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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왕의 얼굴 선조와 용안비서..대동계 정여립과 기축옥사

 

왕의 얼굴 선조와 용안비서..대동계 정여립과 기축옥사

 

왕의 얼굴 용안비서를 불태우는 선조 이성재

 

KBS2TV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 선조 이성재는 광기어린 미소를 띤 얼굴로 조선 왕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용안비서를 불태웁니다. 후궁 출신의 서자였던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조선 최고의 관상가 백경(이순재)에게서 "왕이 돼서는 안 될 관상이라는 말을 들은 탓에 왕이 되어서도 늘 콤플렉스에 시달려왔고, 그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왕좌를 뺏을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에까지 사로잡혀 있습니다. 

 

황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재야 사학자인 신정일님의 [지워진 이름 정여립]에 따르면 선조는 늘 동인과 서인들의 중간에 서서 혹여 신하들에게 권력이 넘어갈까봐 그 어느 쪽도 신뢰하지 않고 오락가락하면서 피의 당쟁을 가열시켰을 뿐 아니라 시기심이 많고 성격도 모진데다 고집스럽고 괴팍하기 짝이 없었다고 합니다. 역사의 높은 파고 속에서 몸부림쳤던 선조는 그 후에도 서자였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늦게 낳은 적자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고 우왕좌왕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어린시절 들은 왕의 얼굴이 아니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에 새삼 말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포스팅은 방계승통이라는 콤플렉스로 늘 전전긍긍하는 선조가 결국은 왕의 얼굴을 예언한 용안비서를 불태우고, 왕의 자리를 넘본다는 이유로 대동계(大同契)의 수장 정여립(최철호)을 역심을 품은 자로 몰아 자결하도록 만든데다, 심지어 그 주변 인물들까지 1,000여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본 것입니다. 

 

왕의 얼굴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대동계의 수장이 된 정여립 최철호

 

왕의 얼굴 대동계 수장 정여립 최철호와 기축옥사

 

전주 태생인 정여립(최철호)은 명종 22년 소과에 급제해서 진사가 되고 3년 후에는 대과인 을과에 급제해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서울로 상경한 그는 당시 호남 출신들이 대부분 동인이었는데도 서인 율곡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그 후 서울에 머물면서 학자와 명망있는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했고, 장차 정승이 될 재목이라는 평판도 자자했으며 학문도 깊었다.

 

정여립은 이이를 존경했고, 이이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정에 그를 천거했다. 하지만 나라와 백성보다는  당파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서인의 파당적 행태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고 있던 정여립은 율곡이 사망하자 서인을 떠나 동인이 되었고, 그 후 경연(經筵)석상에서는 한때 스승으로 모신 율곡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정과 사림 내에서는 큰 논란이 일었고, 선조까지 나서서 크게 질책하자 그는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왜구의 침입으 받고 도망가는 마을사람들  

 

한편 세상은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져서 군정도 문란해지고 재력은 쇠진했으며 매년 도적들이 들끓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비책을 세워 앞날을 헤쳐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정여립은 먼저 자기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차별체제에 도전하고 평등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기초적인 조직인 대동계를 만들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관에서도 손쓰기가 역부족이어서 숱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원들은 매달 보름날 한 번씩 만나 글도 배우고 활쏘기, 말 타는 법, 칼과 창쓰는 법을 배웠다. 정여립은 사람은 글만 배워서는 안 되며, 무술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매월 모일 때면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서 활쏘기 시합을 하여 무술을 연마했다.

 

왜구들을 물리치기 위해 나타난 대동계 수장 졍여립 

 

정여립이 이렇게 대동계를 조직해서 전주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선조 20년, 전라도 해안지방 죽도에 왜구가 창궐했다, 해마다 봄철이 되면 쳐들어왔던 왜구가 이 해에는 더 큰 규모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그때 전주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정여립은 주저없이 대동계를 동원했다.

 

 

이처럼 대동계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살육했던 왜구에 대한 무력행사까지 주저하지 않았기에 정여립에 대한 신망과 존경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고, 신분차별이 없는 만민평등 사상도 호남 일대의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는 ‘대동(大同)’이라는 명칭 자체가 어떤 신분차별이나 사회적 불평등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만민평등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왜구를 물리친 후 정여립이 백성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당시 정여립이 대동계 사람들에게 말한 급진사상 중 하나는 “천하는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니 일정한 주인(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이고, 또 하나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다. 이 두 가지 사상은 모두 조선의 지배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가 신분의 장벽과 질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대동계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천하는 ‘왕과 양반사대부의 사적 소유물’이 아닌 ‘만백성의 공적 소유물’이라는 급진사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용안비서를 불태우는 선조 이성재

 

 

한편 정여립이 삼남지방에 창궐한 왜구들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기뻐하기는커녕 못마땅한 얼굴로 "대체 관군들을 무엇을 하였기에 정여립 그자 혼자 내 백성들을 지켜낸 것이냐"며 대신들에게 따져묻는다. 좌의정과 형조판서 등 대신들이 삼남지방은 본시 왜구의 출몰이 잦아서 관의 힘만으로는 지켜내기엔 역부족인 곳이며, 이번 기회에 그 동안 왜구들로부터 삼남지방을 지켜온 정여립을 불러 크게 상을 내리시라고 건의하자 선조는 섬뜩한 표정으로 "정여립 그자가 있으니 이제 삼남지방은 과인이 없어도 되는 것이냐"고 묻는다. 

 

 

이렇게 늘 신하들이 역모를 일으킨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선조는 결국 이 모든 것이 다 왕의 관상에 대한 비책이 담긴 용안비서 때문이라고 여기고 불태우기로 결심한다. 송내관(김명곤)은 "선왕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국보인 용안비서를 함부로 없앨 수는 없는 일"이라며 말리지만, 선조는 "내 임금이 되던 해 제일 먼저 그것을 불살라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도 남겨둔 것은 사특한 관상쟁이가 틀렸음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며 이제 기어이 그 책을 없애버리겠다고 잘라말한다.

 

 

이어서 선조는 송내관을 앞세워 선왕들의 어진이 전시돼 있는 방으로 간다.

 

 

선조의 다그침으로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송내관은 다시 한 번 선조를 향해 "용안비서는 조선의 왕들을 위해 만든 귀한 책이옵니다. 선왕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국보이옵니다"라고 말하며 마음을 바꿔주기를 권한다. 

 

 

하지만 선조는 차가운 목소리로 어서 용안비서를 꺼내라고 다그치고, 결국 송내관이 마지못해 꺼내준 용안비서를 직접 불태운다. 송내관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선조를 바라보며 "전하, 용안비서를 태운다 하여 이것에서 벗어날 것이라 보십니까. 이것은 한낱 종이일 뿐입니다"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선조의 앞날을 걱정한다.

 

 

그 후 선조는 대신들에게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했다고 몰아붙이자 대신들은 황망한 얼굴로 정여립은 충신이라고 고한다. 하지만 선조는 "그대들이 정여립이 충신이니 상을 주라고 해서 죽도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대동계의 수가 수백을 넘고 매일같이 군사훈련을 한다고 하오. 이는 그가 반정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요"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선조는 당시 정계를 물러나 있던 송강 정철을 불러 정여립에게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을 맡긴다. 정철 또한 "평소 그자의 역심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며 "정여립은 천하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라는 주장을 해왔습니다. 이것이 역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정여립을 치라는 선조의 말에 기꺼이 따른다. 이어서 선비 1000여 명이 목숨을 잃는 피바람이 부는데, 이것이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다. 이로써 정철은 다시 권력의 정점에 선다.

 

정여립의 모반으로 발생한 기축옥사

 

 

기축옥사는 정여립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다. 대동계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했던 정여립의 야심찬 구상은 선조 22년 전주의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장계가 조정에 접수되고 토벌군이 급파되면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조정에서 자신을 추포하기 위한 토벌군을 파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정여립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직감하고 곧바로 죽도로 몸을 피한다. 하지만 토벌군이 죽도를 덮치자 잡혀서 심한 고문을 받을 경우 동지들을 발설할까봐 자결한다.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토벌군이 항복하면 살려줄 수도 있다는 설득과 회유에 응하지 않고 자신이 호로 삼았던 죽도의 대나무에 부끄럽지 않게 주저함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역모나 모반사건에 지나칠 만큼 예민했던 선조는 정여립이 죽은 후에도 정철을 필두로 한 서인 당파를 앞세워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형했다. 서인 세력 또한 이 사건을 기회삼아 정치적 반대파인 동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때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사람들은 무려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왕의 얼굴 선조와 용안비서..대동계 정여립과 기축옥사, 흥미롭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