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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항일역사 장충단의 비밀과 신채호

 

숨겨진 항일역사 장충단의 비밀과 신채호

  

 

서울 한복판에 있는 장충단공원은 대부분 오래된 공원으로만 알고 있지만, 이곳에는 독립운동에 관한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삼일절을 맞아 SBS 뉴스토리에서 방영한 장충단이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와 베이징에서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영화 같은 삶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숨겨진 항일역사 장충단의 비밀과 신채호입니다. 삼일절을 맞아 숨겨진 항일역사의 자취를 따라가보는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장충단의 비밀

 

숨겨진 항일역사 장충단의 비밀과 신채호

 

서울 도심 한복판 남산자락 아래 위치한  장충단공원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집회의 중심지로 선거 때만 되면 100만 인파가 운집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한적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곳엔 놀라운 역사적 비밀 숨어 있다고 한다.  

 

 

그 비밀은 바로 공원을 따라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비석이 품고 있다. 장충단이라고 씌어 있는 이 비석의 글씨는 명성황후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친필이다. 

 

 

<장충단 비밀>을 풀 열쇠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있다. 장충단공원의 기원이 된 장충단은 충성스러운 장수를 위한 제단이라는 뜻으로,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와 함께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직접 세운 대한제국 최초의 국립현충원이다.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이자 건축역사학자인 안창모 교수에 따르면, 을미사변 때 죽은 우리 군인들을 제사지내기 위해서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고종이 이 땅에 그 장소로 장충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울 한복판에 제단을 만든 이유는 황후의 비극적 죽음은 막지 못했지만 이후 대한제국을 세우며 자주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진 고종이 일본의 만행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공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899년 중국이 우리나라를 인정함으로써 우리와 중국이 동등한 레벨이 된다. 을미사변 때 죽은 군인을 1900년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는 것은 이제는 대한제국이 안정화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선포한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보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장충단의 원래 자리는 이곳이 아니었다. <장충단 비밀>의 또 하나는 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찰로 전락했다는 데 있다. 지금의 장충단 맞은편 신라호텔 쪽이 바로 장충단에 관한 역사의 비밀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지금의 장충단공원은 뒤쪽 동국대 앞을 가리키지만, 당시의 지도를 보면 장충단의 영역은 신라호텔을 포함한 전체 영역이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장충단의 운명도 비극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1932년 일제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을 위한 숭고한 공간에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장본인인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찰인 박문사를 세운 것이다. 

 

 

일제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선왕조 궁궐인 경희궁 정문을 마음대로 뽑아다가 박문사 출입구로 써버렸고, 장충단 전역을 공원으로 만들어 민족정기를 말살시켜 버린 것이다.

 

 

일제가 다른 곳도 아니고 이 도심 한복판 장충단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찰을 지었던 데에는 장충단이라는 역사적 장소에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사찰을 만들고 정문에 우리 궁궐의 정문을 가져다놓으면서 민족혼의 상실, 그리고 영원히 자신들이 이 땅의 지배자로 남겠다는 일본 군국주의의 의도가 있었다. 그 후 해방이 되어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1967년 신라호텔 영빈관이 들어섰지만 장충단은 원해 자리로 복원되지 못했고 숭고한 역사적 의미는 잊혀진 채 단순히 공원 이름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 

 

 

서울 사당역 근처에는 아주 고풍스럽고 우아한 서양식 건축물이 있는데, 이곳은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는 1905년 벨기에 영사관을 완공된  건물이다. 고종황제는 유럽 열강들과 수교를 했음에도 벨기에와 또 수교를 하고 이토록 멋진 영사관까지 지은 것이다.

 

벨기에는 당시 흔치 않았던 중립국이었는데, 대한제국이 처했던 한/중/일 관계, 그리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대한제국을 위협하고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핵심적인 답이 중립국 벨기에에 있었다고 고종은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물론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는  유일한 길은 중립국이라고 판단한 고종은 1904년 중립국을 선언했지만 얼마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결국 6년 뒤인 1910년 일제는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가장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전 벨기에 영사관을 곳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따르면, 고종황제가 벨기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벨기에처럼 중립국화를 통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즉 고종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지향점의 공간이었다는 것에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즉 "군주(고종황제)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허약한 나라를 일본이 와서 도와주려고 했다, 요컨대 '고종무능설', ''바보군주설'은 일본이 자신의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열강의 홍보용으로 그렇게 만들었던 것뿐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첫 황제였던 고종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덕수궁에서 숨을 거둔다.고종이 승하한 뒤 불과 40일 만에 삼일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수많은 우국지사들의 항일투쟁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단재 신채호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베이징에서 만난 신채호

 

 

원나라 때 형성된 베이징의 유서깊은 전통문물 거리 난뤄구샹 좌우에는 좁을 길이 뻗어 있는데, 베이징에서는 이렇게 '좁은 골목'을 중심으로 집들이 밀집해 있는 오래된 주거지역을 '후퉁'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옆으로 빠지면 바로 단재 신채호가 가장 행복한 시기를 살았던 차오떠우후퉁이 나온다.

 

 

1920년 여성 독립운동가 박자혜와 결혼해 이곳에서 신혼생활을 보낸 신채호는 여기서 아들도 낳았고 독립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던 잡지 <천고>도 발행한다. 

 

 

하지만 신채호의 인생을 통들어 가잘 행복했던 시기는 1년에 불과했다. 극심한 생활고와 일제에 쫓기는 위험한 상황 탓에 사랑하는 가족을 고국으로 보내고 그는 가장 극빈층이 사는 따허이후후퉁으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가장 어렵고, 가장 외롭고, 가장 허약하고,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 

 

춥고 좁고 열악한 단칸방에서  언제나 궁핍하게 살았던 그는 왜 동지들이 많은 상하이로 가지 않고 베이징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했을까? 신채호 연구학자인 최옥산 베이징 대외경제무역대 교수에 따르면, "당시 베이징은 정부가 굉장히 친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에서 온 망명객이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냥 목숨을 내놓은 것첨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이 독립운동을 위해 신채호는 몸과 마음을 다 헌신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혹독한 가난과 배고픔 따위는 신채호의 기개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독립을 향한 마음을 증폭시켜 뛰어난 문학작품을 양산하는 데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신채호의 <천고송>이다.

 

언제 일본경찰에 잡힐지 모르고 경제적으로도 더없이 궁핍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신채호는 베이징 유력 언론이었던 북경일보 등에 한국독립을 주장하고 베이징 유력 언론과 루쉰 등 그 시대의 최고 지성들과 교류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중국 집권층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애썼다, 보통 단재 신채호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라고 하지만, 실은 굉장히 큰 틀을 가지고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사색을 했던 신채호다.  

 

 

베이징에서 홀로 15년간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항일운동을 했던 신채호에게 언제나 큰힘을 주는 친구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꾸러우>, 즉 북이 있는 누각이다 이곳은 원나라 시절부터 북이 있었던 장소로 시민들이 즐겨찾는 명소다. 그런데 1900년 일본군이 이곳의 북을 갈기갈기 찢어 철저하게 말살한 후에 파괴한 후 중국 항일정신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 꾸러우 북소리를 들으면서 신채호도 분노를 누르며  국권회복의 의지를 다지지 않았을까.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영화 20도의 혹독한 추위가 엄습한 뤼순 감옥엔 신채호가 투옥되어 있었다. 심하게 아팠던 그에게 병보석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병보석의 증인이 친일파임을 알고 단칼에 거절한다. 일제 앞에 고개 숙일 수 없다며 평생 고개를 든 채 세수했던 그는 죽음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은 채 57세로 차디찬 감옥에서 홀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이상, 숨겨진 항일역사 장충단의 비밀과 신채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