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 조선의 반란자 이인좌의 난 옥좌만이 썩은 조선을 바꿀 수 있다
새로 시작한 SBS 팩션드라마 [대박]은 조선의 반란자 이인좌(전광렬)와 조선판 타짜 백대길(장근석)이 눈이 내리는 장기판 앞에 마주앉아 무시무시한 기싸움을 벌이는 것으로부터 포문을 열었습니다. 이인좌는 광기어린 눈빛과 표정으로 “병졸의 희생 없이 어찌 왕을 잡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대의를 위한 희생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옥좌만이 이 썩은 조선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대박 조선의 반란자 이인좌의 난 옥좌만이 썩은 조선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역시 카리스마 어린 표정으로 “백성을 무시하는 왕은 필요없다”며 강하게 맞서는 대길에게 “굳이 네가 막아서겠다면 너 또한 가차없이 벨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내뱉습니다. 이어서 이인좌가 역모를 일으키고, 드라마는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의 반란자이자 훗날 스스로 대원수가 되는 이인좌는 조선 영조 즉위 4년(1728년)에 역모사건을 일으킨 실존인물입니다. 이인좌의 난, 일명 무신란은 6일 만에 평정됐으며 이인좌는 대역죄로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드라마에서는 가문의 복수를 위해 숙종과 대립하는 반대세력의 수장으로서 왕권을 차지하려 하는 야심찬 캐릭터로서, 훗날의 역모를 위해 팔도의 투전방을 기반으로 자금을 모으는 주도면밀한 인물입니다. 돈을 통해 모든 권력을 쥐고, 왕도 돈이 있으면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그에겐 돈이 곧 권력입니다.
한편 이인좌와 대립각을 세우는 숙종은 흔히 여인들의 치마폭에 싸여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나약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어도 연로한 대신들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큰소리를 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는 즉시 유배를 보내거나 사사하는 등 과단성 있는 모습으로 강력한 왕권정치를 펼쳤다고 합니다. 최민수가 숙종 역을 맡았는데, 좀 느끼한(? ㅎㅎ) 느낌이 들긴 하지만 최민수 특유의 카리스마로 멋진 연기를 펼쳐보여 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이성무의 [조선국왕전]을 바탕으로 알아본 대박 조선의 반란자 이인좌의 난 옥좌만이 썩은 조선을 바꿀 수 있다입니다. [대박]의 큰 한 축을 이루는 이인좌와 이인좌의 난(무신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으면 드라마를 좀더 재미있게 시청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대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 조선의 반란자 이인좌
조선의 반란자 이인좌는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출생지나 관직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남인이었던 그는 북벌정책을 주도한 대학자 윤휴의 손녀사위로 당파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할아버지 이운징이 파직되고 큰할아버지 이의징까지 사사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그리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권력에서 밀려났고, 당시 함께 몰락한 소론파와 불평분자를 규합해 난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 이인좌는 청주성을 습격하고 병사들을 모은 뒤 스스로를 대원수라고 일컬으며 경종의 죽음에 대한 독살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소론의 원로였던 최규서가 이인좌의 난을 당시 조정에 알렸고 반란 발발 6일 만에 평정됐다.
■ 이인좌의 난(무신란)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이라고도 불리는 <이인좌의 난>은 1728년 영조 4년 호서의 이인좌를 비롯하여 호남의 박필현, 영남의 정희량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이었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로 구성된 주동자들은 경종 독살설에 빠져 있었다. 이들에게 영조는 불법으로 왕위를 차지한 역적에 불과했는데, 을사처분으로 신임옥사가 무옥처분을 받은 것에 분개해 반란을 도모한 것이었다.
이들은 경종에 대한 충성을 다하다가 처단된 김일경과 목호룡의 가족들과 교류하며 무신당을 조직해 반란군의 규모를 키웠다. 그런데 반란 직전에 변수가 생겼다. 1727년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영조의 정미환국으로 인해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소론이 집권한 상태에서는 반란의 명분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반란 주동자 중 한 사람인 박필현이 태인현감으로 부임하게 돠자 반란군의 한 축이 약화됐으며, 반란군 내부에서도 좀더 사태를 관망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신중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논의 끝에 일단은 이인좌를 중심으로 지방에서 먼저 거병하고 수도에서 이에 동조하는 방식으로 거사를 치르기로 전략이 정해졌다.
1728년 3월 15일 마침내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인좌는 충청병사 등을 살해하고 "독살된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坦)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사방에 붙였다. 반란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각처에서 반란에 가담할 사람들을 데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군중에는 경종의 위패를 모셔 경종 독살을 공공연히 표방했다.
3월 20일, 영남의 정희량 등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예정된 거사일보다 늦게 안음에서 거병하고 곧바로 거창, 합천까지 점령했다. 사기가 높아진 영남 반란군은 이인좌의 반란군과 합세했다. 하지만 호남에서는 박필현이 뒤늦게 군대를 일으켰으나 동조하기로 했던 전라감사 정사효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반란군의 북상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도성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반란군에게 내응할 만한 소론 강경파와 인사들을 미리 체포하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다. 결국 이인좌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소론 온건파인 오명항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해 3월 26일 이인좌는 역모를 자백한 뒤 대역죄로 능지처참당했다,
이상, 대박 조선의 반란자 이인좌의 난 옥좌만이 썩은 조선을 바꿀 수 있다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