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페이터 위조의 제왕 살로몬 소로비치와 독일 베른하르트 작전
희대의 위조 전문가 살로몬 소로비치와 독일의 베른하르트 작전을 바탕으로 한 [카운터페이터](The Counterfeiters)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스테판 루조비츠키 감독과 카알 마르코빅스, 오거스 딜 주연의 오스트리아/독일 영화다. 카운터페이터는 '위조자'라는 뜻이고, 베른하르트 작전이란 어마어마한 양의 영국 돈을 위조로 찍어내 궁극적으로는 영국을 붕괴시킬 생각으로 독일의 나치 정권이 펼친 작전을 말한다.
카알 마르코빅스가 역할을 맡은 유대인 살로몬 소로비츠와 오거스 딜이 역할을 맡은 브루거는 모두 실존인물이다. 유대인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차출돼 영국 파운드를 위조하는 작업에 투입됐던 30여 명 중 특히 소로비치는 '위조의 제왕'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무엇이든 위조해 내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그 대단한 능력(?) 덕분에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오기 전에는 온갖 부를 누리고 산 인물이다.
카운터페이터 위조의 제왕 살로몬 소로비치와 베른하르트 작전
실패하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베른하르트 작전에서 탱고 선율이 흐르는 작업 환경과 탁구대 등 다른 수용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혜택이 이들에게 주어지지만, 영국 파운드에 이어 미국 달러까지 완벽한 위조를 눈앞에 둔 이들은 삶과 영혼의 양심이라는 선택 속에서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존이냐, 양심이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고 말하지만, 홀로코스트에서는 그런 질문조차 사실 사치가 아니었을까? 위조지폐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덕분에 베른하르트 작전에 투입된 사람들은 작은 뜰을 사이에 두고 좀더 잘 먹고 좀더 편안한 잠자리를 얻었지만, 그런 혜택 자체가 그들에겐 바늘방석 같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양심에만 기대 그것을 거부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다른 곳도 아닌 유태인 수용소였으니.
카운터페이터 위조의 제왕 살로몬 소로비치와 베른하르트 작전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브루거는 별의별 핑계를 다 대가며 최대한 독일의 베른하르트 작전을 지연시키고자 했고, 소로비치는 간접적으로나마 그에 동조하여 결국에는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일조를 했다. 거액의 파운드를 위조해 영국 경제를 무너뜨리고, 이어서 달러까지 위조해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할 생각까지 했던 나치 정권, 말 그대로 세기의 악마들이었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다행히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브루거는 훗날 [악마의 공장]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고 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독일 베른하르트 작전을 방영한 적이 있어서 소개해 본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의 토플리스 호수에는 수많은 보물사냥꾼들이 몰려들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군대가 퇴각하면서 전쟁 중 약탈한 다이아몬드며 금괴, 예술품 등 수많은 보물상자들을 호수에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유명 매거진 <슈테른>도 잠수부를 보내 탐사를 시작했는데, 기대했던 나치의 보물은 찾지 못했다.
그런데 1959년 7월, 토플리스 호수에서 뜻밖의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영국 지폐가 들어 있는 철제함 9개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정밀감정 결과 이 지폐들은 모두 위조지폐로 밝혀졌다. 누가 왜 이 많은 위조지폐들을 만든 것일까?
영국의 역사 저술가 브라이언 데니스 박사는 이는 영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독일 나치 정권의 음모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위조지폐와 함께 발견된 나치 친위대의 비밀문서를 그 근거로 삼았다. 그 비밀문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적대국이자 연합국 중 하나였던 영국은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대부분의 자원들을 식민지에서 조달했던 영국은 점점 식민지 지배권에 타격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은 영국 경제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심지어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처칠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던 시점이었다.
이런 영국의 경제사정을 간파한 나치 정권은 영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면 영국을 보다 빨리 붕괴시킬 것으로 판단했고, 이에 따라 독일의 재무성은 영국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비밀작전을 시행한다. 그 작전은 바로 대량의 영국 위조지폐를 만들어 영국의 상공에 투하시켜 영국의 경제구조를 패닉상태로 몰아간 뒤 붕괴시킨다는 계획이었다.
1942년 독일의 나치 무장 친위대 SS가 계획을 추진했고 책임자로는 베른하르트 크뤼가 중령이 임명되었는데, 이 작전은 그의 이름을 다서 베른하르트 작전이라고 불렸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인력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는 집단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인쇄공, 회계사, 사진작가 들 30여 명의 유대인들을 차출하여 베를린 근교의 나치의 중요한 정치범 수용소인 작센하우스 수용소의 19구역으로 데려갔다.
19지역에서의 생활은 다른 수용소와 달리 굉장히 호화로웠다. 수감자들에겐 개인 침대와 개인 사물함이 제공되었고 죄수복 대신 사복 착용이 허용되었다. 비누, 수건, 식기와 탁자 등 생활용품도 넉넉했고, 다른 수용소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풍족한 식사와 담배가 제공되었으며 심지어 체스며 탁구대 등 개인 여가시간이 허용됐다.
수감자들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보장받는 대신 목숨을 걸고 영국의 위조지폐를 생산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그들은 이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 남은 건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43년, 드디어 전문가도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거의 완벽한 위조지폐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작전에서 나치가 만든 위조지폐가 얼마나 정교했는지는 당시 영국은행은 정밀감정을 통과한 끝에 진품이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정교한 위조지폐를 만드는 데 성공한 나치 정권은 본격적으로 위조지폐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1943년 6월 중순부터 1944년까지 매달 65만 장을 생산했고, 총 9백만 장이 생산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위조지폐는 대략 1억 5천만 파운드, 현시가로 약 11조 9,900억원에 달했는데, 이는 영국 국고에 저장돼 있는 돈의 4배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드디어 위조지폐를 영국 상공에서 살포해 영국 경제를 초토화시킬 본격적인 작전 실행만을 앞두고 있었는데, 작전을 앞두고 베른하르트 작전의 총괄자인 나치스 돌격대 대장 헤르만 괴링과 나치스이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의 의견이 충돌하면서 베른하르트 작전을 실행할 시기는 점점 늦춰져 갔고, 그렇게 작전이 지연되는 동안 독일의 전세는 점점 독일에게 불리해져 갔으며, 결국 1945년 독일이 패망하고 만다. 결국 작전은 시도도 하지 못한 채 끝나게 되었다.
베른하르트는 작전의 보안 유지를 위해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고 위조지폐들을 모두 오스트리아의 토플리스 호수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미군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어마어마한 양의 위조지폐들만 토플리스 호수에 가라앉게 되었다. 이 사실은 위조지폐를 토플리스 호수에 빠뜨린 지 14년 만에 9개의 철제함이 발견되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독일의 민족학자이자 경제학자 클라우스 뮐러는 만일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며 영국은 완전히 붕괴되어 아예 이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작전대로 1억 4천만 파운드의 위조지폐가 모두 영국에서 유통되지 못했지만 당시 그 파장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스파이들에게 월 평균 100만 파운드(현시세 850억원)의 위조지폐가 지급되었고, 그 결과 2천만 파운드(현시가 약 1조 7천억원) 가량의 위조지폐가 유통되었다.
또한 다양한 루트를 통해 유럽과 중동지방에 다량의 위조지폐가 유통되어 중동의 암시장에서 영국 파운드화는 액면가치의 75퍼센트 수준에서 거래되는 바람에 영국의 파운드화의 가치는 점점 하락되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에서는 위조지폐가 전체 화폐의 약 50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시장은 큰 혼란을 겪었고, 결국 영국은행은 모든 지폐를 회수해 10파운드와 5파운드의 지폐를 없앴으며 나중엔 영국의 통화 전부를 수거해 재디자인했다고 한다.
이상, 카운터페이터 위조의 제왕 살로몬 소로비치와 베른하르트 작전입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