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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조선의 형벌..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조선의 형벌..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몹쓸 짓을 한 사람에게 딱 그 사람이 한 짓대로 해주어서 자신이 행한 몹쓸짓 때문에 상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알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 하는 말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실려 있는 내용이라고 하지만, 비폭력/인도주의자인 간디는 평화주의자답게 이를 두고 만일 "눈에는 눈!"을 외친다면 이 세상 사람은 모두 눈 없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과거에 자신이 한 짓보다 더 큰 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한 짓만큼만 벌을 주도록 하자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는 거지요. 

 

아무튼 그보다 더한 벌을 주든 아니면 딱 그만큼만 벌을 주든, 최근 차마 입에 담기도 고약한 엽기행각을 벌인 인분교수에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벌을 그대로 적용해 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직도 자신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제자의 발전을 위해서였으니 하고 헛소리를 해대는 사람을 정신차리게 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해도 죄를 저질러 벌을 받는다는 것은 역시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서워 나쁜 짓을 안 하는 경우도 많고, 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무전유죄 유전무죄니 해서 돈 없고 빽 없는 서민들의 가슴을 찢는 일도 종종 있지만, 그래도 저마다 다른 욕구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니 형벌의 필요성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러면 조선시대에는 어떤 형벌이 있었을까요? EBS 역사채널e에서 방영한 [조선의 형벌]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조선의 형벌..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조선의 형벌 은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따라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의 5가지로 나뉘었습니다. 대명률이란 1397년 반포되어 명나라/청나라 5백여 년을 통해 형률의 근본이 된 중국의 법전으로 총 30권입니다.

 

태형(笞刑)

 

 

태형은 가벼운 죄를 지은 경우로, 물푸레나무로 만든 매를 사용해 10-50대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눠 둔부를 치는 벌입니다. 태형은 조선말 장형이 폐지된 뒤에도 오랫동안 존속되다가 1920년에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2  장형(杖刑)

 

 

장형은 태형보다 무거운 죄를 지은 경우로, 60-100대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둔부를 치는 벌입니다. 흔히 곤장이라고 말하는 형벌이 이 장형입니다. 리델 주교 옥중기 중에는 "곤장 10대를 맞자 살점이 심하게 떨어져 나가고 그들이 회복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고 씌어 있을 정도이며, 장 100이면 거의 사형이라고 할 만큼 사망율이 높은 형벌이었습니다. 태형과 장형은 두 가지 모두 부녀자는 옷을 벗기지 않았지만 간음한 여자는 옷을 벗기고 집행했습니다. 또 70세 이상의 노인, 15세 이하인 어린이, 폐병에 걸린 사람, 임신부는 매가 아닌 벌금으로 속전(贖錢)을 받았습니다. 장형은 갑오경장 이듬해인 1895년 행형제도를 개혁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도형(徒刑)

 

 

도형은 지금의 징역형과 유사하며, 중죄를 범한 자에게 노역을 시키는 형벌입니다. 장 60대부터 최대 장 100대를 맞고 죄질에 따라 1년에서 최대 3년까지 노역기간을 다섯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복역 중 병이 난 사람에게는 병가를 주었고, 역모죄가 아니면 부모상을 당한 경우 휴일을 주기도 했습니다.

 

4  유형(流刑)

 

 

유형은 매우 중한 죄에 대한 형벌로, 사형 대신 먼 지방에 유배보내 죽을 때까지 살게 한 벌입니다. 2000리, 2500리, 3000리 세 등급의 유배 거리가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국토가 좁아 유배지로 곧장 가지 않고 거리에 맞게끔 빙빙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유배지는 함경도, 평안도 국경지역이 가장 많았고 경상도, 전라도의 거제도, 진도추자도 등 섬 지방도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외부 출입을 금지한 안치(安置)는 본향안치(本鄕安置), 절도안치(絶島安置), 위리안치(圍籬安置), 천극안치(栫棘安置) 4가지로 나누었으며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본향안치는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게 한 것으로 비교적 죄가 가벼운 죄인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절도안치는 홀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에 격리한 것이고 위리안치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를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둘러싸 외인의 출입을 금했습니다. 10일에 한 번 음식을 넣어주는 것 외에는 대문은 항상 밖에서 자물쇠로 채웠으며, 담장 안에 우물을 파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광해군의 세자 이지는 인조반정으로 폐세자가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는데, 울타리 밖으로 땅굴을 파서 도망가려다가 나졸에게 발각되어 붙잡혔습니다.

 

천극안치는 위리안치된 죄인이 기거하는 방 둘레에 탱자나무 가시를 둘러친 것으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단종복위에 연루된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은 천극안치 후 사형이 집형될 때까지 돌우물 같은 구덩이 만든 후 그 속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유배는 선비들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제공해 허준의 동의보감이나 정약용의 흠흠신서 등 여러 서적들이 유배 중 저술됩니다.

 

5  사형(死刑)

 

 

사형은 형벌 중에서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목을 매는 교형, 목을 베는 참형, 그리고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처참이 있었습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능지처참을 당한 바 있습니다. 

 

 

큰 역모를 범한 역적의 경우엔 참형으로 베어낸 머리를 만인에게 공개하는 효수(梟首)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효수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국사에 관련된 특별한 사건, 즉 역모 등이 발생했을 때 간혹 시행되었습니다. 조선말기에는 갑신정변에 실패한 개화파 요인들이 사형 후 효수되었습니다.

 

 

또한 왕족과 고위 관료에게는 대역죄가 아닌 이상 그들의 품위를 위해 사형이 아닌 사약(賜藥)을 내렸습니다. 사약은 마시면 죽는 약이라는 뜻이 아니라 왕이 내린 약이라는 뜻이며, 왕이 있는 곳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받아 마셨습니다. 사배란 한 번 엎드려 네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형은 삼복제(三覆制)에 의해 세 차례의 재판을 거쳐 신중을 기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3년 "사형에 해당되는 죄는 세 차례에 걸쳐 정확히 조사해 아뢰게 하여라. 이는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겨 혹시 잘못된 것이 있을까 염려하는 까닭이다"라고 실려 있습니다. 

 

 

사형 집행에 대한 권한은 오직 국왕에게 있었으며, 사형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 차례의 철저한 재판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1739년(영조 15년) "경상도의 병사 우하형은 음흉하고 사나우며 형벌을 남용하니 파직하여 다시 등용하지 마소서" 라는 상소가 들어오는 등 곳곳에서 형벌 남용 사례가 빈번하여 사회문제로 야기되자 형구의 규격과 사용법을 명시한 흠휼전칙(欽恤典則), 형법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전률통보(典律通補) 등 전문 법률서적을 발행합니다.

 

 

그리고 지방관이 형장 사용과 법률 집행을 공정하게 하는지 염탐하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영조/정조대에 이르러서는 형벌 남용을 철저히 단속하고 형벌 집행을 쇄신한 조치가 시행됩니다. 

 

이상, 조선의 형벌..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이었습니다. 흥미롭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