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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인생교훈 8선..불운을 딛고 명예와 부를 얻은 8인의 이야기

 

인생교훈 8선..불운을 딛고 명예와 부를 얻은 8인의 이야기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어느 95세 노인의 수기]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지난 8월 31일 103세로 삶을 마감한 호서대 설립자 강석규 박사님이 95세에 쓴 글인데, 인생교훈으로 삼기에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강석규 박사님은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서 실력을 인정받고 존경도 받으면서 65세에 당당하게 은퇴했지만 30년 후인 95세 생일 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퇴직 후 남은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며 덧없고 희망없는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아온 데 대한 후회였습니다. 그 30년이 95세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나긴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사님은 그때 스스로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것이 큰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95세에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10년 후 맞을 105번째 생일에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105번째 생신은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95세에 그런 결심을 하셨다는 것이 놀라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인생교훈 8선..불운을 딛고 명예와 부를 얻은 8인의 이야기

 

데일 카네기의 [인생의 힌트]에도 맹렬한 노력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데일 카네기가 들려주는 40명의 인물 중 불운을 딛고 명예와 부를 얻은 8인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입니다.


 

 1   윈스턴 처칠 불굴의 의지로 역풍을 순풍으로 바꾸어라

 

윈스턴 처칠 맹렬한 노력으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어떤 적에게도 단호리 맞선 영국의 국민적 영웅

 

윈스턴 처칠의 탁월한 자질은 불독 같은 불굴의 의지와 결단력이었다. 그가 자신을 교육시킨 것이 그 좋은 예다. 청소년 시절 그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특히 외국어와 수학은 반에서 꼴찌였다. 그런데 묘한 것은 수학을 몹시 싫어하는 이 소년이 나중에 재무장관이 되어 4년간 대영제국의 재정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는 샌드허스트의 왕립사관학교에 들억려고 세 번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세 번 다 실패했다. 그리고 네번째 입학시험을 보고 가까스로 합격했다.

 

그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에 비해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독학으로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일환으로 플라톤의 철학에서 기본의 [로마제국성쇠사],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책을 탐독했다. 그리고 목소리에 장애가 있는데다 형편없는 연설가였던 그는 역사상 가장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연설가 중 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변모시켰다.  

 

 2  존 록펠러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라

 

존 록펠러 극빈상태에서 여느 부호들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업적을 쌓고 97세까지 산 슈퍼맨

 

존 록펠러는 평생 세 가지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했다. 첫번째 그는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부를 쌓았다. 두번째 그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각 방면에 기부했는데, 그 액수가 무려 7억 5천만 달러에 이른다. 이것을 환산해 보면 서기 원년부터 지금까지 1분마다 75센트씩,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3500년 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온 후 지금까지 매일 600달러씩 기부한 것이다. 세번째는 그가 97세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백인이 97세까지 사는 것이 100만명당 겨우 30명밖에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나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을 내 노예로 삼기로 결정했다"고 약속했으며, 그 우선순위를 평생을 지켜나갔다.  

 

 3   잭 뎀프시 인생의 고난은 두 배의 노력으로 극복하라

 

잭 뎀프시 돈 때문에 어머니가 다른 사람 앞에서 굴욕의 눈물을 흘리자 분발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된 남자

 

잭 뎀프시는 가난한 것이 그토록 부끄럽지 않았으면 결코 프로 권투선수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아픈 어머니가 뎀프시를 데리고 열차에 올랐을 때 돈이 모자라 차장이 태워주지 않겠다고 거절하자 당황한 어머니는 울기 시작했다. 그런 어머니 모습을 보고 그는 크면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모욕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또 자기에게 기차에서 내리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또한 그는 위대한 프로 권투선수가 되어 돈을 많이 벌겠다고 결심하고 12세도 채 안 됐을 때부터 권투시합에 뛰어들 준비를 시작했다. 오래된 버려진 닭장을 손질해서 체육관을 만들고, 텀블링을 할 수 있도록 바닥에 낡은 매트리스를 깔고, 모래와 톱밥을 넣어 샌드백을 만들었다. 또 턱에 강한 펀치를 맞아도 다치지 않도록 턱의 근육을 강화시키기 위해 언제나 송진 껌을 씹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24세인 1919년 7월 4일 잭 존슨을 케이오시키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었다.

 

 4   허버트 웰스 때로는 빙 돌아가는 길도 가치가 있다

 

허버트 웰스 골절로 1년, 죽음에 이를 뻔한 큰 중상으로 12년, 불의의 재난 덕분에 자신의 재능을 숙성시킨 남자

 

어린시절 다리가 부러진 허버트 웰스는 무거운 깁스를 한 채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면서 몇 달간을 침대에서 누워 지내는 등 1년 가까이를 집안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때 그는 손에 넣을 수 있으면 어떤 책이든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그 결과 그는 독서 취미를 기르고 문학을 사랑하게 되었다. 다리가 부러진 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었다. 

 

그 후 또다시 불운이 그를 덮쳤다. 미식축구를 하던 중 흥분의 도가 높아져 가는 가운데 얻어맞고 쓰러져 짓밟힌 그는 목숨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신장 하나가 파열되고, 오른쪽 폐에 구멍이 뚫렸다. 게다가 출혈과다로 의사들도 모든 희망을 다 버린 상태였다. 그 후 그는 곧 죽지 않을까 하는 상태로 몇 달을 보내고, 그로부터 12년 동안 반병자 상태로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시절 무서운 기세로 글을 썼고, 무결국 려 7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웰스는 죽기는커녕 강건함을 되찾고 인간 에너지로 재탄생한 것이다. 

 

 5   조지 버나드 쇼 자신의 약점을 최강의 무기로 삼아라

 

조지 버나드 쇼 친구 집 문을 두드리는 데 20분이나 걸리던 수줍음 많은 응석받이에서 당대 제일의 연설가가 된 사나이

 

조지 버나드 쇼의 생애는 뚜렷한 대조로 가득차 있다. 그는 5년밖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형식적인 교육이 결여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의 가장 저명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작가로서 최대의 영예인 노벨문학상도 수상했다. 이때 그는 상금 3만 5천 달러도 영예도 필요없다며 거절했지만 주변의 권유로 상금을 받은 그는 즉시 그 돈을 '영국-스웨덴문학연맹에 기부해 버렸다. 그가 상금을 손에 쥔 것은 1초도 되지 않았다.

 

그는 다섯 편의 장편소설을 썼는데, 그 속에는 [예술가들끼리의 사랑]이라는 소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원고들을 영국과 미국의 모든 출판사에 보냈지만 모두 반송되었다. 당시 그는 원고를 출판사에 우편으로 부치는 데 필요한 우표를 사기 힘들 정도로 돈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았던 그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법을 배워 당대 제일의 연설가 및 논객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것이다. 

 

 6   올리버 웬들 홈스 양심에 따르는 삶을 살아라

 

올리버 웬들 홈스 상대가 대통령이라도 자신이 믿는 법의 정신을 버리지 않았던 남자

 

미국 법학계의 우뚝 솟은 이정표로 간주되고 있는 [미국법 주해] 전 4권을 출간한 올리버 웬들 홈스가 처음으로 '위대한 반대의견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매사추세츠 주의 대법원에서였다. 그는 다른 판사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무척 많았다. 예를 들어 1896년 노동자가 상점에 피켓을 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묻는 소송사건이 심리되자 평생 한 번도 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 홈스였지만 그는 이 권리를 지지하면서 친구에게는 "방금 전에 사법부에서 승진할 수 있는 길을 영원히 차단시켜 버렸네"라고 말했다. 결코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않았던 그였기에 자신에게 불리한 줄 알면서도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로 인해 출세길이 막혀버렸다고 생각한 그런 판결들이 그에게 훨씬 더 큰 승진의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은 홈스보다 더 훌륭한 인물을 낳지 못했고, 또 그보가 미국의 법률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없었다. 그의 판결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7   오 헨리 더없는 불운이 닥쳐도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 헨리 5년간의 감옥생활로 오히려 글을 쓸 수 있는 여가를 얻어 최고의 단편작가로 우뚝 선 남자

 

오 헨리는 몹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강적과 맞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먼저 그에게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또한 대학문턱도 넘어서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의 절반에 이르는 대학교에서 훌륭한 글의 모델로 드의 단편소설들을 연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질병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의사들은 그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지 않을까 우려해 그를 텍사스로 가게 했다.

 

그는 이곳의 목축장에서 양들을 지키는 일자리를 얻었다. 오늘날 자동차 여행자들은 그곳에 가까이 이르면 자동차를 세우고 오 헨리가 예전에 양들을 지켰던 땅을 가로지르며 경건하게 걷는다. 세번째로 그는 투옥되는 명백한 불운까지 겪는다. 건강을 되찾은 뒤 은행 출납원으로 일할 때 돈을 착복했다는 오해를 받고 5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징역형은 재난과 같았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 일은 그에세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오 헨리는 감옥 안에서 장차 영어를 사용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의 이름을 존경하고 사랑하게만들, 훌륭한 단편소설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8   에드거 앨런 포 차디찬 현실 앞에서도 아름다움과 사랑을 꿈꾸어라

 

에드거 앨런 포 특이한 낭만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추리소설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시인  

 

에드거 앨런 포는 소네트를 쓰고 추리소설을 꾸며낸 인상적이고 낭만적인 천재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도박과 술을 좋아해서 버지니아대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 후 그는 또 웨스트포인트 육국군관학교에서도 군법회의에 회부된 뒤 쫓겨났다, 모든 규율을 무시하고 연병장에 나가 총을 들고 훈련을 받아야 할 때 내무실에 앉아 씨를 썼기 때문이다.

 

포의 결혼 이야기는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 하나다. 그는 사촌 여동생인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한푼도 없었다. 그는 물을 타지 않은 주정(酒精)을 마셨다. 하나뿐인 여동생은 미쳐버렸고, 포 자신도 반미치광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어린 아내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그의 결혼생활은 곧 확실한 실패로 끝나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린 아내를 숭배한 그는 그녀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서 영감을 받아 영문학을 풍요롭게 만든 더없이 아름다운 시를 탄생케 한 것이다.

  

이상, 인생교훈 8선..불운을 딛고 명예와 부를 얻은 8인의 이야기였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