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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화정 인조의 최후..장렬왕후와 소용조씨

 

화정 인조의 최후..장렬왕후와 소용조씨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삶을 통해 광해군과 인조시대의 실상을 그린 팩션드라마 화정에서 최근 인조(김재원)는 막장의 모습을 보이며 최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어좌를 넘본다고 생각해 아들 소현세자(백성현)를 정적(政敵)으로 몰아붙이며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한 인조의 추태는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렇게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큰아들도 죽게 만들고 며느리와 그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조였지만 그 후 짜증도 더 심해진데다 배가 부풀고 오한과 신열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1649년(인조 27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강영민내과 강영민 원장의 [조선 왕들의 생로병사]를 바탕으로 인조의 최후와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채빈), 그리고 인조의 후궁 소용조씨(김민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인조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화정 인조의 최후..장렬왕후와 소용조씨

 

병자호란 이후 볼모로 긴 세월을 청나라 심양에 머물렀던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이민호)은 8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인조 22년(1645년)에 귀국한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3대 황제인 세조(순치제)가 준 선물을 인조에게 보여준다. 그러자 아들이 철저한 친정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판단한 인조는 선물들 중 벼루를 집어들어 소현세자에게 던진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버지 인조 때문에 크게 상심한 소현세자는 두 달 후 병이 들어 드러눕는다. 

 

 

그리고 의관 이형익(이병욱)이 열을 내린다고 놓은 침을 맞고 사흘 만에 죽고 만다. 사가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아무래도 독살을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들 소현세자가 죽고 난 후 인조는 더욱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짜증이 늘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꼬투리를 잡았고 업무를소홀히 해서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면 온갖 형벌을 내리곤 했다. 인조는 젊은시절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다만 38세 때인 1632년(인조 10년) 인목대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상중에 오랫동안 어물이나 육류가 없는 수라를 한 탓인지 건강에 조금 문제가 생긴 정도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의 혹독한 전쟁과 삼전도의 굴욕까지 겪은 정신적인 중압감 때문인지 몸에 하나 둘씩 이상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54세 때인 1648년 건강은 더욱 나빠져 배가 부풀고 오한과 신열의 증상도 보인다. 감기를 앓고 나서 한기와 두드러기, 학질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49년 5월 병세가 위독해져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세자인 봉림대군(효종)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도록 했지만 소용없었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호되게 겪은 후 열담 등의 울화병이 더욱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며 물건을 자주 내던지는 일이 있었고, 피해망상증 환자처럼 밤중에도 문관들을 불러들여 궁궐 감시에 소홀함이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잠이 들곤 했다. 엄청난 의심과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조는 스스로를 얽어매는 일종의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그나마 믿고 의지하던 몇몇 신하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자 마음을 조금은 홀가분하게 가질 수 있었다. 모두가 죽음의 길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인조는 겪어야 하는 인생의 무게를 피하지도 못한 채 모두 짊어지고 고달픈 세월을 뒤로 하고 떠났다. 그래도 변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의 혼란에도불구하고 역대 왕들의 평균수명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인조는 인열왕후 한씨가 산후병으로 죽자 운천리(현재 파주 운천리 능말마을)에 장사를 지냈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 언덕에 백성의 부역이 곤란함을 염려하여 생전에 능의 상설, 곡장, 정자각 등을 설치해 자신의 수릉(綏陵. 예전에 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미리 마련해 두는 왕 무덤)으로 삼았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효종은 그곳에 봉릉하여 장사를 지냈다. 그 후 영조 7년(1731년) 많은 뱀과 전갈이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서 새로 옮겨 왕과 왕비를 합장했는데, 이것이 현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는 한원부원군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자의대비(慈懿大妃)라고도 불린다. 1635년 세상을 떠난 인열왕후의 뒤를 이어 1638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인조의 왕비로 책봉된다. 인조의 후궁 소용조씨의 악랄한 계략에도 꿋꿋이 왕후의 자리를 지켜내며 궁중 암투를 몸소 이겨낸다.

 

인조는 말년에 어심이 더욱 흐려져 용조씨에게 홀린 채 총명한 중전 장렬왕후 조씨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인조가 생존해 있을 때 장렬왕후의 존재는 거의 무시되었으며, 인조가 세상을 떠나기 임종을 국모인 장렬왕후가 지켜야 함에도 소용조씨가 그 자리에 있을 정도였다. 뒤늦게 달려온 효종이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보고 장렬왕후를 모셔오라고 명하여 효종 덕분에 장렬왕후는 임종을 지키고 권위를 찾을 수 있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고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된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쓸쓸한 여생을 보냈으며 법적 증손자인 숙종 때(1688년) 창경궁 내반원(內班院, 조선시대 내시들로 이루어진 관청)에서 64세로 쓸쓸한 삶을 마친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휘릉(徽陵)에 안치되었다. 

 

 소용조씨

 

 

소용조씨는 1630년 종4품 숙원으로 책봉돼 입궁, 정4품 소원을 거쳐 정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소용조씨는 모략을 일삼으며 권세를 거머쥐었다. 인열왕후가 죽은 뒤 계비로 책봉됐던 장렬왕후를 인조와 별거시킬 정도로 투기가 심하고 모사와 이간질에 능했다. 특히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과의 불화가 심했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에도 이름이 오르내렸던 조씨는 세자빈 강씨가 자신을 저주했다고 무고하고, 강씨가 인조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게해 끝내 사약을 받게 만든다.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소용조씨는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자주 모함을 해서 궁궐 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인조의 정비인 장렬왕후와 다른 후궁들도 소용조씨 때문에 인조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역적의 대명사 김자점과 함께 조정을 손에 쥐고 흔든 악독하고 교활한 여인이었다. 정2품 소의(昭儀)를 거쳐 종1품 귀인(貴人)으로까지 올랐던 소용조씨는 김자점과 사돈을 맺으며 승승장구했지만 효종 2년 왕을 저주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사사된다.

 

이상, 화정 인조의 최후..장렬왕후와 소용조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