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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인목왕후..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기구한 삶

 

화정 인목왕후..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기구한 삶

 

 

선조의 적통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권력투쟁 속에서 죽은 사람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는 정명공주의 기구한 삶을 다룬 드라마 [화정] 2회에서 선조(박영규)는 죽음을 맞습니다. 김개시(김여진)가 준 탕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선조는 결국 숨을 거둡니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선조는 영창대군에게 모든 사랑을 쏟습니다. 선조에게는 모두 1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후생 소생들이었기에 적통인 영창대군에게 더 마음이 끌린 것입니다.

 

선조는 오히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을 폐위시킬 생각마저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영창대군만을 애지중지하던 선조는 문안인사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광해군은 피를 토하며 죽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예전에 인빈 김씨를 총애할 때는 신성군만 총애하더니 이제는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에게만 사랑을 쏟는 부왕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분조를 이끌며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자신을 세자에서 폐하려는 선조에게 광해군은 처절한 아픔을 넘어 분노를 느낍니다. 광해군의 이 분노는 결국 선조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훗날 인목대비와 정명공주, 영창대군을 서궁에 유폐시키는 것도 모자라 영창대군마저 불에 타죽게 만들고, 정명공주가 숨죽이며 살아가게 만들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마저 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불길이 됩니다. 

 

<왕비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보인다>는 윤정란의 [조선왕비오백년사]를 바탕으로 기구한 삶을 산 정명공주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살았던 인목왕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드라마 화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화정 인목왕후..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기구한 삶

 

선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인목대비(신은정)는 충격에 빠져 좌절한다. 믿었던 선조가 세상을 떠났으니, 광해군이 세자로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미로서 인목대비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걱정이 앞선다.  

 

 

부원군 김제남이 인목대비의 침소를 찾아와 비통한 심경을 전하자 인목대비는 슬픔을 삼키며 "언제고 닥칠 일이었다. 이제 내 아이들, 정명과 영창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이어 "그 일은 알아보셨나"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자 김제남은 "마마의 짐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난밤 누군가 대군마마의 처소를 범했습니다. 세자는 결국 대군마마를 살려두지 않겠다는 거였습니다"라며 선조의 죽음에 광해군이 가담했음을 알린다. 김제남은 "그래도 세자의 성정을 믿었다"고 말하는 인목대비에게 "사람의 본성이란 바닥에 몰릴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세자에게 보위를 내줘선 안 됩니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해하려 한 것이 임해군(최종환)임이 밝혀지고 이후 인목대비의 침소를 찾은 광해군은 "대군을 해하려한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다. 다만 임해군의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달라"며 "영창은 제 손으로 지키겠다. 이 다짐을 믿어달라"고 말한다.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인목대비는 "이 궐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지금은 진심이어도 용상에 앉는 순간 달라질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광해군은 승정원에서 빼돌린 유교를 들이밀며 "궐내에 피바람이 불 텐데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냐"며 "마마의 바람이 뭔지 안다. 영창과 정명의 안위 아닌가. 소자도 그렇다. 새 시대를 여는 왕이 되도록 내 손을 잡아달라"며 조력자가 되어줄 것을 간곡한 마음을 담아 청한다.  

 

 

영창대군과 정명공주의 안위를 보장하겠다는 광해군의 약속에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믿기로 결심하고 "중전의 권한으로 세자에게 하교한다. 나는 금일 교지를 내려 보위를 세자에게 전위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옥새를 광해군에게 넘기며 "부디 왕실을 지키고 선정을 베푸는 왕이 되어달라"고 말한다.

 

 

이로써 16년이라는 길고 긴 세자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다. 당시 상황에서는 인목대비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그 결과 인목대비 자신과 정명공주, 영창대군은 장차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인목대비- 광해군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던 기구한 삶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들은 왕위찬탈에 대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제거해 나가기 시작한다. 영창대군을 제거할 묘책만 찾고 있던 대북파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박응서를 비롯한 당시 명망있는 대갓집의 서자 일곱 명이 조령고개에어 일으켰다는 살인강도사건에 영창대군을 연루시켰던 것이다. 이이첨은 이 일의 배후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지목했고, 결국 김제남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사되고 말았다. 김재남이 궁굴로 잡혀 들어가자 그의 아내 정씨는 막내아들 천석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급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관에다 넣은 뒤 장사를 지내 숨어서 살게 했다. 막내아들은 이렇게 어머니 덕분에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와 형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정씨는 제주도 관노비로 유배생활을 했다.

 


인목대비의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한 후 어린 영창대군도 무사하지 못했다. 광해군은 힘센 궁녀 10여 명을 풀어 영창대군을 인목대비에게서 빼앗아 강화도 영락전으로 보냈다. 그리고 광해군 6년 봄, 이이첨은 강화부사 정항에게 영창대군을 죽이라고 명했고, 정항은 영창대군을 불에 태워 죽이기 위해 기거하는 방의 문을 봉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곧 방안은 화로보다 더 뜨겁게 달구어졌고 갇혀 있던 영창대군은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결국 손톱까지 까맣게 탄 채 죽고 말았다.

 

이어서 대북세력은 인목대비가 박응서 사건과 관련이 있고 궁궐에서 저주사건을 일삼고 있으므로 폐모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창대군이 죽은 지 4년 동안 폐모론을 둘러싸고 찬반 상소가 잇달아 올라오자 조정에서는 끝까지 반대하는 영의정 기자헌과 영부사 이항복 외 몇몇 사람을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광해군 10년(1618년) 인목대비는 마침내 폐모가 되어 서궁(西宮P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선조에게 시집와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았던 인목대비는 기가 막혔다. 왕비라는 자리가 화근이 되어 멸문지화를 당하고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던 어린 아들마저 잃었으니 가슴이 골백 번도 더 무너지고 찢어졌다.

 

 

그 후 인목대비는 서궁에 갇혀 지내면서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죽여 없애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광명이 찾아왔다,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던 대북세력들이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났던 것이다. 정변에 성공을 거둔 능양군은 곧 인목대비의 윤허를 얻기 위해 이귀를 서궁으로 보냈지만 인목대비는 화를 내며 자신에게 먼저 옥새를 넘기라고 했다. 

 

능양군은 인목대비에게 옥새를 주었고 옥새를 품에 안은 인목대비는 이 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두려고 했다. 그리고 뒤따라온 광해군에게 36가지의 죄를 들먹이며 "역적 혼을 죽이고야 말겠다“고 면책했다. 지금까지 오직 광해군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으로 삶을 지탱해 온 인목대비였기에 그 언성은 서릿발 같았다. 이렇게 광해군에 대한  면책을 한 후에야 비로소 인목대비는 능양군에게 옥새를 전달했다. 이로써 마침내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가 조선 16대 임금 인조였다. 암울하고 음습한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김씨에게 이제야 빛이 찾아든 것이었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인목대비가 어서 광해군을 죽이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난감했다. 아직 민심을 제대로 얻지 못한 상황에서 살육만 저지르다 보면 자신도 광해군과 같은 패주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죽여야만 자신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권을 가진 자들은 인목대비가 아닌 서인세력이었다. 인목대비는 단지 서인세력들에게 명분만 제공해 주었을 뿐이다. 인조는 인목대비의 원수를 갚아준 것이 아니라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실권이 없던 인목대비는 서인세력에게 또 한 번 이용을 당한다. 선조는 후궁들을 많이 두어 그 소생도 많았기에 항상 말썽이 되었는데, 그 소생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이 인성군이어서 서인세력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인성군은 선조의 후궁 정빈 민씨의 아들로 광해군이 폐모를 논할 때 종친을 데리고 참석한 사실이 있었다. 그래서 사소한 사건만 일어나도 인성군을 연루시켰지만 인조는 그에 대해 관대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서인세력은 인조 6년 유호립이 역모를 꾀했을 때 인성군뿐 아니라 인목대비도 연루시켰다. 인성군이 인목대비의 밀지를 받들어 흉도들을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실권 없이 이래저래 당하기만 하던 인목대비는 "걸핏하면 역적 입에 오르게 되니 분하고 원통한 마음 어찌할 바가 없구나. 인성군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자결하게 하라"는 한글 전교를 내려 자신이 무관함을 변명했다. 결국 인조도  어쩔 수 없이 인성군을 진도에서 사사시켜 버렸다.

 

조정신하들에 의해 정략적으로 필요할 때만 존재가치가 있었던 인목대비는 4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선조와 의인왕후와 함께 경기도 양주시의 목릉(穆陵)에 안장되었다. 그때까지 광해군은 살아 있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집안의 원수로 여겨 죽이려 했지만 자신은 신하들에 의해 이용된 하나의 명분에 불과했다. 인목대비가 그토록 죽이려 했던 광해군은 인목대비보다 10년을 더 살았으니 폐위와 복위로 점철된 인목대비의 삶은 허무할 수밖에 없었다.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생활은 그녀의 궁녀로 추정되는 작가가 쓴 [계축일기(癸丑日記)]에 의해 전해졌다. 금강산 유점사에는 인목대비가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 일부가 남아 있다.

 

이상, 화정 인목왕후..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기구한 삶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