 징비록에는 류성룡 자신이 잘못한 일에서부터 조정 내 분란, 나아가 선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 등 임진왜란을 둘러싸고 발생한 모든 일들이 가감없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서애 류성룡-7년 전쟁의 조선군 총사령관 

 


서애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년) 경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향시에 급제한 그는 21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 후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이후 병조판서, 지충추부사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그 무렵 왜군의 동태를 수상하게 여긴 그는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천거했고 형조정랑으로 일하던 권율은 의주목사로 천거했다.

 

 

임진왜란 일어났을 때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던 류성룡은 다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했다. 선조가 전쟁을 피해 길을 떠나자 호종(扈從)했으며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다시 의주에 이르러서는 평안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파견되어 오자 그와 함께 평양성을 수복했다. 이후 충청, 경상, 전라 삼도 도체찰사에 임영되었으며,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훈련도감을 설치, 군비를 강화하고 인재를 배양했다. 하지만 정유재란(왜군의 2차 침입) 이듬해에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류성룡은 조용히 저술에 몰두했는데, 그 후 복관되어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으며 1607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발발 당기 포화의 한가운데에서 전쟁의 참화를 실제로 겪은 고위 관리였으며, 특히 전쟁 수행 책임자중 최고위직에 있던 인물이었다.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나서도 반성하지 않고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책임있는 선비라 할 수 없다. 나라의 질서는 무너지고 수많은 유산은 불에 타 사라졌으며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 현실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이에 대해 자신이 몸담았던 조정과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임진왜란 전후의 냉정한 현실 인식을 통해 후손들에게 값진 교훈을 남겨준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 

 

 임진왜란-지옥의 전쟁

 


임진왜란이 발생한 해는 1592년이지만 극동아시아에는 그 이전부터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참된 관리라면 그러한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청한 것이 1583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이었다. 류성룡은 권율과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 향후 닥쳐올 변란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조선 조정의 쇠미 현상은 몇몇 충신들의 노력으로 되돌려질 수준이 아니었다. 선비들은 훈구파니 사림파니 파벌을 만들어 경쟁했고, 그 결과 수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화가 조정을 뒤덮었으며, 조선 초기에 정비된 국방체제는 점차 붕괴되어 외침을 방어할 능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반면에 일본은 15세기 후반부터 자국에 진출한 유럽 상인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봉건국가 체제에 비약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해서 국내통일을 완수했다. 도요토미가 조선을 공격한 까닭은 잘 알려져 있듯이 통일과정에서 경쟁했던 수많은 제후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력과 욕망을 대외적으로 분출시키고, 나아가 대륙 침략을 감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은 예견된 전쟁을 방지할 만한 노력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급기야 1592년 왜군은 조선을 침략, 파죽지세로 조선땅을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했던 왜군의 기세는 평양성에서 멈추었고, 명나라 군대의 개입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이순신 등 뛰어난 장수들의 노력으로 왜군은 후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에도 정유재란으로 침략이 재발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오랜 기간 조선을 중심으로 극동지방을 뒤덮고 있던 전쟁의 기운은 걷혔다. 하지만 전쟁 전에 170만결에 이르던 조선의 경지 면적은 전쟁 후 54만결로 줄었고 군량미 조달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 속을 헤매야 했다. 그 결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까지 빈번히 발생했으며, 이곳저곳에서 불만에 가득찬 자들은 백성을 선동, 난을 일으키곤 했다. 이러한 내용이 징비록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상, 징비록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서애 류성룡의 7년기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