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병법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의 필승전략
자신의 세력이 강하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상대에게 들이대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상황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잘 선택하는 것이 승리를 거두는 기본원리입니다. 경영현장에서도 힘이 약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기기 어려울 때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정석대로 싸우는 것이 강한 자들의 전략이라면, 약자는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약자의 필승법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이기는 법을 들려주고 있는 [안계환의 인문병법] 중 알렉산더와 나폴레옹, 아라비아의 로렌스등 승리를 예측할 길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필승전략으로 이긴 히든챔피언들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스스로 약하다고 움츠린 채 도전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다윗들에게 자신만의 필승법으로 강한 골리앗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입니다. 인문병법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의 필승전략입니다. [안계환의 인문병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인문병법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의 필승전략
유럽인들이 대왕으로 치켜세우는 첫번째 인물인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인 33세에 죽었음에도 그가 이룩한 나라는 무너지지 않고 후대로 이어졌다. 20세에 왕위에 올라 겨우 13년 동안 엄청난 영토를 정복하고 짧은 기간 나라를 다스렸을 뿐인데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알렉산더의 제국이 사후에도 300년 동안 지속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전투에서만 승리를 거두었던 게 아니라 전략적 차원에서 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의 목표는 바다 건너 페르시아였다. 그는 3만 5천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편성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 반도로 진군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기선을 제압했던 이 싸움이 승리로 끝나자 동쪽으로 가서 페르시아군의 뿌리를 뽑는 대신남쪽으로 군대를 이끌어 페니키아인이 구축한 해상거점으로 이동했다. 육지를 확보한 후 주요 항구를 배후에서 공격함으로써 페르시아 해군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시리아를 가로질러 이집트로 들어가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압제에 신음하던 이집트를 해방시켰다. 페르시아의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처였던 이집트 삼각주를 점령함으로써 자신들의 배후기지를 확보하고 적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이었다.
그는 전쟁 대신 정치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점령지역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지 궁리했다. 각 지역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여 그대로 살게 해주고 대신 세금을 내도록 하는 관용방식을 채택했다. 그의 관대함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각 도시들은 앞다투어 알렉산더 제국의 품으로 들어오기를 원했고, 이는 싸우지 않고도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쪽 인도까지 정벌하고 돌아와서도 그리스 문화를 강요하지 않고 페르시아 제도를 흡수하려 노력했다. 각 지역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페르시아 여인들과 장수들의 결혼을 장려하며 백성들이 익숙한 페르시아 방식의 정치체제 구축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전의 통치자들과 달리 영토를 늘리기보다는 체제 안정을 꾀한 후 다음 단계로 확장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넘사벽이라 해도 특정부분을 공략당하면 싸울 의지를 잃고 무너져 버린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지휘관은 상대의 약점을 공략할 줄 알았다. 근대의 가장 뛰어난 리더 중 한 명인 나폴레옹도 그런 사람이었다. 나폴레옹은 책을 많이 읽어서 엄청난 지식을 쌓았고 여기에 지도를 즐겨 사용할 줄 알았다. 어떤 지점을 공략해야 할 경우에는 사전에 부관과 함께 지도를 펼쳐놓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적군은 어떤 동선으로 이동할 것인데 아군은 어떻게 대응할지, 눈앞에 있는 고지는 어떤 방식으로 점령할지를 끊임없이 구상했다.
나폴레옹이 출세길을 열게 된 최초 사건은 1793년 프랑스 남부에 있던 항구도시 툴롱 포위전이었다. 이 싸움에서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툴롱항구를 바라보고 있던 레귀예뜨(l’Éguillette) 요새를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26세의 포병장교였던 나폴레옹은 지도를 보자마자 이를 단박에 알아차렸고 모든 전력을 기울여 이곳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영국-스페인 연합 함대를 쫒아내기만 하면 툴롱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본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몇 문 되지 않은 대포들에 만족하지 않고 툴롱 인근 병기고를 샅샅이 뒤져 대포와 탄약을 확보했고, 전직 포병장교들을 징집했다. 이렇게 확보된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포병 전문가답게 단계적인 진지를 구축하여 핵심요새들을 하나씩 공략해 갔다.
결국 이렇게 단계적으로 포병전력을 이동시킨 결과 영국군은 나폴레옹 최초의 타깃이었던 레귀예뜨 요새를 포기했고, 그 결과는 나폴레옹이 예측한 대로였다. 항구에 직접 포격이 가능한 위치에 프랑스군이 진출하자 영국-스페인 연합함대는 철수를 결정했고 툴롱의 외곽을 방어하던 왕당파 세력도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 탁월한 정치적 책략과 전략적 위치를 읽는 혜안,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는 실행전략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던 나폴레옹의 앞길이 훤히 열리는 순간이었다.
전략적 침투를 실행시켰던 유명한 인물의 하나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로렌스가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군에 맞서 아랍인들을 이끌고 거친 사막을 가로질러 홍해에 있는 아카바 항구를 점령했다. 이로써 터키군은 전략상 큰 타격을 입었으며 터키에 비해 시종 열세였던 영국군에게 승기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의 사막을 돌파한 것은 로렌스의 용기와 탁월한 지략 덕분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로렌스는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육군 정보부에 파견되었다. 그는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터키와 어쩔 수 없이 협조하고 있는 아랍인과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이 터키를 이기기 위해서는 아랍인에게 힘을 실어주고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독립을 도와주는 것이 가장 옳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국정부를 설득해 아랍부족을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만들게 한 후 자신은 부족장 파이잘을 만나 영국군이 전투를 위한 지원과 전쟁 후 그들의 독립국가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파이잘의 부하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자 아랍 왕족처럼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었고 아랍어로만 말하고 아랍 음식만 먹었다. 그리고 아랍인처럼 낙타를 타고 맨발로 다니며 아랍인처럼 바닥에서 자고 아랍인처럼 행동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아랍인으로부터 존경을 얻었고, 결국 그는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로렌스가 바라본 아랍전쟁 전략으로 볼 때 터키군의 가장 중요한 핵심지역은 홍해 연안에 있는 아카바 항구였다. 터키군은 이곳이 완벽하게 요새화된 항구여서 바다로부터 오는 어떤 공격도 격퇴할 수 있었기에 안전하다고 여긴 반면, 아카바와 아랍군은 수백 마일 사막이 있기 때문에 육상공격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터키군의 이런 생각을 잘 알고 있었던 로렌스는 아랍인들과 함께 이 불가능한 일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아카바 침투작전이다. 그곳은 중간에 오아시스를 만나기 어려운 죽음의 사막이었다. 로렌스와 아랍군 5백여 명은 각자 물가방과 거친 빵을 만들 밀가루를 지참하고 사막을 건너기 시작했다. 중도에 아바 엘 키산이라 불리는 터키군 진지를 만나 그곳을 공격해 보급품을 확보했다. 점점 자신감이 붙은 그들에게 주변에서 살던 아랍인이 합세했고, 아카바 터키군 요새에 도달했을 때에는 약 천 명의 병사가 모여들었다. 그렇게 요새 성벽에 도달하자 그는 터키군과의 교전대신 협상을 벌여 터키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목민 중에서도 활을 유효한 무기로 가장 잘 썼던 사람들은 칭기즈칸 시절 몽골족이었다. 특히 그들은 장거리 궁술을 포위된 적들을 섬멸하는 데 잘 사용했다. 이는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적 보병들을 목표로 곡사포처럼 활을 쏘는 방식이었다. 아직 적이 가까이 있지 않았는데 하늘을 까맣게 덮고 날아오는 화살을 맞아야 했던 유럽 병사들은 자제력을 잃기 십상이었다.
장거리 궁술을 잘 쓰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거리와 정확성이란 반비례 관계였는데 몽골 궁사들은 이러한 모순된 요구를 잘 소화했다. 몽골인들은 평소 멀리 떨어진 표적을 맞추는 훈련을 자주 했다. 몽골에서 발견된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칭기즈칸이 연 축제에서 왕족 중 하나가 무려 536미터 표적을 맞추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활과 화살이 있다고 해도 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군사적 역량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몽골군은 모두 기마병이었기에 말을 타고 활을 쏘는 훈련을 평소에 익혀 두었다. 카바크(Qabaq)라는 이름을 가진 훈련은 말을 타고 달려가면서 기둥에 묶인 호리병 바가지를 쏘아 맞추는 것이었다. 기둥 높이는 조절이 가능했기 때문에 목표물이 달라지는 전장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집단적으로 활을 쏘면서 전진하고 먼저 전진했던 부대는 퇴각하는 기마전술 카라콜 (Caracole)은 유목 군사 집단의 특기였다. 몽골족보다 앞서 만주지역을 평정했던 거란족들이 썼던 이 전술은 적 보병부대와 직접 창칼로 부딪치지 않으면서도 적을 섬멸할 수 있었던 몽골 기마전사들의 특기였다.
쿠바를 떠나 600여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멕시코 동부해안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멕시코 원정대 지휘관으로 임명해 준 쿠바 총독 디에고 데 벨라스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급하게 떠나왔지만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야하는 멕시코 땅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겨우 600명 뿐인 병사로 50만이 넘는 아즈텍인들을 상대해야 하며 그들은 포로의 살을 먹고 가죽을 전리품으로 삼아 옷을 해 입는다는 무시무시한 전사들이었다. 여기에 숱한 질병과 군수물자 부족까지 감내하면서 과연 그들이 금을 차지하고 쿠바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코르테스가 결정적인 행동으로 옮긴 계기는 어느 날 밤 선원 하나가 막사에 찾아온 길이었다. 선원은 자신이 음모에 가담했으며, 음모자들이 선박을 탈취해 쿠바로 돌아가 벨라스케스에게 코르테스의 행동을 일러바치려 한다며 용서를 빌었다. 그는 그날 밤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부하들 마음은 내륙으로 공격해 들어갈 경우 닥칠 위험과 이를 피해 도망칠 수 있는 항구에 정박한 배들에 있었다. 병사들에게 선박은 언제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후의 버팀목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내린 코르테스의 결정은 배수진, 바로 선박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마음을 정리한 코르테스는 다음날 아침 우선 주모자 둘을 잡아 교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조타수들에게 뇌물을 주어 모든 배에 구멍을 뚫게 한 후 갑판을 벌레가 먹어버려 항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병사들에게 공표했다. 그러자 선원들 마음에는 비장함이 감돌았고 돌아가겠다고 외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후 코르테스와 그의 병사들은 오직 아즈텍을 정벌하겠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쳤다. 불평불만과 이기심이 사라졌고 자신들의 위험한 상황을 인지한 그들은 무자비하게 싸웠다. 물론 엄청난 숫자를 가진 아즈텍 황제 목테수마의 바보 같은 행동에 의해 멕시코가 정벌되었지만 코르테스 부대의 용맹함도 한몫했던 것이다.
이상, 인문병법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의 필승전략이었습니다. 흥미롭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