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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화정 선조의 딸 정명공주..공주로 죽고 싶소

 

화정 선조의 딸 정명공주..공주로 죽고 싶소

 

 

MBC 드라마 화정(華政)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광해군과 인조에 이르는 시간을 담은 50부작의 대하사극입니다. 고귀한 신분인 공주로 태어났으나 권력 투쟁 속에서 죽은 사람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는 정명공주의 삶을 다룬 내용입니다. 제목은 ‘화려한 정치’나 ‘정명공주’ 등을 고려했지만 ‘화정(華政)'으로 정해졌습니다. 한자어로 ‘빛’ 혹은 ‘꽃’으로 해석되는 화(華)에 ‘다스릴 정(政)’자를 사용해 ‘빛나는 다스림’이라는 의미입니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 시기부터 인조가 반정을 통해 집권한 동안의 이야기가 선조의 유일한 적통공주였던 ‘정명공주’의 삶과 함께 펼쳐집니다.

 

화정 선조의 딸 정명공주..공주로 죽고 싶소

 

정명공주 이연희, 광해군 차승원, 인조 김재원, 홍주원 서강준, 강인우 한주완 외에  박영규(선조), 정웅인(광해군을 옹립한 대북파의 수장 이이첨), 조성하(강인우의 아버지), 최종환(선조의 첫째서자 임해군), 김여진(선조를 지근에서 모신 상궁), 김창완(이원익), 이성민(한음 이덕형), 김승욱(오성 이항복) 등 명품배우들이 출연합니다. 드라마 화정의 시작을 앞두고 부경대학교 사학과 신명호 교수의 [조선공주실록] 중 선조의 딸로 태어났지만 환영받지 못한 출생으로 기구하게 살다 간 정명공주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초지식을 알고 보면 더 흥미가 있을 것입니다.   

 

정명공주 이연희 선조의 적통공주

 

 환영받지 못한 출생
정명공주는 조선 14대 왕인 선조의 딸이다. 그것도 11명이나 되는 선조의 딸들 중 유일한 공주다. 정명공주는 1603년 선조 36년 정릉동 행궁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정릉동 행궁이나 선조 36년이라는 시기 무두 불길하게 작용했다. 축복을 받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행궁이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궐이다. 정식 궁궐이 아닌 임시 궁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선조는 46세였다. 왕위를 물려주기에는 젊은 나이였다.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열등감이 커갈수록 미움이 커졌고, 광해군 측 사람들의 불안도 점점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가 인목대비 김씨와 재혼하자 광해군 측 사람들은 혹시라도 인목대비가 아들을 출생할까 두려워했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새로 태어난 아들을 세자로 삼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불운하게도 정명공주가 태어난 시점이 바로 그런 때였다. 정명공주의 출생은 광해군 측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할 일이었지만 선조와 인목대비게는 큰 기쁨이었다. 정명공주의 유년시절은 선조와 인목대비의 보살핌 속에서 평안했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정명공주가 겨우 6세 때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광해군 차승원 우아하고 냉혹한 카리스마 

 

고난에 찬 어린시절
선조의 졸곡 후 인목대비는 행궁 뒤편에 있는 대비전으로 옮기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앞쪽 동궁으로 옮김으로써 둘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 갔다. 시간이 갈수록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멀리했고 대우도 소홀해졌다. 덩달아 정명공주와 영창대군도 박대를 받았다.

 

정명공주가 11세 때인 겨울 광해군 5년 겨울에 마마를 앓았는데, 마마는 천연두를 달리 부르던 말로 종두법이 알려지기 전에는 무시무시한병이어서 치사율도 높고 전염성도 강했다. 뿐만 아니라 잘못 치료하면 얼굴에 마마자국이 남아 흉한 모습이 되곤 했다. 그런데 정명공주가 마마에 걸리자 광해군 측 사람들은 아예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듯 행동했다. 정명공주를 비롯해 인목대비마저 마마에 걸려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정명공주가 무사히 마마신을 보낸 것은 가히 천우신조였다. 하지만 정명공주가 처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광해군 10년(1618)에 인목대비는 대비에서 서궁(西宮)으로 강등되었다. 서궁은 창덕궁 서쪽에 있는 후궁이라는 뜻이다. 왕실의 최고어른인 대비에서 한갓 후궁으로 강등된 것이다. 광해군은 서궁 주변에 담장을 높이 쌓고 파수하는 곳까지 설치해 삼엄한 감시를 했다. 인목대비가 후궁으로 강등되자 정명공주도 강등되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후궁의 딸인 옹주가 되어야 했지만 정명공주는 옹주 이하로 강등되었다. 정명공주가 인목대비 김씨와 함께 서궁에 유폐된 광해군 10년 공주는 벌써 16세였다. 혼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나이였다.

 

인조 김재원 질투에 사로잡힌 야심가

 

서예로 승화된 유폐생활
선조와 인목대비, 정명공주는 조선왕실을 대표하는 서예가였다. ‘화정(華政)’ 대자(大字)를 비롯하여 몇몇 서예작품을 남긴 정명공주는 조선시대 여성을 통틀어 최고의 서예작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정명공주의 서예작품이 대부분 서궁 우폐 시절에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정명공주가 서궁 유폐의 암울한 시기에 서예, 그것도 선조의 필체를 본뜬 서예에 몰두한 것은 슬픔과 비통에 빠진 인목대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였다.

 

정명공주는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 적응하려는 성향이 컸을 듯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정명공주가 21세 때인 광해군 15년 인조반정이 발발해 광해군이 축출되었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광해군을 불효막심한 왕으로 비난하며 인조는 대비에게 온갖 예우를 다했다. 선조의 후궁으로 강등되었던 인목대비는 선조의 왕비로 복권되었고 정명공주 또한 서인에서 공주로 복권되었다. 인조반정 직후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는 지옥 같던 서궁, 곧 정릉동 행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옮겼다.

 

인목대비 신은정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은 선조의 계비

 

홍주원과의 혼인
정명공주는 공주로 복권되고 어머니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정명공주는 21세로, 이미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주를 서둘러 시집보내기 위해 부마간택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 전국에서 단 아홉 명만이 부마단자를 내어 간택령에 응했다. 결국 부마단자를 받는 기한을 늘리고 신랑감의 나이 제한을 약화한 끝에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을 부마로 간택했다.

 

그 과정에서 인목대비는 사위 홍주원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말인 어승마를 타고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 조정에 문제를 일으켰으나 인조는 반정의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를 벌하지 못했다. 인조는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내주어 정명공주의 살림집을 짓게 하고] 또 정철을 내어주는 등 후대했다. 본래 [경국대전]에는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렀고, 경상도에만 8000여 결에 이르는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큰 호사를 누렸다.

 

홍주원 서강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 냉미남

 

인목대비의 죽음과 위기

인목대비는 인조 9년 봄 크게 병을 앓은 이후로 계속해서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국 병세가 깊어져 인조 10년 49세로 인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목대비의 승하는 정명공주에게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그 동안 정명공주에게 지나친 배려와 비호를 보이던 인조가 돌연 정명공주를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의심은 인조의 질병에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승하한 인목대비를 의심했는데, 발단은 <백서삼폭(帛書三幅)>과 <저주의혹(詛呪疑惑)>이었다.

 

<백서삼폭>은 인목대비의 초상 때 인경궁에서 발견된 ‘비단3폭’이다. 이 비단에 뭔가 씌어 있었는데, "임금을 폐위하고 세우는 것과 같았다"는 심각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자신을 두고 다른 누군가를 임금으로 세운다는 것은 명백한 역모였다. 이것이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쓴 것이라는 해명이 있었지만 의심을 완전히 걷어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백삼삼폭이 인목대비 승하 후 곧바로 인조에게 알려진 것은 인조가 인목대비 측근에 첩자를 심어두었거나 승하한 후 대비전을 샅샅이 수색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인목대비의 초상 때 "궁녀 3, 4명이 밤중마다 문을 닫고 몰래 궁벽한 곳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며 기도했다"고 인조에게 고한 첩자가 있었다. 그 내용은 저주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당시엔 저주로 걸리면 사형이었다. <백서삼폭>은 인목대비가 임해군의 양자가 된 경창군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던 물증이었고 <저주의혹>은 인목대비가 자신을 저주해서 죽이려던 음모였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인조는 자신이 아픈 이유가 저주 때문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2년 전부터 병으로 고생했으니 다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데다 그 정도로 유능하지 못했기에 인조는 정명공주를 의심했다. 정명공주의 배짱과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아울러 명분 노론가인 풍산 홍씨 시댁의 후광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정공신 이귀는 인목대비 역시 저주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저주의 배후를 인목대비의 궁녀들로 몰아갔고 결국 핵심궁녀였던 윤소원과 정상궁이 저주'의 주모자로 희생양이 되어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한주완 사랑에 눈이 멀어 흑화된 킹메이커 강인우

 

고생 끝에 낙이 오다
인조는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내심 저주의 주모자인 정명공주가 살아 있어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해가 바뀌고도 차도가 없었으며 오히려 현기증과 마른기침까지 더해졌다. 침 맞기를 거부하던 인조는 결국 침까지 맞았다. 처음에는 효과가 없었지만 침의 이형익의 번침을 맞고는 완쾌되었다. 

 

하지만 인조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원인 모를 병을 앓았다는 점은 정명공주에게는 큰 불운이었다. 인조 17년(1639) 가을에도 인조는 원인을 모를 병에 걸렸는데 이형익의 번침으로도 잘 치료되지 않았다. 인조는 당장 정명공주를 의심했으며, 궁중 여기저기에서 저주물이 발견되었다. 또다시 수많은 혐의자들이 체포되었고, 내수사에서는 정명공주가 홍주원에게 시집갈 때 따라갔던 궁녀들도 체포했다. 7년 만에 정명공주에게 다시 찾아온 큰 위기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반정공신들이 나섰다.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인조가 승하할 때까지 17년 동안은 정명공중에세 서궁 유폐 시기 못지않게 불안한 시절이었다.  서궁 유폐 시절 절망에 빠진 인목대비를 위로하기 위해 붓글씨에 매달렸었지만 이제는 붓글씨도 일체 끊었다. 붓글씨로 명성이 올라가도 큰일이었고 붓글씨를 매개로 양반들과 교류해도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 문제를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혹시라도 정치에 욕심이 있다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서였다.

 

화정의 화려한 인물관계도 사진=김종학 프로덕션

 

정명공주는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36년을 더 살았다. 그 36년은 지난 47년간의 고난과 조심을 보상하듯 영광과 축복으로 가득했다. 인조 이후의 효종, 현종, 숙종은 정명공주에게 최고의 예우를 바쳤으며, 83세까지 산 정명공주는 조선시대 공주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 살기도 했다. 또한 7남 1녀의 자녀들을 두었으며 그 자녀들과 후손들이 크게 영달하였다는 점에서도 오복(五福)을 두루 누린 공주로 칭송받았다. 우암 송시열은 [정명공주묘지(貞明公主墓誌)]에서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으로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하여 오복을 향유하였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정명공주는 말년에 큰 복을 받고 또 그 자손들까지 큰 복을 받은 것은 송시열의 말대로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서였다. 만약 정명공주가 그렇지 못했다면 서궁 유폐 시절이나 인조 재위 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정명공주는 어렵고 힘든 세월을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하게' 사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며 나아가 복받는 길임을 깨닫고 실천했던 것이다.

 

"나는 원하건대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하기 좋아하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나는 가장 미워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손들 사이에 이런 행실이 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원한다."

 

이는 정명공주가 인생의 황혼기에 막내아들 홍만회(洪萬悔)에게 전해준 글이다. 정명공주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느껴지는 글이다.

 

이상, 화정 선조의 딸 정명공주..공주로 죽고 싶소에 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