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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과 제1,2차 왕자의 난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과 제1,2차 왕자의 난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이방지(변요한) 등 여섯 인물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다룬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 30회에서는 정도전이 자신과 전혀 다른 이념을 가진 것을 큰 혼란과 충격에 휩싸인 이방원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지금까지 이방원이 정도전을 스승으로 여기며 적극 따랐던 것은 혼탁하기 그지 없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신조선을 건국한 아버지 이성계 곁에서 백성들을 웃게 하고 그들의 꿈을 지켜주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 즉 정치를 잘해보기 위해서였는데, 정도전이 정몽주(김의성)와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다가 정도전이 그리고 있는 신조선의 그림에는 자신이 설 자리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과 제1,2차 왕자의 난

 

정몽주를 만난 정도전은 신조선 건국의 이념을 말하며 "새나라 군왕은 법 위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어야 한다. 우먼저 새나라 군왕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고, 성리학에 도통한 신하들과 토론하고 쟁명하는 경연을 제도화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왕은 어떤 신하도 사적으로 독대할 수 없는데, 이는 사적인 만남은 사심을 키우게 되고 그 키워진 사심이 그릇된 결정을 낳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왕은 어떤 사유재산도 가질 수 없으며, 재상을 선택하는 권한 외에 어떤 인사권도 갖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정몽주가 “그러면 이 나라에서 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묻자 정도전은 ”왕은 그저 이 나라의 꽃일 뿐이다. 뿌리는 오직 이 땅의 유자(儒者), 즉 유학을 공부하는 자들이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세습은 패악을 낳기 때문에, 세습받는 신분이 아닌 오직 자기 실력을 갈고닦아 인정받은 사대부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왕족과 종친은 어떤 경우에도 정치에 참여치 못하도록 할 것이고, 건국이 되면 종친으로부터 모든 권리와 힘을 빼앗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자신의 뜻을 단호하게 밝힙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정도전의 말에 표정이 급변한 이방원은 새 나라가 세워졌다 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데 분노합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자넨 그걸 절대  못 참을걸”라던 하륜(조희봉)의 말도 떠오르고 또 홍인방(전노민)이 "너는 약해빠진 자신을 오래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라던 말도 떠오릅니다. 결국 이것은 이방원이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칼바람을 불러오는 큰 불씨가 됩니다. 역사 대중화의 기수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태종 이방원과 제1,2차 왕자의 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태종 이방원과 1,2차 왕자의 난

 

태종 어진(효령대군 기념관에서 제작.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제1차 왕자의 난

 

태조는 장수시절 처로 맞이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에게서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의 6남을 두고 개경에서 새로 맞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에게서 방번과 방석 2남을 두었다. 그런데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혹은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조선건국 이후 개국공신들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되었다. 1392년 의흥삼군부 설치를 계기로 하여 정도전을 중심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병권집중 운동과 중앙집중화 정책은 권력구조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개국공신 중에서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되었고 왕실세력, 개국 핵심세력인 무장세력들은 정치일선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개국 과정에서 이성계보다 자신이 더 개국의 주역임을 내세우운 정도전은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는 물리력에 의해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했고 실제로 그 혁명논리에 따라 왕조교체를 수행했다. 또한 재상을 최고의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체제를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보았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관은 신권(神權) 중심의 왕정이라는 점에서 왕족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도전은 세자 방석과 왕후 강씨를 끼고 있었다. 조선 개국 이후 방원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지만 정계 복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1396년 최대의 난적이자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세력인 강비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 복귀 노력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그간 꾸준히 병권집중 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정도전은 왕족들이 사병을 통수하고 있는 한 병권이 정부로 모아질 수 없다고 보았고, 방원은 사병을 잃을 경우 완전히 힘을 빼앗기고 말 처지였다. 말하자면 사병은 방원의 마지막 보류였던 셈이고, 정도전은 사병만 해체하면 정적의 기세를 완전히 제거하는 셈이었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세자 책봉문제로 불만이 팽배해진 상태였고 게다가 계모 강씨마저 이미 죽고 없는 상황이었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태조는 이때 병중이어서 내막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하고 있다가 뒤늦게 방석, 방번 형제가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는 무척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방원이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은 극구 사양했다. 이에 따라 장남인 방우가 1393년에 이미 병사하고 없었기에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방과가 비록 세자에 책봉돼 왕위를 넘겨받긴 했지만 실권은 방원에게 있었다. 방원 일파는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 체제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한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강화를 위해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것은 훗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위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이들을 조기에 진압했고 이 일로 방원은 세자의 자리를 확보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왕위 계승과 권력다툼에서 비롯된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변화되어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방원의 동복형제들은 여젼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세력이 방원에게는 만만치 않은 위협요소였다. 특히 넷째형 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방원은 이들 형제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하던 병권집중 운동을 이어받아 다른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 쪽으로 흐르자 방간은 시기심과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그 말의 진위도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한 장본인으로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논공행상 과정에서 1등공신에 피봉되지 못했음을 불평하다가 도리어 귀양살이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평소 방원에 대해 품고 있던 원망을 이 기회에 풀어보고자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밀고를 한 것이다.

 

방간은 박포의 말을 확인하지도 않고 분기탱천하여 사병을 동원해 방원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방간은 방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형제들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방원을 지원하고 있었다. 개성 한복판에서 형제간에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방원의 승리였다. 싸움에서 패배한 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당하고, 박포는 붙잡혀 사형당하는 것으로 방간의 난은 막을 내렸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에 대한 반대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방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결과적으로 방간의 난은 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조정 내 방원 세력은 방원의 왕위 계승권 확보를 위해 전력을 쏟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 판도는 물론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권력이 방원에게 집중되면서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방간의 난이 수포로 돌아간 후 조정 대신들은 수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 방원은 오히려 방간이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방원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 치세 때도 방간에 대한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방원과 세종은 이를 거부했다. 적어도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방원의 강한 형제애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방원이 정종의 동생임에도 세제가 아닌 세자에 책봉된 것은 정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측면에서 나온 발상이다. 형식적으론 방원이 정종의 세자로서 왕위를 이었지만, 실제론 태조의 세자로 왕위를 잇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정종은 죽은 뒤에도 묘효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정상적인 왕으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종이 묘호를 받은 것은 수백 년이 흐른 뒤인 숙종대였다. 그때까지 정종은 묘호도 없이 그저 공정왕으로 불렸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과 제1,2차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중 태종 이방원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