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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삼국지에 등장하는 책사 6인

 

삼국지에 등장하는 책사 6인

 

 

책사(策士)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나라의 제후를 위해 정책과 전략을 제시하던 지식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철학을 말하고 능력에 따라 군주에게 채용돼 정치에 참여했던 이들은 대의를 위해 주군을 보필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나간 2인자들이지만, 정치의 핵심을 이루었기에 역사를 이끈 주도세력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회사를 경영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데 1인자의 능력과 인품이 중요한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책사, 2인자들의 능력과 인품입니다. 1인자를 더욱 빛나게 하는 이 책사들의 역할은 의리와 충성, 재능을 다 바쳐 1인자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있습니다. 1인자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뛰어난 책사를 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극명하게 대조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주로 중국 고전서 연구에 바탕을 둔 저술을 하고 있는 나채훈은 [삼국지의 책사들]에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15명의 책사들의 참모습과 그들이 꿈꾼 세상경영 및 조직경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들려주는 삼국지의 책사들 중 순욱, 사마의, 제갈량, 관우, 여몽, 장소 등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책사 6인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1인자이기만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거늘, 1인자의 성공 뒤에서 기꺼이 그림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2인자들의 덕목과 열정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순욱(荀彧) - 인품과 경륜을 갖춘 명재상

 

순욱은 조조의 막료 가운데 군계일학 같은 존재였다. 2인자로서 조조를 도와 위나라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그는 선비형의 부드러운 성품과 높은 경륜으로 부하들의 존경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순욱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순욱이 조조에게 협력해서 한나라가 무너지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도 뒤바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말년에 태도가 바뀌기는 했지만 순욱은 처음부터 한왕실의 부흥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조조의 음흉한 계략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왕도가 쇠락하여 인륜도덕과 사회기강이 무너지고 사악한 풍조가 극에 이르러 있을 때였다. 또한 영웅호걸들은 호시탐탐 권력을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만일 이때 순욱이 나서서 난세를 바로잡고 천하를 안정시킬 포부를 가지고 애쓰지 않았다면 오히려 한나라가 더욱 빨리 멸망하고 백성들도 더 큰 곤욕을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 순욱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이끌 만한 영웅은 조조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조조를 보좌함으로써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으려 했던 것이리라.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기에는 먼저 부귀영화를 찾는 것이 생리다. 그런데 순욱은 일국의 재상이 걸어야 할 청빈함과 경륜, 부드러운 인품과 겸허한 마음으로 흐트러짐 없이 자기 역할을 수행한 명재상이었다. 권력에 기대 부귀영화를 탐내거나 최고 권력자와 인척관계를 맺은 위세를 뽐내지 않고 대의에 따라 현실의 만족보다는 나라의 장래를 보고 모범적으로 처신한 것이다. 2인자가 누릴 수 있는 현실적 특혜를 거부하고 명재상의 풍도를 지키며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쓴 순욱을 조조 진영의 대표적 명참모로 꼽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책사 6인

 

 2  사마의(司馬懿) - 천하를 삼킨 야심가

 

사마의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기기묘묘한 계략에 크게 우롱당하는 위나라 장군으로 묘사돼 있다. 2인자로서의 능력이 부족하지 않느냐는 평판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죽은 공명(제갈량)이 산 중달(사마의)을 물리쳤다"는 유명한 고사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올 정도다. 하지만 사실은 사마의는 너무 출중한 나머지 남이 자신의 능력을 알아볼 수 없도록 위장한 인물이었다. 이런 처세로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며 사마씨 왕조의 기반을 닦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손자 사마염을 265년 위나라 원제의 양위를 받아 진(晉)나라를 열었던 것이다. 

 

조조는 “사마의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항상 경계했지만, 사마의는 조조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밤을 새우며 하급 관리의 직무를 보고 가축을 기르는 하찮은 일까지도 기꺼이 함으로써 조조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결국 위나라 군대를 이끌어 최대 라이벌인 제갈량과의 치열한 지략싸움 끝에 결국 북벌을 막아낸 그는 이리가 뒤돌아보는 상이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뒤를 돌아볼 때는 머리뿐 아니라 온몸을 뒤로 돌려야 하지만 그는 몸은 그대로 둔 채 머리만 180도 돌려 뒤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결코 평범한 상은 아니었던 듯하다. 

 

조조부터 조비, 조예, 조방에 이르는 위왕조 조씨 4대를 섬기며 끊임없는 권력의 감시 속에서 살아남아 오히려 자신의 왕조 기틀을 다진 그는 경쟁자의 집요한 도발을 노련하게 물리친 일급 모사이자 술책의 명수였다. 이런 사마의가 평범한 사람들에겐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도 마다하지 않는 술수의 대명사로도 보일 것이다. 또한 사마의는 주군의 입장에서도 결코 달갑지 않은 인물이다. 의리나 충성보다는 철저하게 자신의 야망을 위해 기회를 엿보는 배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사마의는 배신자라기보다는 통치 능력을 잃은 조정을 대신해 새로운 시대를 연 창업자로서 난세를 마무리한 걸출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제갈량(諸葛亮)실용적 사고를 가진 원칙주의자 

 

실용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자 충절을 지키고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모범적인 삶을 보여주어 2인자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제갈량은 촉나라의 승상이자 그 시대의 대표적 명재상으로, 흔히 제갈공명이라고 불린다. 아버지 제갈규는 후한 말기 태산군의 승(오늘날의 부군수)을 지냈으니 비교적 부유한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지만 조실부모한 제갈량의 어린시절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씨가 맑은 날에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궂은 날에는 글을 읽는 이른바 청경우독(淸耕雨讀)으로 생활을 꾸려나간 그는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해 키 8척에 용모가 훤칠했다. 학문을 하는 방식도 남달라 지엽적인 문제를 파고들기보다는 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제갈량은 천시(天時)와 지리, 인간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매사에 임했기 때문에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관우, 장비 같은 용장들도 그가 있어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이런 제갈량의 자질은 비록 우유부단하지만 인덕을 갖춘 유비와 잘 조화되어 협력자로, 2인자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앞날을 판단할 때는 위험 부분도 함께 생각하라"는 것이 제갈량의 충고다. 실이 있으면 허가 있고 득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니, 철저하게 대비하여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요한 일일수록 모험을 즐기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실제로 북벌에 나섰을 때 위연의 장안일격론을 기발한 계책이라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을 점령하면 2로 나아가고 3으로 진격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2로 되돌아와 다시 한 번 3으로 나아가는,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작전으로 임했다. 북벌에 나선 촉군이 처한 입장에서 정공법으로 진격하는 것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지만, 원칙주의자 제갈량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4  관우(關羽) - 목숨을 걸고 신의를 지킨 명장

 

인물열전이라 할 만한 삼국지에서 사후 민간에서 제왕처럼 추앙받는 사람이 관우다. 오늘날 그의 초상화에서 보듯 긴 미염(美髥)을 휘날리며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서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마지막까지 도원결의를 지킨 그의 신의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관우에게 굳이 흠을 잡자면 지나치게 강직한 태도라고 할까. 하지만 혼란한 시기를 맞아 그는 오로지 의리와 충성으로 유비를 받들었고, 걸출한 무용을 앞세워 촉의 수호신으로 일생을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이해관계를 쫓게 마련이다. 세상이 혼란해지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심지어 2인자 자리에 있으면서 주군을 살해하는 배신도 일어난다. 그만큼 난세에는 의리를 지키기가 어렵다. 이런 불신 속에서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신의를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기에 중국에서 관우가 신처럼 추앙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관우는 도원결의 이후 죽는 순간까지 유비, 장비와 혈육 이상의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장비와 함께 유비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보필했고, 도망치기 잘하는 유비를 따라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온갖 고난을 겪었다. 또한 관우의 장점으로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뛰어난 능력이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관대작이나 벼슬이 높다고 우쭐대는 이들은 여지없이 깔아뭉개거나 비웃었지만 부하들에게는 최대한으로 인정을 베풀고 아껴주었다. 

 

특히 관우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군명유소불수'(君命有所不受)라는 원칙을 알고 있었다. 즉 군주의 명령이 있을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야전사령관의 자세를 지켰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유비가 파촉 땅을 점령한 후 손권 진영에서 형주 땅을 돌려달라며 유비의 서찰을 지니고 사신이 오자 호령한 대목에서 나오는데, 당시로서는 기개 이상의 놀라운 안목이었다. 한마디로 관우는 손자병법의 진수를 체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장수로서 꿇어 엎드려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장렬하게 목숨을 바치는 덕목이 필요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관우의 소신은 영원한 장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5  여몽(呂蒙) - '하면 된다'는 정신을 보여준 대기만성형 맹장

 

자신의 숨겨진 자질을 갈고 닦으면 얼마든지 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변신에 성공한 2인자라면 오나라의 명장 여몽을 꼽을 수 있다. 젊은시절 그는 저돌적인 용맹 외에 재능이건 가문이건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문무겸전의 명장이 되고 명참모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여몽은 무엇보다 자신을 갈고 닦아 '하면 된다'는 정신을 보여준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어린시절 가난에 시달리고 출신성분이 천해 고통받았던 탓에 그는 자기연마와 불굴의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했는지도 모른다. 손권의 가르침을 받아 역사와 병법서를 많이 읽은 그를 보고 노숙(魯肅)은 “옛날 오하의 아몽이 아니구나(非復吳下阿蒙)”라며 칭송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괄목상대(刮目相對)의 고사성어다.

 

여몽은 죽기 전에 하사받은 금은이나 재물, 상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창고에 보관했다가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날 모두 조정으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가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으로서 쉽지 않은 처신이었다. 하사품을 받지 않으면 많은 군사들의 성취 동기를 잃게 만든다. 그러니까 우선은 받지만 그 모든 것이 목숨을 바쳐 싸운 부하들의 공로이므로 결코 낭비하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나라에 바친다는 정신은 그리 쉽지 않은 처세였다.

 

 

 6   장소(張昭) - 직언을 서슴지 않은 행정가

 

손권 진영의 장소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져 있는 것들이 많다. 적벽대전 직전에 손권은 남하하는 조조의 수십만 대군과 맞서 국운을 걸고 싸울 것이냐, 아니면 화평하여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냐 하는 존망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때 항복파의 대표적 인물이 장소였다. 소설에서 그는 우유부단하고 제 잇속을 챙기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인물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장소는 계략을 세우거나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과 싸워 승리를 이끌어내는 2인자는 아니었다. 행정의 달인이었던 그는 지나치게 대쪽같은 성미 때문에 2인자로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했지만 수성의 원칙을 지향한 손권 진영에 보배 같은 존재였다. 참모 중에는 이룩하는 형과 지키는 형이 있는데 장소는 지키는 형이었기에 많은 오해를 받은 듯하다.

 

장소는 평범한 시골 팽성 출신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예서를 잘 쓰고 여러 분야의 책을 섭렵했기 때문에 남야의 조욱, 동해의 왕랑과 함께 박학한 선비로 널리 알려졌다. 더구나 천성이 맑아 약관의 나이로 효렴에 뽑혔으나 혼란한 세상에 벼슬살이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낙양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대쪽같은 성미에 군신 모두가 어려워했던 장소는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할 때, 운둔지사들이 머리를 뒤로 묶어올려 덮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과 기름칠을 하지 않은 소박한 판에 평상복으로 염하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조문객들은 소박한 옷을 입고 조문해야 했다. 그는 난세에 보기 드문 대쪽 선비로 정치의 근본이 예와 덕에 있음을 몸소 실천한 강공한이었다. 사리사욕을 탐내거나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남을 모략하는 등의 행동을 그는 천하게 여겼다. 원칙 없이 재물을 탐내고 사리사욕에 얼룩진 난장판 같은 세상에서는 새삼 되새겨볼 만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이상, 삼국지에 등장하는 책사 6인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