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이름 한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
이름은 한 사람의 외모만큼이나 정체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잘 짓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며 작명소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보통은 부르기 쉽고 듣기 편안한 이름이 가장 좋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간혹은 스스로 밝히기가 꺼려질 만큼 듣기 거북한 이름도 있어서 부모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지어준 걸까 의아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딩 때 한 친구의 삼촌 성함을 우연히 듣고 그분들께는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다들 박장대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은 동신, 또 한 분은 동화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데, 그 친구의 성(姓)이 노씨입니다. 성하고 합치면 노동신, 노동화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단순히 이름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하고의 조화도 잘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때로는 이름이 안 좋아서 바꾸었더니 그 후의 삶이 백팔십도 달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도 있어서 저마다 이름에 관한 에피소드는 한두 개쯤 다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름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긴 것은 옛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며, 신중하게 지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초명(初名), 아명(兒名), 자(字), 호(號)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요즘도 저마다의 이유로 이름을 여러 개 가진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또 귀한 집 자식은 저승사자가 일찍 데려간다는 믿음에 따라 양반가나 왕가의 아이는 개똥이, 똘복이처럼 한자를 쓰지 않은 천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EBS [역사채널e]에서 방영한 조선의 이름 한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1852년 7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난 아기 이재황(李載晃), 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이름들을 갖게 된다.
갓난아기 때부터 걸음마를 뗄 무렵까지는 “개똥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어린 아이가 되어서는 오래 살라는 의미를 가진 명복(命福)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성년이 되어서는 성림(聖臨, 임금의 자리에 오름)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고, 그가 개인적으로 즐겨 쓰던 이름은 주연(珠淵)이었다.
그가 바로 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이다. 사람은 한 명인데 이름은 여러 개였던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지어주는 어릴때 이름은 초명(初名)이다. 그러나 초명은 실생활에서는 잘 부르지 않았으며 성년이 되기 전까지 아명(兒名)을 지어 불렀다. 아명은 일종의 별명으로 어머니가 꾸었던 태몽이나 출생 당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지었다.
예를 들어 유학자 율곡 이이의 경우 초명은 이(珥)였지만 어머니가 꿈에서 용을 보고 낳은 아이라 하여 현룡(見龍)이라는 아명으로 불렸고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초명 金萬重)은 배 위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선생(船生)이란 아명을 사용했다.
훗날 아이가 자라 15-20세가 되면 성인 남성이 되는 관례를 치르게 되는데, 이때부터 초명이나 아명 대신 성인이 되어 쓰는 이름인 자(字)를 지어 사용하게 된다. 자는 동년배나 친구 사이 혹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지칭할 때 부르는 부명(副名)으로, 흔히 장가든 뒤에 성인으로 본이름 대신 불렀다.
16세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주고받은 편지에서 60세가 넘은 퇴계 이황은 젊은 학자인 이이의 자를 불러 이숙헌(李叔獻 )으로 쓰고 20대인 율곡 이이는 이황의 호인 퇴계(退溪)를 붙여 '퇴계 선생께'로 지칭했다. 황희 정승의 자는 구부(懼夫)였다.
호(號)는 위아래 서열과는 상관 없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일종의 별명으로 작명하는 원칙이 정해져 있지 않아 스스로 자유롭게 지어 쓸 수 있었다. 본인이 지은 호를 자호(自號)라고 한다. 퇴계 이황은 정치와 권력싸움보다 학문에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퇴계(退溪, 산골짜기로 물러남)라는 호를 사용했고, 거문고를 잘 탔다고 알려진 박팽년은 취금헌((醉琴軒, 멋과 풍류에 취함)이라는 호를 지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申)씨는 주나라의 성군인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부인을 스승으로 삼아 본받겠다는 뜻에서 자호를 사임당(師任堂)으로 지었다. 다른 사람이 지어준 호를 아호(雅號)라고 한다. 아호에는 풍아, 우아의 뜻이 담겨 있으니 본인이 지은 것이라도 이러한 뜻이 담겨 있으면 아호라고 부를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평론가였던 강세황은 등에 있는 얼룩무늬가 표범과 비슷하다고 하여 표암((豹菴)이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자신이 좋아하는 지명을 본떠 교산(蛟山)이라는 호를 지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옛사람을 지칭할 때는 대부분 호+초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옛사람들의 이름은 초명과 자, 그리고 여려 개의 호로 매우 다양하게 불려졌다.
한편 수많은 이름을 남기고 다양하게 지어 불렀던 양인 남성과는 달리 여성과 평민은 태어날 때 지은 초명만을 사용했다. 양반가 여인이라 하더라도 허난설헌(허초희)과 신사임당(신인선)과 같은 극히 소수의 여성을 제외하고는 결혼한 후에는 이씨, 김씨 등으로 불리며 평생을 무명으로 살아갔다.
일제강점기에는 외솔 최현배, 한힌샘 주시경 등 한글학자들이 순우리말 호를 지어 사용하기도 했으며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별명’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 외에 시호(諡號)는 제왕, 경상(卿相), 유현(儒賢)이 죽은 뒤에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追贈)하던 이름이다. 이순신 장군의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또 필명(筆名)과 예명(藝名)이 있는데, 필명은 시가, 작품 등의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집필가의 이름이고 예명은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등 예술적인 분야에 몸담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분위기에 맞추어 세련되고 멋있에 또는 독특하게 부각시켜서 본이름 외에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이상, 조선의 이름 한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