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성동일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자 아름다워라
며칠 전 대법원 대법관 퇴임 후 스스로 법원행정처를 찾아가 시골판사가 되겠다는 법조인이 있어서 큰 화제가 됐다. 박보영 전 대법관이 그 주인공인데, 대법관 출신이 시·군법원 판사를 지원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종종 회자되는 전관예우 문제를 불식시키고, 판사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은퇴다.
미스 함무라비 성동일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자 아름다워라
두 달 가까이 머리와 마음을 정화시켜 주던 문유석 판사 극본의 JTBC 법정드라마 [미스 함무라비]가 지난주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 속에서 종영했다. 종영과 함께 한세상(성동일) 부장판사도 사직서를 냈다.
법정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그의 직속배석인 박차오름(고아라) 판사와 임바른(김명수) 판사에겐 마치 마을 초입에 수호신처럼 떡 버티고 서서 그 마을을 지켜주는 큰 나무와도 같았던 한부장이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마을사람들을 품어주던 수호신 같던 한부장이 사직서를 낸 이유는 박판사의 징계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미스 함무라비 성동일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자 아름다워라
법원장실에 사직서를 낸 후 수석부장판사(안내상)를 방문한 한부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시 재고해 주십사고 말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책임을 지라고 책임자 자리가 있는 것이니"라는 말,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도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책임질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그 책임을 모면하려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서 한부장은 임판사와 박판사를 잘 지켜달라면서 "그 친구들이 미래입니다. 미안하지만 나하고 수석부장님은 과거예요. 과거가 미래한테 양보하는 게 섭리 아니겠습니까"라고 덧붙인다. 섭리,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이 세상에서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인 이 섭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섭리대로만 살아간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는 것이 또한 이 세상 삶이기도 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도 모든 사건들이 하나하나 잘 해결돼 나간다.
징계 위기에 몰려 있는 박판사는 자신이 맡는 마지막 사건이 될지도 모르는 재판에 나선다. 국민참여재판을 위한 10명의 배심원도 함께 자리한 재판이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가 남편의 폭력에 대항하다가 남편을 가위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었다.
박판사는 재판과정에서 남편이 이미 불륜을 저질러오고 있었으며, 평소에도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있었던 점을 밝혀낸다. 그러다가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이 더 심하게 폭력을 가하자, 남편의 인정사정없는 발길질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위로 남편을 찌르게 된 거라는 사실도 피고인과 증인을 통해 밝혀낸다. 게다가 남편의 몸무게가 97킬로그램인데 아내의 몸무게는 45킬로그램밖에 안 된다면, 남편이 가하는 폭력으로 충분히 죽음의 위협을 느낄 법하다는 공감도 끌어냈다.
검사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크게 내세우며 징역 20년을 구형하지만, 검사의 말처럼 판사가 아니라 마치 피고인의 <변호사 같은> 박판사의 신문이 피고인의 억울한 사정을 소상하게 밝혀낸 덕분에 마침내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무죄에 손을 들어준다.
한부장은 배심원들의 무죄판결을 보고받은 후 박판사와 임판사에게 “오늘이 내 마지막 재판이다”라며 사직서를 낸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안타까워하며 울먹이는 두 사람에게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 전관예우 좀 해달라"고 우스갯말을 하지만, 이 또한 더없이 아름다운 은퇴라 할 만하다. 한껏 빛나는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는 후배판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자리에 연연하다가 결국 추한 모습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니만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의 구절을 떠올리게 해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 사이에 수석부장은 성공충(차순배) 부장판사를 찾아가 박판사에 대한 징계 요구가 철회됐음을 알리는 동시에 성부장에 대한 징계절차가 진행될 것임을 알렸다. 성부장이 당황한 얼굴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자 수석부장은 “성부장이 함께 일했던 대부분 판사들이 밝혔다. 성부장의 폭언과 모욕, 성차별 언행 때문이다. 언론에도 일부 알려졌다. 책임져야 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성부장은 “박판사가 나를 모함하는것”이라며 “나는 이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고 호소하지만, 수석부장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뜬다. "분노는 남에게 던지기 위해 뜨거운 석탄을 손에 쥐는 것과 같다. 결국 상처를 입는 것은 나 자신이다"라는 부처님 말씀이 꼭 맞다는 것을 입증해 준 성부장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도외시한 채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박판사를 묶으려 했던 오랏줄에 자신이 묶이게 된 셈이니 말이다.
박판사의 징계가 철회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의 환호를 외치는 동료판사들과 실무관들이다. 과도한 업무지시로 유산을 해야 했던 홍은지(차수연) 판사는 성부장에게 당했던 일들을 폭로하는 글을 올리면서 자신을 위해 나섰던 박판사를 성부장이 징계하려 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성부장에게 당했던 다른 배석판사들도 모두 힘을 합친 결과다. 특히 "나부터 징계해 달라"며 박판사의 징계 철회를 강력히 요구하며 박판사의 징계 철회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임판사와 정보왕(류덕환) 판사의 진정어린 우정이 눈물겹다.
한부장은 배심원들의 뜻에 따라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섰던 피고 아내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자 임판사, 박판사와 함께 배심원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한다. 한부장으로서는 마지막 재판인 만큼 더욱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한부장을 비롯하여 임판사, 박판사, 정판사, 홍판사, 그리고 속기사 이도연(이엘리야)까지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일깨워준 감동의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였다. 마지막으로 이형기 시인의 <낙화> 전문을 올려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상, [미스 함무라비 성동일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자 아름다워라]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 미스 함무라비 아무리 "내 손가락 밑 가시가 더 아픈 법"이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