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 박보검과 대리청정
배우나 탤런트 중에는 안타깝게도 너무 잘생긴 외모에 가려져 오히려 연기력이 돋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효명세자 이영 역을 맡은 박보검과 남장내시 홍라온을 연기하는 김유정의 예측불허 궁중위장로맨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을 이끌어가는 박보검도 그런 배우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응답하라 1988]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박보검이지만, 착한 꽃미남으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이토록 출중한 연기를 보여줄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반항기 가득한 세자, 장난기 넘치는 세자, 달달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세자, 슬픔을 억누르는 세자, 단호한 세자의 모습 등 자유자재로 팔색조의 매력을 발휘해서 아직 20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잘 준비된 연기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박보검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다채로운 연기를 펼쳐 보여줄지 기대해도 절대 실망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 박보검과 대리청정]입니다. 역사극을 보면 대리청정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를 바탕으로 세자의 국정참여를 의미하는 대리청정에 대해 좀더 상세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 박보검과 대리청정
효명세자 이영의 아버지 순조 역을 맡은 김승수다. 명민한 외모를 가진 김승수인데도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나약해서 어벙해 보이기까지 하는 순조의 모습을 제대로 연기해 주고 있다. 정조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11세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외척의 등쌀에 유약한 군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세도정치에 대항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홍경래의 난이 터졌고, 난을 진압했던 영의정 김헌(천호진) 일파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조선의 미래를 아들 아들에게 건 순조는 자신이 더 나약해지기 전에 모든 권리를 효명세자에게 넘겨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신들과 싸운다.
나약한 순조는 아들에게 자신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들어 대리청정을 시키겠다고 말하지만, 효명세자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겠다며 "아버지로서,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여달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효명세자의 말에 난감해하는 순조다.
날이 갈수록 신경증 증세가 심해가던 순조는 대신들을 향해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뜻을 밝힌다. 하지만 순조의 말이라면 무조건 반대를 하고 나서는 대신들은 저마다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니되옵니다"를 외친다. 효명세자도처음에는 다 귀찮고 싫증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고하며 대리청정을 못 맡겠다고 답하지만, 다음 순간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대리청정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기 위해 대신들 앞에서 일부러 골칫덩어리 세자로 보여왔던 것을 벗어던지는 순간이다.
조금 전의 찌질해 보이기까지 하던 모습에서 한순간에 강단있는 모습으로 변한 효명세자를 대신들은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실제로 효명세자는 순조의 적극적인 지원하게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자신에게 주어진 인사권을 활용해서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안동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안동김씨계 핵심인물들을 축출했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과거를 통해 젊은 인재들을 새로 등용하고 군사권 강화를 위해 우수한 인재를 뽑았다. 그러나 계속된 흉년과 천주교 문제 등으로 세상이 어수선한 가운데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채 펼치지 못하고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세자의 국정참여 대리청정
대리청정은 '왕을 대신하여 특정인, 특히 세자가 정무를 관장하는 것'을 말한다. 전근대의 왕은 신성불가침의 절대 권력자였지만 때에 따라 왕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섭정이라고 하며 세자의 대리청정은 이 섭정의 한 유형이다.
법적으로 인정된 섭정으로는 대비의 '수렴청정'과 세자의 '대리청정'이 대표적인데, 이 둘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수렴청정은 어린 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비인 할머니 혹은 어머니가 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정치를 대신하는 형태다. 이 경우 국정은 왕과 대비가 같이 다스린다는 공치의 명분 속에서 운영되었고, 모든 국사를 망라했다.
반면에 세자의 대리청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연로한 왕의 통치를 보조한다는 입장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중대사는 청정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대리청정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세자가 다음대 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불에 탄 효명세자의 초상화를 복원한 것
첫째, 왕이 나이가 많거나 질병 등으로 국정운영 능력이 떨어질 때 국사의 일부를 맡기는 경우 장성한 세자로 하여금 국정운영 능력을 높이려는 교육적 차원에서 배려한 경우 등이다. 이는 대리청정 시행의 보편적인 목적에 따른 것으로 문종, 예종 등 조선 초기의 세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현재의 복잡한 정국을 전환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세자를 내세워 대리청정을 시행한 경우 사도세자, 효명세자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이 경우 세자는 크나큰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고 대리청정을 시작했고, 시행과정에서 집권세력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만약 왕이 이 상황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경우 세자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다.
셋째, 전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왕의 의도와 달리 갑작스럽게 시행되는 경우 선조의 세자 광해군이 그 사례로 꼽힌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피난과정에서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었고, 분조라는 형태로 국정에 관여했다.
넷째, 불안한 세자(세손)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왕이 대리청정을 명하는 경우 폐사된 희빈 장씨가 낳은 경종과 살해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집권 노론의 반대로 왕위 계승이 불안했는데, 이를 염려한 숙종 및 영조의 배려에 의해 대리청정이 시행되었다.
문종과 예종
조선시대에 대리청정을 경험한 세자는 문종, 예종, 광해군, 경종, 사도세자, 정조, 효명세자 등 모두 일곱인데, 세자에 대한 신뢰도, 대리청정을 수행할 세자의 나이와 능력, 그리고 당시의 정국 방향 및 정치세력의 강약 등에 따라 그 유형이 다르게 나타난다.
1 문종 20여 년이나 세자로 있다가 28세라는 장성한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당시 부왕인 세종은 갈수록 병이 악화되고 있어 양위를 염두에 두고 대리청정을 진행시켰다. 따라서 대리청정 과정에서 정치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2 예종 16세의 나이에 청정을 시작했지만 아버지 세조가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세조에게 유일하게 남은 적자인데다 세조 역시 전위를 염두에 두고 대리청정을 진행시켰다. 현왕이 세자를 깊이 신뢰하는 가운데 전위를 전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3 광해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을 떠난 선조는 난이 발생한 지 책 20일도 안 되어 당시 17세이던 광해군을 서둘러 세자로 책봉했다. 선조는 의주로 몸을 피하고 세자는 함경도로 보내 이른바 분조를 단행한 것이다. 분조란 조저으이 관원 및 기능의 일부를 나누어 세자를 국정하도록 한 조처인데, 다시 긴박했던 전란과정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다. 세자로 책봉된 관해둔은 이때부터 분조를 근거로 군사적 활동을 중심으로 각종 국가의 정무를 담당했다.
4 경종 경종은 29세라는 장성한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친모 장희빈은 폐사된 상태였고, 정국의 주도권은 그와 대척인 노론이 장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대리청정은 양위를 전제로 하기보다는 다음 대의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려는 숙종의 의중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5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14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는데, 이 경우는 유능한 군주였던 영조가 몇 년 후 양위를 전제로 대리청정을 시켰다고는 보기 어렵고 후계자 교육이 1차적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6 정조 영조는 죽기 3개월 전 굳이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을 강행했는데, 이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따른 왕위 계승을 불확실성을 해소하려는 영조의 정치적 배려에 따른 것이다.
7 효명세자 효명세자는 당시 순조가 노론에 밀려 정국을 제대로 주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들을 믿고 대리청정을 시킨 만큼 적극적으로 대리청정을 진행시켰다.
광해군과 경종
대리청정 때의 세자는 장래 왕위에 오를 후보자로서 제왕 교육에 전념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국정을 담당하며 결정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권력자다. 왕과 부왕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대리청정기 세자의 입지라고 할 수 있다.
세자가 뭇 신하들과 회의를 통해 정치 현안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거기에 걸맞은 권위가 필요하다. 그런데 왕의 권위가 천명을 받은 존재라는 추상성이나 왕계의 종통을 이어받았다는 정통성을 통해 담보된 것이라면 세자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현재 살아 있는 왕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왕이 대리청정을 세자의 정치교육 및 실습의 일종으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왕정에 버금가는 정치형태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세자가 부여받는 권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와 정조
■ 대리청정의 효용성
세자의 대리청정은 현 국왕이 질병, 연로 등의 원인으로 복잡다난한 국사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 왕위 계승자인 세자가 이를 돕고 그 과정에서 국정 수행능력을 기른다는 명분으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정치를 경험하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른 군주보다는 대리청정의 과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힌 왕의 즉위 초반 국정 운영 능력이 뛰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타당하다. 그렇다면 과연 대리청정을 경험한 군주들은 그런 기대를 총족시켰을까?
대리청정정을 경험한 일곱 명의 세자 중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는 즉위조차 하지 못했다. 이 둘의 사망은 대리청정기의 정국 변동 및 정치세력들과의 갈등 속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왕으로 즉위한 다섯 명 가운데 문종의 재위기간은 2년 3개월이고 예종은 1년 2개월, 경종은 4년 2개월이다. 그나마 정조만이 장기간 왕위를 지켰던 유일한 사례다. 그러나 정조가 대리청정을 한 기간은 3개월 남짓이어서 정조의 통치가 대리청정의 효과에 힘입었다고 말하기는 다소 어렵다. 이러한 결과는 대리청정 경험이 장래 국왕으로서의 직무 수행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
특히 사도세자의 경우는 대리청정의 실패사례로 꼽힌다. 영조대 세자의 대리청정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왕과 세자 사이에 신뢰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조는 약관도 안 된 세자에게 정치를 맡기면서 노회한 정치가 이상의 능력을 요구했고, 세자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자 그를 불신했다. 이런 부왕의 태도에 세자는 더욱 위축되었으며 점점 마음의 병을 키워갔다. 왕과 세자의 갈등은 당시 붕당 간의 갈등과 연결되어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불행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부왕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대리청정은 세자에게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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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 박보검과 대리청정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