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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대박 조선의 절대군주 숙종(최민수)의 진면목

 

대박 조선의 절대군주 숙종(최민수)의 진면목

 

 

드라마 [대박]에서는 조선 18대 왕 현종이 세상을 떠나자 14세에 조선 19대 왕좌를 이어받은 숙종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수렴청정도 하지 않고 연로한 대신들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호령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는 즉시 유배를 보내거나 사사하는 등 왕으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과단성 있는 모습을 보였던 숙종은 아버지 현종이 재위 내내 신하들로부터 왕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휘둘렸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고 합니다. 

 

대박 조선의 절대군주 숙종(최민수)의 진면목

 

특히 격화된 서남당쟁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할 만큼 영민했던 숙종은 상황에 따라 남인 혹은 서인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는 이른바 환국정치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나갔습니다. 그 때문에 신하들은 언제 어느 때 왕의 마음이 변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봐야 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숙종이 여인들에게 휘둘리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왕이었다는 인식은 [대박]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릴 것 같습니다. 특히 새로운 진면목을 보여주는 숙종 역을 카리스마라면 누구도 따르지 못할 최민수가 맡아 명품연기를 보여주고 있어서 더욱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지난회에서도 숙종은 숙빈 최씨(윤진서)를 궁지에 몰아넣는 장옥정(오연아)의 머리채를 잡아 궁밖으로 내치는 상상초월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로 알려진 장희빈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도록 만들어준 장본인이기에 장희빈이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다 해도 어떻게 사약까지 내릴 수 있었을까 늘 좀 의문이었는데, 이제까지 잘 다뤄지지 않았던 숙종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니 이제 납득이 갑니다. 이한우의 [숙종]과 [EBS 역사저널 그날 숙종]을 바탕으로 조선의 절대군주 숙종(최민수)의 진면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드라마 [대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장한 조선의 절대군주 숙종

 

 적장자 콤플렉스를 풀어줄 유일한 원자

 

1661년(현종 2) 8월 15일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숙종은 "원자 탄생이야말로 100년 동안에 없었던 큰 경사"라고 말할 만큼 효종 때부터의 간절한 바람을 이뤄주었다. 아들을 몹시 아낀 현종은 조신들 중에서 송시열, 송준길, 김좌명 등을 특별히 뽑아 원자 교육을 맡겼다. 그 후 왕세자에 책봉된 숙종은 1674년(현종 15) 현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당시 나이가 14세밖에 안 돼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허적을 중심으로 한 원상들의 도움을 받아 국정을 이끌 만큼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격화된 서남당쟁과 세 번의 환국

 

숙종의 즉위와 함께 집권한 것은 남인이었는데, 이는 현종이 죽기 전에 갑인예송을 통해 남인들의 손을 들어준 덕분이었다. 남인들은 외척 김석주, 김우명 등과 결탁해 서인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명분상 예론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인의 세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허적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대하는 숙종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경신환국

1680년(숙종 6) 마침내 남인세력이 제거되고 서인이 재집권하게 되는 경신환국이 일어나는데, 이는 천막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해 3월, 탁남의 영수 허적은 조부 허잠이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 도중 비가 내리자 허적의 집에서 큰 연회가 열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숙종은 특별히 궐내에서 쓰는 천막을 가져다주라고 명했다. 하지만 천막은 이미 허적이 허락도 받지 않고 가져간 후였고, 이를 안 숙종은 권력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한 허적과 남인 일당의 행태에 크게 분노했다. 그리하여 곧바로 훈련대장 남인 유혁연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서인 김만기를 앉혔으며, 이를 시작으로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남인들이 대거 파직된 자리는 서인들로 채워졌다. 이로써 서인은 갑인예송 이후 남인에게 빼앗겼던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게 되었다.

 

이렇게 재집권한 서인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해 서로 반목했고, 숙종은 그런 서인들에게 또다시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사이 숙종의 첫부인 인경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한 채 죽고, 계비로 인현왕후가 들어왔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가운데 궁녀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궁녀 장씨는 역관 장현의 조카로 남인 계열이었다. 한때 장씨는 대비 명성왕후에 의해 궐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명성왕후가 죽은 후 인현왕후의 배려로 다시 궐로 들어갔다. 돌아온 장씨는 1686년(숙종 12)에 숙원에 봉해지고 1688년 아들을 낳은 후 희빈에 봉해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더욱 커졌고 희빈 장씨도 덩달아 기고만장했다. 그러자 서인들은 그런 장씨와 주변 인물들을 견제하며 그들의 행실을 문제삼아 비난하기 시작했다. 숙종의 심기는 갈수록 불편해질 뿐이었다. 

 

기사환국

숙종과 서인들의 갈등은 1689년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는 문제로 불거졌다. 숙종은 장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삼아 국본을 세우겠다고 했지만 여러 신하들은 아직 인현왕후의 몸에서 적자가 태어날 기회가 있으니 원자를 정하는 일을 서두르지 말도록 간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5일 후 장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해버렸는데, 이는 서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숙종은 서인들의 견제가 계속되는 한 뜻대로 왕권을 행사하기 힘들 것이라고 여겨 그들을 내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송시열이 원자의 명호를 정하는 것이 너무 성급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이것이 새로운 환국의 빌미가 되었다. 결국 송시열을 비롯한 많은 서인들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경신환국 때 내쳐졌던 남인들이 대거 복귀했다. 이것이 바로 희빈 장씨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기사환국이다.

 

갑술환국

다시 권력을 잡은 남인은 서인에 대한 복수를 시작해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이 사사되고, 서인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가 폐출되기에 이르렀다. 폐비를 반대하는 수많은 상소가 올라왔지만 숙종은 기어이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의 자리에 앉혔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관철시키기 위해 폐비 반대상소를 올렸던 오두인, 박태보 등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장유(杖流)에 처했다.

 

그러나 숙종은 1694년에 이른바 갑술환국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남인을 몰아냄으로써 서인들의 세상을 만들어주었다. 갑술환국은 노론 김춘택과 소론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작되었다. 남인 우의정 민암은 이 사건을 확대해 서인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왕비 장씨가 숙빈 최씨(훗날 영조의 생모)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제기되면서 상황은 일거에 바뀌고 말았다.

 

 

 세자 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서인은 이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반목한 지 오래였다. 서인은 1682년에 일어난 임술년 고변사건(김석주의 사주로 김환, 김익훈 등이 남인의 역모를 고변한 사건)과 태조 존호 가상 문제 등을 거치면서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과 박세채와 뜻을 함께하는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숙종은 고질적인 당쟁의 병폐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국가가 불행해 동인, 서인을 표방한 이래 백년이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고질이 되고 있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좁고 작은데다 문벌을 숭상해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이미 협소하다. 그런데 한쪽이 진출하면 한쪽은 물러나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또 대부분 막혀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면서도 숙종은 서남당쟁을 왕권강화에 이용했던 것처럼 노론과 소론의 대립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세자의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격화되었다. 세자가 사사된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것이 원인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세자는 지위를 위협받게 되었다. 이때 소론이 세자의 보호를 자청하고 나섰다. 소론이 희빈 장씨와 세자의 외숙인 장희재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릴 것을 숙종에게 요청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노론은 이것을 빌미로 소론을 탄핵했다. 그리하여 희빈 장씨와 장희재가 사사된 후 소론의 남구만 등이 파직되기도 했다.

 


 병권 강화와 오군영 체제 확립

 

숙종은 격화된 서남당쟁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병권을 장악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한 영민한 왕이었다. 조선 후기 중앙의 군사제도의 핵심은 오군영 체제다. 숙종은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에 금위영을 더해 오군영 체제를 확립하고 수도와 외곽의 방어를 담당시켰다. 훈련도감을 제외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은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서인 공신들이 자신의 사병을 국왕을 호위하는 수도 방위 병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창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인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병권 장악은 곧 권력 장악을 의미했다. 그러다 현종 말에 이르러 남인 유혁연이 훈련대장에 임명되면서 남인들도 병권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서인들이 발족한 정초청에 반발해 훈련별대를 창설했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집권한 남인은 병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고,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총융청과 수어청의 병권은 여전히 서인들에게 있었다. 이에 남인들은 효종 때 전란에 대비하고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가 현종 때 폐지되었던 도체찰사부를 복설했다. 그러나 숙종은 어느 한 당파에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도체찰사부의 복설을 허가하면서도 부체찰사 자리에 서인이자 외척 김석주를 앉혔다. 김석주는 수어사를 겸하고 있었다. 숙종은 병권을 외척에게 위임함으로써 어느 당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세력균형을 유지했던 것이다.

 

한편 1680년에 일어난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중앙 군영의 대장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모두 교체되었다. 김석주의 군사적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1682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금위영의 창설을 주도했다. 금위영은 훈련도감, 훈련별대, 정초청의 병력 일부를 흡수해 궁성 숙위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금위영의 설치로 조선 후기의 오군영 체제가 확립되었고, 숙종은 든든한 병권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조선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숙종 

 

숙종 24년 한발, 수재, 풍재, 상재 등으로 기근이 잇달아 드는가 하면 남와의 계절에 불볕이 내리쬐고 유화월에 서리가 내리는 등 3년 동안 큰 흉년에 똑같은 재해가 발생했다. 숙종 21년~ 24년 대기근 발생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숙종은 대기근에 대처하여 청에서 쌀을 수입해 기근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서인들은 오랑캐의 쌀은 먹을 수 없다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것은 온 나라 백성들을 위하여 만부득한 것이라며 강력한 의지로 쌀을 수입하도록 관철시킨다.

 

또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려 하자 처음부터 준엄하게 막을 것을 명했으며, 백두산이 우리 영토로 확정된 것도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 근거를 제공한 것도 숙종 때였다. 병자호란 이후의 전란으로 혼란해진 조선의 기틀을 다시 세운 왕이 바로 숙종이었던 것이다. 16~17세기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발전하는 시기에 사회적 시스템을 마련한 숙종은 광해군 때의 대동법을 100년 만에 전국적인 대동법 시스템으로 완성했고, 공인화폐가 유통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상평통보는 1678년부터 조선 말까지 유일한 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시켰는데, 단종의 경우 폐위 후 노산군이라고 해서 대군이라고도 불리지 못했던 것을 알고 단종이라는 묘호를 내려주었다. 무려 242년 만의 일이었다. 인조 수라에 독을 탔다는 혐의로 사사됐던 세자빈 강빈이 민회빈(愍懷嬪)으로 복원된 것도 숙종 때였다.

 

 

 조선 절대권력의 불꽃, 사그라지다

 

숙종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지 3년째 되던 해인 1720년 깊어진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결국 숙종 생전에 세자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리청정을 했던 세자가 그대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당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각 당파 사이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숙종은 물을 신하로 표현해서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신하들이 잘못하면 임금이 잘못될 수 있다"며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왕이었다. 다만 너무 쉽게 마음이 변해 여러 번의 환국을 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상, 대박 조선의 절대군주 숙종(최민수)의 진면목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