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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육룡이 나르샤 정종 이방과 왕자의 난 속에 왕위에 오르다

 

육룡이 나르샤 정종 이방과 왕자의 난 속에 왕위에 오르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등 여섯 인물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다룬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는 이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둘째부인 신덕왕후 소생의 어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일과 이 일로 인해 빚어질지도 모르는 만일의 위험을 막기 위해 사병혁파에 나선 정도전의 행동은 특히 이방원(유아인)의 도발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됩니다. 

 

역사의 진실이 어떻든 [육룡이 나르샤]에서 보여지는 대로라면 방원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쫓길 대로 쫓기다가 이제 돌아서서 고양이에게 덤벼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아니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권력 앞에서는 부모자식도 없고 형제도 거들떠보지 않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듯합니다. 그들이 날새는 줄 모르고 벌이는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벼랑끝 싸움은 죽음을 향한 총칼이 번뜩이는 전장(戰場) 아닌 전장을 방불케 합니다.

 

육룡이 나르샤 정종 이방과 왕자의 난 속에 왕위에 오르다

 

결국 이런 상황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만드는 촉발제가 되고, 드디어 방원은 무휼(윤균상), 방간(강신효), 적룡 스님(한상진)과 함께 이숙번의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늦은 밤까지 명나라 요동정벌을 위해 고심하고 있는 정도전을 척결하기 위해 출격합니다. 이 순간을 위해 반촌에 미리 숨겨두었던 무기와 최고 무사 무휼을 등에 업은 방원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무시무합니다. 

 

 

그런데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성계의 둘째아들 영안군 이방과(서동원)는 어디에 있었을가요? 그는 소격서(昭格殿)에서 아버지 태조의 건강을 빌고 있었다고 합니다. 방원이 일으킨 난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측면지원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방원은 자신의 쿠데타를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하고자 세자 자리를 굳이 둘째형 방과에게 넘깁니다. 그 후 왕세자 방석과 무안군 방번, 사위 흥안군 이제(李濟)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한 달 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정종입니다.

 

조선 초대 왕 태조와 3대 왕 태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2대 왕 정종에 대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이성무의 [조선국왕전]을 바탕으로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정종 이방과 왕자의 난 속에 왕위에 오르다입니다. 왕자의 난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정종 이방과 왕자의 난 속에 왕위에 오르다 

 

 

1357년(공민왕 6) 이성계와 첫부인 신의왕후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난 정종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전인 1377년(우왕 3) 아버지를 도와 왜구토벌에 나섰으며 1389년(창왕 1)에는 절제사 유만수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고 1390년(공양왕 2)에도 지밀직사사 윤사덕과 함께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적극 가담해 그 공로로 공신에 책록됐으며 장남 방우가 역성혁명에 반대해 아버지와 척을 진 후로는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했다.

 

조선 건국 초기의 비극은 태조와 전처 왕자들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태조가 둘째부인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 방석을 세자 자리에 올림으로써 첫부인 신의왕후의 아들들과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태조의 신임을 얻어 정권을 장악한 정도전이 병권까지 장악하자 개국공신에서 소외된 왕자들과 종친 세력의 불만은 불안으로 변해갔다. 사병혁파로 손발이 묶인 무인세력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커져가던 불만은 정안군 방원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터져나왔다. 

 

 

제1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즉위

 

당시 태조는 병중이었다. 조선 건국에 온 힘을 기울인 탓에 기력이 급격히 쇠한 것이었다. 게다가 사랑하던 신덕왕후가 두 해 전에 죽고 난 후로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애통한 마음에 조석으로 절에서 재를 올리느라 심신이 고단했던 것이다. 태조는 병중에도 궐 안에 있는 신덕왕후 소생의 두 아들만 챙겼다. 그러던 중 정도전이 궐 밖 왕자들에게 태조가 피접을 가기 전에 병문안을 하러 들어오라고 했다.

 

이방원은 이를 혁명의 계기로 삼았다. 무방비 상태로 궐 안에 순순히 들어갔다가는 정도전 일파의 무장병력에게 당할 것이 분명하니 역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방원의 거사에는 태조의 셋째아들 방의와 넷째아들 방간이 적극 동참했고, 여러 종친과 무인들이 합세했다. 부인 민씨 일가와 이숙번도 열심히 도왔다.

 

 

이방원은 난을 일으키기에 앞서 세자 방석의 동복형 방번을 조용히 불러 "나와서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 종말에는 저들이 너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렀다. 그러나 방번은 방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막료들이 곧 자기를 세자로 삼겠다는 말을 곧이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방원의 말을 무시했던 방번은 동생 방석과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방원은 시위군의 군사를 접수하고 도평의사사를 소집해 강제로 정도전 등이 난을 일으켜 선참후계(先斬後啓)했다고 태조에게 보고하게 했다. 이러한 작전이 먹힌 것을 보니 방원에게 천운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결국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인 방번, 신덕왕후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가 죽임을 당하고 경순공주는 이듬해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자리가 공석이 되자 상당수의 대소신료들은 정안군 방원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이미 방원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방원은 적장자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고 영안군 방과가 세자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결코 허수아비 왕이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왕권 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우선 한양을 버리고 옛 도읍인 개경으로 다시 옮겨갔고, 벼슬 청탁 관습인 분경(奔競)을 법으로 금지하는 분경금지법을 시행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을 구제하기 위한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하는 등 개혁적인 제도를 마련했다. 또 문신을 집현전에 모이도록 하여 무신의 힘을 견제했고, 승려의 민가 출입을 금하고 한성에 오부학당을 설치하여 국정교학으로 채택한 유학을 강력히 확산시켜나갔다. 왕족, 권신 등이 양성하던 사병을 폐지하여 삼군부에 편입하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첬다.

 

정종은 집권초기 신하의 나라가 아닌 왕권의 나라를 구축하면서 무력통치가 아닌 문치시대임을 천명한 영민한 왕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가는 데 방원의 존재는 큰 부담이 되었다. 비록 동생이긴 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정국의 주도권을 방원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방원 스스로 세제(世弟)가 아닌 세자(世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자신이 태조의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정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정종의 정치적 생명은 그만큼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정치적 의중

 

한편 1400년(정종 2) 1월에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은 태조의 넷째아들 방간이 박포 등과 함께 동생인 방원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종에게는 정비 정안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없었고, 그런 와중에 방간은 아버지의 허락만 받는다면 자신도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원이 버티고 있는 한 방간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뜻을 이루려면 방원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포는 선수를 치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태조의 이복동생 이화(李和)를 비롯한 종친들이 먼저 나서서 방원에게 방간을 제압하라고 했다. 이미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복형제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력이 있던 방원은 동복형을 상대로 또다시 칼을 뽑아들어야 한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방원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군사를 움직여 방간을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정종은 방간이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에게 칼을 겨눈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당장 그만둘 것을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종의 태도와 달리 왕의 군사들 중 일부가 방간의 궐기에 참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설에는 정종이 그들을 보내 방간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고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실제 의중이 어떠했든 이 일로 정종은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결국 용상이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던 정종은 1400년 2월 방원을 세자로 책봉한 데 이어 그해 11월 세자에게 양위하는 교서를 내리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격구 등으로 소일하면서 살다가 1419년(세종 1) 인덕궁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종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태종 때문에 사후에도 오랫동안 묘호를 받지 못하다가 1681년(숙종 7)에 이르러서야 추존되어 묘호를 받았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정종 이방과 왕자의 난 속에 왕위에 오르다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