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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능양군 인조와 정묘호란

 

능양군 인조와 정묘호란  

 

 

드라마 화정에서 능양군(김재원)은 강주선(조성하)에게 “왕이 되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왕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 강주선의 발이라도 핥을 수도 있다”며 비굴한 모습까지 보입니다. 그리고 자리를 뜨면서 “언젠가 모두를 내 앞에 무릎 꿇리면 그만인 것을”이라며 겉으로 드러나려는 자신의 왕위에 대한 야심을 다독입니다. 강주선과 야합하는 이 장면은 가상의 스토리이지만, 실제로 광해군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능양군은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 일파를 등에 업고 인조반정을 일으킵니다.  

 

요즘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선조의 찌질함이 더 두드러지고  있는데, 이렇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제16대 왕위에 오른 인조 또한 선조만큼이나 무능하고 백성보다는 자신의 안위에 더 급급한 왕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선조 때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인조 때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납니다. 이 중 인조가 보위에 오른 지 채 5년도 안 돼 일어난 정묘호란을 이상각의 [조선왕조실록]과 KBS [역사저널 그날]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능양군의 인조반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능양군 인조와 정묘호란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은 서궁에 유폐돼 있던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를 받아 보위에 올랐다. 당시 인조는 폐주 광해군의 죄목을 36조로 열거하면서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민심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백성들은 각박스러운 국왕의 폐위 소식을 듣고 몹시 동요했으며, 조직적인 반발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그 때문에 인조는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은 이원익 등 남인 다수를 등용하여 민심을 달랬다. 하지만 조정의 요직은 김류, 이귀, 이서 등 반정공신들이 차지했다.

 

이렇듯 서인과 남인의 연립내각으로 구성된 새 조정은 12개의 도감을 혁파하고 죄인들을 사면했으며 각종 토목공사들을 중지했다. 또 왕실의 척족이나 권신들의 토지, 세금, 주택 등을 일일이 조사해서 회수했고, 내수사(內需司)와 대방군(大房君)에 빼앗긴 농민들의 땅을 되돌려주었으며 광해군 때 희생된 영창대군과 임해군, 김제남 등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고난의 임금 인조시대의 개막

인조

 

인조는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을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임명했지만, 결정적인 무력을 제공한 이괄을 2등에 녹공해 한성 판윤에 임명하고 얼마 뒤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도 임명하여 분란의 소지를 만들었다. 당시 반정공신들은 거사 성공 후 이전 권력자들의 토지나 노비를 빼앗아 배를 불렸고, 반정에 참가했던 군관들을 사병으로 삼아 안전을 도모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역모가 끊이질 않았다. 역모자 중에는 조선 조정이 포악한 정치를 꾀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새로운 시대창조를 부르짖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급변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정세 파악에 실패했고, 권력 보전에만 급급하여 조선사회를 멍들게 했다.

 

이괄은 임지에 부임해 군사들을 조련하는 등 북방의 안정에 힘썼지만, 당시 기찰을 강화하던 반정공신들이 그를 의심하고 그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체포하려 하자 1624년(인조 2년) 난을 일으켜 한때 도성을 점령했다. 이른바 이괄의 난이다. 연려실기술에는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밖에 없는데 그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다..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라며 이괄이 난을 일으키게 된 이유가 실려 있다. 이괄의 난 때 인조는 공주까지 쫓겨갔다가 도원수 장만이 지휘하는 관군이 반란군을 격파하자 한양으로 돌아왔다.

 

 

16세 후반 명나라의 환제 만력제의 태평과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때문에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자 여진에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등장해 여진족을 재차 통합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보내는 등 한눈을 파는 사이에 주변세력에 대한 정복사업에 진력했다. 마침내 1616년(광해군 8년)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도전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동북아의 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신중한 중립외교를 펼쳤다. 그런데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서인들이 광해군 때의 대외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가도의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후금은 배후가 불안해지고 명나라, 조선과의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무력밖에 없었다. 그때 조선에서 이괄의 난으로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쳐 와 조선의 불안한 내정을 알리자 즉위 이전부터 조선에 강격책을 주장했던 청태종 홍타이지는 아민에게 3만 6천여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정묘호란의 발발  

 

1627년(인조 5년) 1월, 후금의 병사들은 얼어붙은 압록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금의 장수 아민을 필두로 병사들은 조선을 향해 내달렸다. 거침없이 진격하는 후금의 말발굽 아래 의주성이 하루만에 무너졌다. 예상치 못한 적의 기습에 조선은 속절없이 패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30년도 안 돼 조선은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인조는 대외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긴 했지만 배금을 위한 군사적 행동은 한 적이 없었기에 후금의 느닷없는 공격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의 전개

 

전투과정은 상당히 속도있게 진행되어서 1월 8일 심양을 출발한 후금군은 12일 압록강에 도착해서 14일 의주성, 15일 정주를 함락하고 21일 조선군이 최선을 다해 막지만 안주성마저 함락한 데 이어 23일 평양에 도착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 만에 평안도와 황해도를 점령한 것이다. 이때 후금의 의주성 함락에 공을 세운 인물은 이괄의 난 이후 후금에 투항한 한윤이었다. 한윤은 변복을 하고 의주성에 잠입해서 무기고에 불을 질러 조선군의 방어체계를 무력화시켰다. 이괄의 난 때 처형된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은 아버지를 죽인 것에 앙심을 품고 후금군이 앞잡이가 된 것이었다. 개인의 원한 때문에 조국과 민족을 저버린 비극적인 일이었다.    

 

 

후금이 침입해 온 당시 조선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이괄의 난 이후 반정공신들이 사찰을 강화하자 지방 무관들은 역모로 오해받을까봐 병사들에 대한 훈련을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홍은 안주성에서 후금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붙이고 장렬히 전사했는데, 그는 죽기 전에 조정에서 군사들을 조련하게 못하게 했다며 절규했다. 한편 당시 의주부윤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이었다. 이완은 의주성 전투에서 후금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노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탄환을 맞고 쓰러졌을 때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이순신의 말에 따라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했던 바로 그 이완이다.

 

 

또 정묘호란 당시 4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한 정봉수는 후금의 기병부대를 섬멸하고 포로를 구출했다. 하지만 당시 민심이 극도로 나빴던 인조정권이었기에 의병들의 활약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정묘호란 발발 후 나흘 만에 조정에 보고가 되었을 만큼 보고체계도 엉망이었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국방에 대한 대책이 이토록 엉성하고 미흡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조선군은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로 패주했다. 후금군의 내습이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들을 각지에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했다. 하지만 막강한 후금군의 기세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김상용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한양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강화도로 대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갔다. 

 

 

이괄의 난에 이어 이번에도 인조는 전란 수습은 뒤로 한 채 몽진을 떠났던 것이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듯 피난을 떠나면서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교서를 내리기도 했는데, 이 교서 이름을 죄기교서(罪己敎書), 즉 나에게 죄를 주는 교서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교서일 뿐 인조의 행동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인조는 후금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자신의 보위를 위해 삼남지방에서 만여 명의 병력을 차출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는 정작 임진강 방어를 맡은 장만 장군이 북방이 중요하니 포수 백 명만 차출해 달라는 요구도 거절한다.

 

 

한편 평안도의 작은 섬 가도엔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이 있었다. 요동 수복을 표방하며 명나라 패잔병들과 요동 난민들을 규합해 주둔하고 있었던 모문룡은 조선과 국경을 오가는 배를 막고 통행세를 걷고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길을 막고 서신까지 가로챘다. 조선으로부터 군량을 지원받으면서도 수시로 약탈을 일삼고 갖은 패악을 부렸을 뿐 아니라 툭하면 요동으로 진격할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 후금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러한 모문룡의 존재 또한 후금을 도발하게 만든 불씨였다. 

 

 

후금의 기습공격에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조선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후금은 뜻밖의 제안을 해온다. 진격을 멈추고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한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만의 일이었다. 화친의 첫번째 조건은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과의 사대의리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인조정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인조의 신하들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안 되는 일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까닭은 정묘호란을 일으킨 목적이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명나라였으며, 조선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후방일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과의 전쟁이 길어지면 명나라가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고 군수품 공급도 곤란해지는데다 조선이 반격도 염려스러웠다. 따라서 후금으로서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조선과의 화의를 마치고 명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후금과의 화친만이 살 길이었던 인조는 후금 측에서 한 발 물러나 명나라와는 국교 단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갈을 보내오자 명과의 관계를 유지해 명분을 찾고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어 실리도 찾는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후금을 오랑캐라며 얕잡아본 조선에서는 답서를 보내면서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를 찍어서 보냈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인조는 그런 식으로 후금을 자극하는 답서를 보낸 것이다. 화가 난 후금은 자신들의 연호인 천총(天聰)으로 바꾸지 않으면 철군하지 않겠다고 버텼고, 인조는 하는 수 없이 명나라, 후금 두 나라 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정묘화약 합의안

 

그리하여 정묘화약 타협안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정묘화약은 후금이나 조선 양국 다 불만이었다.특히 조선 왕의 동생을 인질로 보낸다는 협약은 종실인 원창령을 원창군으로 만들고 원창군을 인조의 동생이라고 속여 후금으로 보내 자칫 외교문제가 비화할 소지도 남겼다. 조선은 미개한 종족 여진족의 나라 후금과 형제지약을 굴욕으로 여겼다. 또 막대한 조공으로 폐해가 심해지자 더욱 후금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갔다. 후금 역시 세폐와 개시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되었지만 배후의 암적인 존재인 모문룡 세력을 말살시키지 못했고 조선의 배금 경향이 고조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후금은 국력이 강회되자 조선에 다시금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조선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비극적인 병자호란이 발생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아무튼 두 나라는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문을 낭독하는 희생된 제물의 피를 마시는 의식과 함께 전쟁도 종결되었다.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도 후금군의 일부는 철수를 하지 않았다. 정묘호란을 일으킨 목적 중 하나가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해서인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이유로 내세워 의주에 4천여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을 제거하겠다고 한 것이다.

 

 

한편 나머지 후금군은 철수를 하면서도 길목에 있었던 황해도 지역의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인조실록에는 "'적병이 자녀와 재산을 모조리 빼앗았다. 화친이 백성을 위한 것인데 백성이 어육이 되게 하는 결과가 됐다"고 씌어 있다. 그 후의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후금군에 끌려간 백성들이 많았고, 후금은 나중에 속량이라고 해서 조선인을 팔아먹기도 했는데 바로 피로인((被擄人)들이다. 당시 후금군에게 끌려가다가 압록강에서 투신한 사람들도 많았다. 끌려가 죽느니 고향에서 죽겠다는 거였는데, 압록강이 시신으로 뒤덮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무능한 정권의 리더십 부재가 백성들의 고통을 한층 키웠던 것이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정묘호란은 국가가 백성들을 저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쟁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뼈아픈 반성이 없었던 인조는 결국 머리를 땅에 찧으며 청(후금)에 항복하는 굴욕까지 맛보게 된다. 

 

이상, 능양군 인조와 정묘호란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