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반촌 치외법권 지대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이방지(변요한), 무휼(윤균상), 분이(신세경) 6명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그려나가는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최근 이방원과 정도전이 <제1차 왕자의 난>을 불러오는 일촉즉발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살벌하기 그지 없는 상황입니다. 한편 이 위태위태한 와중에서 반촌(泮村) 우두머리 행수(行首)가 된 분이는 다부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반촌과 반촌 사람들을 세심하게 돌보고 있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반촌 치외법권 지대
반중(泮中), 관동(館洞)이라고도 불리는 반촌은 조선시대에 한양 성균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입니다. 성균관 노비로 알려진 반민(泮民)들이 살던 이곳은 조선 후기에 한양의 도살 면허를 독점한 '서울의 게토'라고도 일컬어집니다.
행수 분이는 성균관에서 도둑이 드는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으로 반촌 사람이 지목되자 당당하게 “반촌은 어명 없이 관군이 진입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하며 관군의 출입을 막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의 육룡 중 한 사람다운 면모가 엿보이는 분이입니다. 어명 없이는 관군도 진입할 수 없었던 치외법권 지대 반촌에 대해 EBS 역사채널 [그들만의 세상 반촌]을 바탕으로 좀더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 치외법권 지대 반촌
조선시대 500년 동안 엄격히 금한 세 가지가 있었는데, 소나무 벌채와 살인, 양조였다. 그러나 어떤 중죄에도 처벌을 면할 수 있었던 특별한 공간이 있었는데, 바로 반촌(泮村)이었다. 조선시대에 한양 성균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촌은 외부인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은 하나의 별천지였다.
성균관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신 신성한 곳으로 포교가 함부로 출입할 후 없었는데, 성균관과 가까운 반촌 역시 죄인이 들어가도 왕의 특명 없이는 체포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포교가 반촌에서 도둑을 잡았는데 성묘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게 했으니 해당 포도대장을 파직하시오" 하니 허락했다고 실려 있다.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세운 조선 최고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은 반궁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반궁(성균관) 학생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 제공된 전속 노비는 반인(泮人)으로 불렸는데, 반인은 성균관 주변에 살면서 특별한 마을 반촌을 형성한다.
반촌은 기숙사의 정원이 넘치면 유생들의 하숙촌으로, 과거철이면 수험생들이 머무는 숙박촌으로, 또한 성균관에서 금지된 천주교 경전 등 새로운 학문을 나눌 수 있었던 토론장이자 바둑, 장기 등 금지된 놀이를 즐기며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 있었던 특별한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황윤석의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에 따르면, 성균관 근처 저잣거리의 음식점에서는 다른 곳보다 싸게 콩죽도 팔고 국밥과 인절미도 팔았는데, 반촌은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킨 조선 최초의 대학가였다. 뿐만 아니라 한성부 내 특별한 구역인 반촌의 반인들은 노동 동원에서도 면제됐다.
그러나 반인은 성균관만의 전속 노비로서 자유로운 이주 및 소속 변경이 불가능했고 반촌 또한 외부인의 유입이 제한된 통제의 공간이었다. 더욱이 성묘 관리 및 유생들에 관한 모든 업무를 감당해야 했던 이들은 어린 자식부터 집안 대대로 일함은 물론 때로는 과중한 세금까지 바쳐야 하는 노비 중 가장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괴롭고 무거운 역으로 성균과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사람이 7명을 넘으니 정말 가련하다"고 씌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의 도살을 금지했던 조선에서 성균관 내 소고기 공급을 위해 받은 도살 및 판매(정육점) 독점권은 조선 후기 신분제 폐지와 함께 반인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고 국가의 인재양성이라는 명분 아래 양반만의 교육을 위해 살았던 그들은 1910년 반촌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지금의 혜화초등학교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반촌 치외법권 지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