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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역사속 영웅 5인의 심리학 왕안석 제갈량 카이사르 조조 이세민

 

역사속 영웅 5인의 심리학 왕안석 제갈량 카이사르 조조 이세민

 

 

중국 유일의 하버드대 출신 심리 전문가인 웨샤오둥은 [심리의 함정]을 통해 장구한 역사의 물결 속에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의 성격이 그들의 운명, 나아가 역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더불어 저자는 이 역사속 영웅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현대인들에게 어떤 본보기를 제시하는지도 들려주고 있습니다. 역사학과 심리학을 결합해서 쓴 이 책은 역사속 인물 21명을 선정해 인격심리학, 변태심리학, 사회심리학, 정신분석 등 다양한 분야의 이론을 바탕으로 그들의 인격적 특징과 내면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중 왕안석, 제갈량, 카이사르, 조조, 이세민 등 역사속 영웅 5인의 심리학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웅들의 운명적 삶을 지배한 심리를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역사속 영웅 5인의 심리학 왕안석 제갈량 카이사르 조조 이세민

 

인격장애 왕안석 눈 감고 귀 닫는 개혁은 없다

 

북송(北宋)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사상가, 문장가인 왕안석은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희녕(熙寧) 초기에 왕안석은 젊은 신종(神宗)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논하여 신종의 신임을 얻었고 희녕 2년에는 부재상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에는 재상가가 되어 대대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변법을 시행했다. 훗날 역사는 이를 <희녕 변법>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왕안석의 변법은 여러 제약과 반대에 부딪쳤다. 거대한 압력 앞에서 왕안석이 수 차례나 파직되는 바람에 변법은 이름뿐인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으며, 신종 사후에는 사마광이 재상에 올라 거의 모든 법안을 폐지함으로써 결국 실패로 끝났다. 왕안석의 변법 실패에는 기존체제를 비롯한 외부상황의 한계 외에 어떤 개인적 요소가 미쳤던 것일까? 이를 심리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왕안석은 희녕 변법을 추진할 때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사학계에서는 변법 실패의 원인을 변법을 추진하는 왕안석의 책략과 신종의 지지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분석하지만 심리학에서는 편집증적이고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왕안석의 성격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사람'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편집증적인 사람은 보통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예민하며 자기의견을 고집하고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책임을 쉽게 다른 사람이나 외부 원인에 떠넘긴다.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 대체로 편향되고 편파적이며 극단적인 행동을 하거나 편견을 지니는 등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나 공동 업무에 어려움을 겪는다.

 

왕안석은 편집증적인 성격 때문에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못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해 적을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자신을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갔을 뿐 아니라 신종 황제가 각 영역의 전문가를 동원해 희녕 변법이라는 대업을 이룩하려고 할 때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게다가 변법 시행 중에 시종일관 자기 사람만 동원하려고 고집을 부렸고 독단적으로 행동해 많은 조정 대신과 갈라섰다. 왕안석의 변법 실패는 후대 사람들에게 "사회를 개혁하려면 먼저 자신읠 개혁해야 하고 성격 결함이 많은 사람은 사회를 진보적으로 이끌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고집불통인 사람이 천하를 품고 백성을 예로써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편집증적인 성격을 망상형 성격이라고도 부른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승부욕이 굉장히 강해 자기의견만 고집하는 한편 지나치게 예민하고 과도하게 의심하며 경계한다. 또 자기보호가 지나치고 질투가 심하며 다투기를 좋아하고 비판적 의견은 들으려 하지 않으며 잘못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주위환경이나 주변사람들에게 돌린다. 형세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할 능력이 없고 문제가 생기면 감정적이고 주관적으로 처리하며 가정에서는 화목하지 못하고 밖에서는 친구나 동료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인지장애 제갈량 닮은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의 병

 

유비의 신임을 얻은 제갈량은어 주요 책사가 되었고 훗날 유비를 도와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촉한은 익주에 정착해 위나라, 오나라와 더불어 삼강구도를 형성했다. 병세가 위중해진 유비는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부탁했고, 제갈량은 후주 유선이 즉위하자 승상에 올라 국가 대사를 총괄했다. 그런데 모반죄로 처형되는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위연의 모반사건>은 제갈량 시대의 3대 의혹 중 하나로 꼽히는데, 제갈량이 계획적으로 위연을 죽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양의 등이 승상 제갈량의 유언을 빌미로 권력투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무리도 있다.

 

사실 논쟁의 초점은 위연의 죽음에 대한 제갈량의 책임 여부다. 사료를 통해 당사자의 심리를 분석해 보면 제갈량은 위연에게 확실히 편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이 다른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충돌은 이런 편견을 키워 결국 위연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심리분석은 제갈량이 위연 살해를 계획했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위연은 제갈량이 생각했던 것만큼 악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연은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을 만큼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충성심 깊은 신하였다. 하지만 신중한 성격의 제갈량이 뛰어난 용맹과 지략으로 오만방자하리만큼 승승장구하는 위연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더욱이 위연은 제갈량의 미움을 받을수록 더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래서 늘 "겁 많은 제갈량 때문에 내 재주가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며 한탄했다. 하지만 당시 제갈량은 촉나라의 권력을 혼자 좌지우지하고 있었기에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움직이는 방식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심리학적 분석은 끝내 참수형을 당한 위연의 비극은 사실 어떤 인물로 인해 미리 운명지워져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어떤 인물이란 바로 삼국시대를 호령한 관우를 가리킨다. 위연은 관우와 유사한 면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제갈량은 관우에 대한 감정이 위연에게 전이되는 경험을 한 듯하다. 감정전이란 한 개인이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 환경에 대해 갖는 애정과 증오를 다른 인물이나 사건에 투사하는 심리를 말한다. 이는 아무 이유 없이 특정인물, 사건, 장소, 물건, 환경 등을 좋아하거나 적대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감정전이에는 순방향 감정전이와 역방향 감정전이가 있는데, 제갈량이 위연에게 반감을 품은 것은 역방향 감정전이다. 제갈량과 관우의 관계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일생 신중함을 근본으로 삼고 일을 처리해 온 제갈량은 성격이 거만하고 고집스러우며 자부심이 강한데다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함부로 지껄이는 관우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외모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관우를 닮은 위연에게 제갈량의 감정이 전이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증오심이 커져갔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최초로 전이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정신분석학 심리치료에 적용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전이란 환자가 상담자에게서 자신의 유년과 과거에 존재했던 특정한 인물과 닮은 점을 발견하고 그 인물에 대한 감정과 반응을 상담자에게 옮기는 것을 말한다. 순방향 전이란 환자가 상담자를 자신에게 즐거움과 행복, 호감을 주었던 대상으로 인식하고 상담자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투시하는 것이고, 역방향 전이는 환자가 과거에 자신에게 좌절과 고통 또는 압박감을 주었던 대상으로 인식한 상담자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反)전이는 전이의 상대개념으로, 상담 관계에서 상담자가 환자에게 보이는 전이를 말한다. 

 

 

인격결함 카이사르 자부심이 자만심으로 변질되는 순간

 

로마공화정 말기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장군인 카이사르는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동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여 로마의 대권을 장악했다. 기원전 49년에는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고 공화정 독재정치를 실시했고, 기원전 44년에는 브루투스의 주도 아래 원로원 회원에게 암살당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왜 원로원에서 자신의 측근에게 찔려 죽는 비극적 운명을 운명을 맞이했을까? 그의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심리학적으로 볼 때 카이사르가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손에 죽은 것은 지나친 자부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지나친 자부심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지나친 자부심에 빠지면 연기성 성격장애를 형성하게 된다. 연기성 성격장애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과장된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려는 성격장애를 일컫는다. 이런 사람은 감정 변화가 심하고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뿐만 아니라 자아도취에 빠져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칭찬하고 존경하기를 원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앞에 나서기를 좋아한다. 또한 영웅주의 성향을 보이며 다른 사람에게서 관심 받기를 즐기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또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대상을 판단하고 망상에 빠지기 쉬운데다  말이나 행동이 사실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할 만큼 지도자로서 자신의 매력과 호소력에 도취되었다. 눈부신 명예, 관대한 영웅 이미지에 푹 빠져 누구도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정치에서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사람과 공공의 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언제고 돌변할 수 있다. 로마 길거리 군중이 카이사르에게 환호하던 바로 그때, 원로원의 일부 귀족은 카이사르를 불편한 존재로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카이사르가 평범한 귀족에서 로마공화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까지 38년이 걸린 반면 로마의 최고 통치자와 집정관 신분으로 피살되기까지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지나친 자만심이 그를 나락으로 빠뜨린 것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며 자기 운명이 비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걸핏하면 실패의 책임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린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사람이나 일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주관적이로 일방적인 방식으로 처리한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가정에서는 불화가 이어지며 밖에서는 친구나 동료와 잘 지내지 못한다. 아첨하는 말을 듣기 좋아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하게 만든다. 

 

 

자아인지 조조 호탕한 맹덕 간사한 아만

 

동한 말의 정치가이자 군인, 문학가인 조조는 젊은시절부터 재능이 뛰어나 당시의 명사 허소가 일찍기 그를 두고 "평화로운 시대라면 유능한 신하가 되겠지만 난세라면 간웅이 될 것"이라고 평했다. 조조는 한나라 말 효렴에 천거되어 벼슬길에 오른 후부터 줄곧 남쪽을 정벌하고 북쪽과 전쟁을 벌였으며 천자를 등에 업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등 권세를 누린 조조의 영웅담은 대대로 후대 사람이 감탄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조조는 어떻게 역사에 남는 공적을 세울 수 있었을까? 또한 조조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조는 능력있는 신하였을까? 아니면 간사하고 꾀많은 간웅이었을까?

 

조조의 가장 두드러지는 성격은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에 패했음에도 흔들리는 기색 없이 오히려 호탕하게 웃는 것은 오직 조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조의 너그럽고 낙천적인 성격 이면에는 깊은 열등감이 숨어 있다. 다시 말해 우월감이라는 겉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열등감은 뛰어난 인물이 쉽게 겪는 심리적 질병으로, 일본의 유명한 학자인 세키 가즈오는 "열등감이 전혀 없는 사람은 절대로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또 열등감은 자의식이 없어서 생기는 감정이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심리상태라고 말했다.

 

조조가 열등감을 갖게 된 원인은 자신의 불명확한 출신 성분 때문이었다. 그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결국 그는 의심 많고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간웅의 기질을 보이게 된 것이다. 조조의 열등감으 외모에서도 비롯되었다. 한나라와 위나라 백성은 외모와 풍모를 많이 따졌기 때문에 조조는 못생긴 외모에서 오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키가 작고 외모가 잘나지 못해 경박하고 위엄이 없어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던 조조는 조맹덕(孟德)과 조아만(阿瞞)이라는 두 사람의 인격을 지녔다. 낙천적이고 너그러운 조조는 조맹덕이며, 의심이 많은 조조는 조아만이었다. 정신분석이론으로 보면 조조는 자아가 너무 강해서 언제든 자아 표현방식을 달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낙천성을 기르는 10가지 방법

 

1 많이 웃어라. 웃으면 폐가 확장되어 혈액순환을 돕는다.

2 잊어버려라. 이미 지나간 일은 최대한 머릿속에서 지워버려라.

3 유머를 배워라. 즐거움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불쾌함과 고민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

4 자신감을 키워라. 생활 속에서 자신감을 키우고 성공을 계속 경험하라.

5 사교성을 길러라. 인간관계를 넓히면 자신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많은 사람과 더 많이 나눌 수 있다.

6 운동량을 늘려라. 여가활동이나 스포츠는 걱정을 해소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7 롤모델을 찾아라. 생활 속 '낙관의 달인'을 본보기로 삼아 자신을 변화시켜라.

8 옛 선인을 만나라. 동서고금의 '낙관의 고수'를 찾아 그들의 전기를 읽고 자신을 변화시켜라.

9 취미를 즐겨라. 다양한 취미생활은 삶의 활력을 더한다.

10 대응능력을 키워라. 대처기술을 익혀 각각의 문제에 걸맞은 방식으로 대응하라.

 

 

 

인격완성 이세민 철저한 자기반성과 겸손의 기술

 

이세민은 당나라 2대 황제인 당태종으로, 世民이라는 이름은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세민은 생애의 전반기에 군사에 힘을 쏟아 당나라 창건에 혁혁한 무공을 세웠고 후반기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가이자 군주가 되었다. 이세민이 재위했던 정관 연간에는 중국역사상 가장 태평한 시기였다. 정치는 투명했고 경제는 발전했으며 문화는 번영했고 사회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또한 군사력은 막강했고 백성은 편안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이세민의 시대는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세민이 중국 제왕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정관지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실현할 수 있었을까?

 

이세민이 중국 제왕의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천자는 현명하다'는 허상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을 통찰했으며 신하들이 직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8세에 군인이 되어 52세에 병으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시종일관 냉철을 유지하면서 거만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경계했다. 또 옛 성현의 가르침과 다른 사람의 눈을 거울삼아 사람을 이해했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세를 이뤄냈다. 이세민에게서 가장 본받을 만한 점은 신하들 앞에서 흔쾌히 자아비판을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세민은 자신감과 자기비판 의식이 남보다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었다. 그의 자신감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높은 자존감과 겸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심리학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장점을 부인하지도 않지만 자만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진심으로 경청하며 자신을 과시하려 들지 않는다. 이세민은 다른 사람의 비판적 의견을 수용했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뛰어나면 어쩌나, 자신을 비웃으면 어쩌나, 황제의 자리를 넘보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후세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은 부단히 반성하는 겸손한 인격자로 군주의 모습을 제시한 점이며, 이것이 바로 그의 인간적 매력이다.

 

자신감은 자아에 대한 감정이자 정서적 체험으로, 자신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말한다. 로젠버그는 자신감을 도전과 위기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다고 여기는 기대감이라고 정의했다. 즉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치며 밀접한 관련을 갖는 자신감은 심리학적 개념인 자존감과 유사하다.

 

이상, 역사속 영웅 5인의 심리학 왕안석 제갈량 카이사르 조조 이세민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