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박보검) 조선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
박보검과 김유정 주연의 KBS2 퓨전사극 [구르미 그린 달빛](연출 김성윤)은 동명의 원작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으로 실제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을 더한 팩션사극입니다. 괴팍한 성정의 왕세자 이영(박보검)과 남장내시 홍라온(김유정)을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궁중로맨스인데,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몸살을 앓고 있던 시기입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이며 정조의 손자입니다. 부왕 순조의 건강 악화로 18세에 왕세자에 책봉돼 3년 3개월간 대리청정을 하다가 1827년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데, 짧은 생애에도 여러 권의 문집을 남기고 궁중연회를 직접 관장하는 등 남다른 문학적 감수성과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조선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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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박보검) 조선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은 1, 2회 방송한 것만 보아서는 퓨전사극이라고는 해도 현대적 요소가 지나칠 만큼 가미된 듯한데다 스토리 전개도 코믹해서 아직 좀 어수선합니다. 하지만 김성윤 PD에 따르면 "효명세자 이영의 캐릭터를 원작과 달리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했으며, 사극이라는 익숙한 장르와 남장여자라는 다소 진부해한 소재를 트렌드에 맞게 살려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고 하니 어떤 팩션사극을 보여줄지 기대를 해봅니다.
남장내시 홍라온 역을 맡은 김유정입니다. 부모도, 돈도, 집도 없는 라온은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부터 사내로 살아왔습니다. 연서를 잘 써서 연애 전문 카운슬러로 통하는데, 그런 라온이 어쩌다 궁궐 내시부로 흘러들어가 좌충우돌 소동을 겪은 끝에 끝에 세자 이영의 마음을 흔드는 연인이 됩니다.
죽은이의 행적을 기록해 무덤에 넣은 지문(誌文)에 따르면 효명세자의 외모는 "이마가 융기한 귀상에 용의 눈동자로 모습이 빼어나고 아름다워서 궁중 사람들이 말하기를 할아버지 정조와 흡사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왠지 효명세자 역을 맡은 박보검이 그 모습을 빼닮은 듯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심재우 교수 등이 펴낸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를 바탕으로 효명세자의 삶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박보검) 조선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입니다.
■ 죽고 난 뒤 왕위에 오른 삶
효명세자는 아들 헌종이 즉위함에 따라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대한제국이 서면서 문조(文祖)로 추존되었다. 효명세자의 문집에는 효명세자가 22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10여 년간 쓴 400여 제의 시가 수록돼 있다. 문학적 감수성과 시적 형상화는 역대 왕 중 단연 으뜸으로, 그의 문학적 성취는 조선시대 국왕 중 가장 빼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효명세자의 이름은 영(旲)이고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이다. 어릴적부터 시 짓기를 좋아했으며 18세 무렵부터는 본격적인 경세를 위해 독서에 몰두했다. 문학에 관심이 많던 효명세자가 갑자기 경세의 학문에 전념한 것은 부왕 순조의 명에 따른 대리청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정은 김조순 등 벌열에 의해 왕권이 약화되었고, 순조는 왕권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효명세자는 부왕의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새로운 인사권을 단행하여 외주부인 김조순 계열을 숙청하고 자신의 국정을 보필할 관료를 육성하고자 앴으며,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여러 차례 큰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호적법을 정비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며 형옥을 신중히 하는 데 노력했다.
■ 세자에게 정사를 물려준 순조
효명세자의 부왕인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라 15세에 친정을 시작했지만 마음이 약하고 착하기만 해서 허수아비 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제어할 힘이 없었던 순조는 결국 건강 악화를 핑계로 총명하고 영리한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명한다. 순조는 이미 15세의 효명세자에게 정무를 돌보게 한 적 있었다.
순조가 정사에 흥미를 잃은 것은 민란과 수차례 천재지변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1809년부터 유례없는 가뭄과 기근이 들고 이어서 제주도 민란, 용인 이응길 민란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또 1821년에는 서해안에 전염병이 번져 10만 명이 목숨을 잃어 국정 전반의 혼란은 극도로 심했던 것이다.
■ 조선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
1827년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국정을 돌보는 틈틈이 궁중무용 창작에 몰두한다. 세자의 노력으로 부활한 궁중무용은 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장엄한 무용으로 흔들리던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데 활용됐다. 연산군 이래 조선에서 예악(禮樂)이란 혼군의 상징이자 말세의 표상이었지만, 효명세자는 부왕에 대한 효성을 빌미로 전례 없이 화려한 궁중연회를 주관하면서희미해졌던 군신간의 질서를 바로잡은 것이다.
대리청정을 하면서 자신의 친위세력을 키운 효명세자는 당시 정권을 장악한 외척 안동김씨를 견제해 친위세력으로 하여금 재정을 장악하게 했다. 국가재정을 담당한 호조와 선혜청의 요직을 장악하고 그 동안 소외된 남인과 북인, 소론 계열을 사헌부, 사간원에 집중배치해서 안동김씨가 더 이상 부정부패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즉 재정, 언론, 사정을 모두 장악한 것이다.
대리청정 당시 20대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효명세자가 노련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부왕 순조가 있어서 가능했다. 아들 세도세자와 손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도 인사권만은 넘기지 않았던 영조와 달리 순조는 인사권까지 효명세자에게 전적으로 위임해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1830년 대리청정 말년에 완전히 국정을 장악하지만 아쉽게도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대리청정 3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숨을 거둔다. 효명세자의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갑자기 각혈을 한 지 10일 만에 급사해 독살설도 있다.
선원보감(璿源寶鑑)에 남아 있는 효명세자의 초상화
■ 할아버지 정조에게서 정치적 모델을 찾은 효명세자
효명세자는 학문을 숭상하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표방했던 정조대의 정치방식을 계승하고자 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 서얼을 관료로 등용하는 서얼허통(庶孽許通)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이 그 대표적 예다. 아울러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능행정치 역시 효명세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여 동안 일곱 번에 걸쳐 선왕들의 능(陵)과 원(園)을 참배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실생활과 민심을 파악해서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당시 세도가의 억압 속에 고통받던 백성들은 능행길에 상언(上言)을 하거나 징을 쳐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함으로써 효명세자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효명세자는 정치 운영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정조를 흠모하여 그를 닮고자 노력했다. 정조가 매일의 일과를 업무와 공부, 활쏘기로 나누어 일기에 기록하고 반성한 것을 본받아 이미 대리청정 이전부터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고, 독서와 저술에 힘쓰고 직무에 충실했는가를 매일 반성하고 점검했다고 한다.
반소(半燒)된 효명세자 문조의 어진
한국전쟁 후 큰 화재로 초상화가 불에 탔는데, 얼굴이 타버리고 나머지만 남아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돼버린 효명세자 문조의 어진이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文組翼皇帝)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
이상, 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박보검) 조선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