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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정약전..흑산의 물고기 박사 손암과 자산어보

 

정약전..흑산의 물고기 박사 손암과 자산어보

 

손암 정약전 초상(이미지 출처 오마이뉴스)

 

실사구시 사상에 충실했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형인 손암 정약전은 정조 때 병조좌랑 등을 지냈지만 천주교에 입교한 후 이승훈과 더불어 포교활동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다산, 손암을 아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 1년(1801년) 신유박해에 연루된 두 형제는 다산은 강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를 떠납니다. 그 후 다산이 강진에서 [목민심서] 등을 집필하는 동안 손암은 흑산도의 물고기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남깁니다. 

 

"백성의 현실을 외면한 헛된 학문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참된 학문, 그것이 실학이다"라고 말한 흑산의 물고기 박사 손암 정약전의 생애를 김만선의 [유배]와 손택수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EBS 한국기행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스스로 를 낮춰 더욱 커진 어른"으로 일컬어지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손암의 열린 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정약전..흑산의 물고기 박사 손암과 자산어보 

 

손암이 활동하던 조선 후기,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두드러지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중세적 봉건질서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세력이 팽팽하게 맞섰다.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정면으로 도전한 진보적 성향의 손암은 사회개혁사상이었던 실학과 서학으로서의 천주교를 통해 날로 관념화돼 가는 성리학과 양반 중심의 사회를 비판했다. 실학도 실학이었지만 특히 만민의 평등과 구원의 희망을 내세운 천주교의 수용은 당시의 지배층에게는 체제에 대한 더할 수 없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가운데 1801년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1816년 사망할 때까지 손암의 흑산도 유배생활은 끝이 나지 않는다. 손암이 유배됐던 흑산도는 멀리서 보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나이 43세에 처음 흑산도에 닿았을 때는 손암 역시 다른 유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좌절에 빠져 절망과 죽음만을 생각했다.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한 아우 정약종의 죽음을 받아들일 여유는커녕 마포나루에서 헤어진 가족들, 나주 율정까지 동행했다가 유배지 강진으로 떠난 아우 다산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도 점점 더 커져갔다.

 

 

하지만 손암은 유배지 주민들과 쉽게 동화하지 못하는 다른 양반들과는 달랐다. 그는 양반 신분으로서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대신 어부들이나 주민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려 지내는 것을 즐겼다.

 

 

흙묻은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섬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모르는 것은 백성에게 묻고 배우며 스스로를 더욱 낮춤으로써 커보였고, 커보이는 만큼 현지인들에게서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또 손암이 그리움과 외로음으로 절망에 빠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준 것도 주민들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손암이 섬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던 사촌서당의 현판 글씨는 아우 정약용이 직접 써서 보내준 원본이라고 한다.

  

 

어느 날 아침 바닷가를 거닐며 눈부시게 푸른 햇빛을 즐기던 손암은 잡아온 물고기들을 분류하고 있는 어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물고기 한 마리가 아차하는 사이에 작은 포말을 일으키며 검은 바다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바다로 한 발 한 발 향해 갔다. 그 순간이 바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해양백과사전인 [자산어보]가 태어나는 계기가된 순간이었다. 자산어보는 손암이 흑산도에서 생산되는 각종 물고기와 해산물 등 226종에 대한 생테계를 집중탐구해 이동경로와 습성, 맛, 방언, 약효 등을 한 권의 책에 담은 성과물이다.

 

자산어보의 집필에도 주민들의 도움이 컸다. 자산어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일일이 어부들이 잡아올린 물고기들을 보면서 확인해야 했고, 그 지역 토박이들에게 물고기의 습성이나 생태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손암은 실제로 장창대라는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어류에 대한 중국 문헌이나 우리 고전의 기록을 고증하고 이를 흑산도에서 조사하고 비교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손암은 물고기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한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어둠 속에 있던 존재를 꽃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해주는 일이다. 손암은 물고기 이름을 모르면 정창대에게 묻거나 일하는 어부들을 귀찮게 따라다니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고도 알 수 없거나 미심쩍게 느껴지면  직접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자산어보에 실려 있는 조사어다. 실끝에 하얀 미끼가 있어 밥알과 같다. 이것을 다른 물고기가 따먹으려고 와서 물면 잡아먹는다고 한다. 

 

 

통호는 속에 덜 된 두부 같은 고깃살이 붙어 있고 위에는 스님이 쓰는 고깔 같은 것이 실려 있는 물고기로 손암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오봉호는 봉우리 같은 것이 다섯 개 나란히 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눈이 툭 불거져 나온 망둥어의 일종인 짱뚱어에겐 철목어(凸目魚)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단풍잎 모양을 한 이 불가사리에겐 풍엽어(楓葉魚)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정약전이 죽은 후 자산어보는 한 장 한 장 뜯겨져 어느 섬집의 벽지로 쓰였다고 한다. 하마터면 벽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책을 구한 것은 아우 다산이었다. 다산은 유배가 풀리자 죽은 형의 유배지에 들러 천신만고 끝에 유고를 구하고 그것을 바다 사정에 밝은 이청이라는 제자에게 필사하게 했다. 이 필사본이 여러 필사본을 낳으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술활동과 후학 지도로 하루가 짧은 손암이었지만 그의 마음 한켠은 늘 공허했다. 흑산도의 삶에 익숙해져 가는 만큼 알 수 없는 서글픔도 점점 쌓여갔다. 바위에 뻥 뚫린 흑산도의 구문여(구멍바위)처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손암은 이 슬픔의 근원에 아우 다산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손암은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아우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우이도로 가려고 했지만 손암의 인품과 학식에 큰 존경심을 보이고 있던 주민들은 그를 쉽사리 떠나보내려 하지 않았다. 막막해진 손암은 아우와의 슬픈 이별 과정을 주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한 뒤에야 겨우 우이도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유배인들 가운데 손암의 사례는 유배 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 이면에 문화사적인 의미를 재조명하기에 적합하다. 정약전의 호 '손암(巽庵)'은 풀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풀집은 곧 집이 호흡을 하듯 집 바깥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집안의 숨을 내뱉으면서 대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상태를 상징한다. 이 풀집에서 손암은 1816년 6월 초엿새날 눈을 감는다. 그의 나이 59세, 아우 다산과 헤어져 유배객이 된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바닷일을 하는 어부들을 천하게 여기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풍토를 감안할 때, 늘 섬사람들과 함께 살을 부비며 살았던 손암의 모습을 참으로 진귀하기까지 하다. "백성의 현실을 외면한 헛된 학문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참된 학문, 그것이 실학이다"라고 말한 손암은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보낸 16년여 동안 키큰 자유인이었고 자신의 지식을 집대성함으로써 더욱 빛나는 인물이었다.

 

이상, 정약전..흑산의 물고기 박사 손암과 자산어보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