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될 뻔한 오지라퍼 형사 이성민
보안관이 그렇게나 멋져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그것도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따금 보게 되는 보안관이었지만, 미국 개척시대 영웅의 상징인 카우보이풍 모자에 보안관 뱃지를 턱 달고, 허리춤에는 권총이 든 권총집을 느슨하게 차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근사해 보여 어린 마음에 나중에 크면 저런 멋진 보안관이 되겠다는 꿈도 잠시 꿔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였을까. 김형주 감독의 영화 [보안관]은 그 제목만으로도 흥미가 끌렸고, 게다가 특별히 좋아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인 이성민이 일명 '오지라퍼' 보안관으로 출연한다고 하니 안 보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물론 기억 속 보안관 모습은 아니었지만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이는 느낌으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이성민의 연기는 부산 기장이라는 무대가 너무 좁은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거기에다 선과 악을 오가는 모습을 마치 능란한 줄타기꾼처럼 아슬아슬하게 잘 보여준 조진웅의 연기도 좋아서 결말이 뻔한 스토리일망정 두 시간 남짓을 재미나게 몰입할 수 있었다.
아마 비난을 퍼붓고 싶을 만큼 특별한 악인도 없고,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피 튀기는 장면도 없어서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관람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상영된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악인이거나 입맛을 쓰게 만드는 더러운 변절자들이 많았던 탓인지, 가끔은 이렇게 범죄물에 코미디가 가미된 영화를 보는 것도 불필요한 긴장감을 덜어주어서 나름 괜찮은 것 같다. 더욱이 대구, 부산, 남해 등을 고향으로 하고 있는 외가집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감칠맛 나는 사투리가 귀에 착착 감겨드는 재미도 빠뜨릴 수 없었다.
보안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될 뻔한 오지라퍼 형사 이성민
[보안관]은 과잉수사로 잘리고 낙향한 '오지라퍼' 전직 형사 대호(이성민)를 주축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지만, 이 영화의 묘미는 선한 얼굴의 가면을 쓴 악인을 쫓는 시선과, 그 선한 가면을 쓴 사람이 던져주는 자잘한 이익에 따라 그 동안 끈끈하다면 끈끈했던 사람들의 관계가 어떻게 허물어져 가는지를 보여주는 시선에 있다. 크고 작은 일로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면서 오래도록 이어져 온 관계도 사사로운 이익 앞에서 짤없이 깨져버리는 사람들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지라퍼'란 알다시피 '오지랖'과 랩퍼의 '퍼'를 더해 만들어진 신조어인데, 상대방은 원하지도 않는데 쓸데없이 참견하고 되나캐나 끼어드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의미대로 '오지라퍼' 이성민은 고향 기장의 보안관을 자처하며 주변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해결사 노릇을 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전직 형사다.
평화롭기만 하던 동네에 비치타운을 건설하기 위해 성공한 사업가 종진(조진웅)이 서울에서 내려오고, 바로 그 무렵 인근 해운대에서는 마약이 돌기 시작한다. 과거에 이성민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던 조진웅은 새삼 그 일을 고마워하면서 이성민을 깍듯이 대한다. 하지만 왠지 종진의 일거수일투족이 의심스럽기만 한 대호는 그를 마약사범으로 의심하고 처남 덕만(김성균)을 조수로 삼아 ‘나 홀로 수사’에 나선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동안 이성민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던 동네사람들의 마음은 돈 앞에 장사 없다고, 어느덧 실질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주는 조진웅에게로 옮겨간다. 이른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고, 힘 혹은 권력이 없어지자 한 사람 한 사람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손가락질까지 받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문열 작가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어떤 크고 작은 조직에서든 리더가 권력을 잃었을 때, 그리하여 그 사람 곁에 있어봐야 더 이상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들이 얼마나 약삭빠르고 교활하게 변해 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저 멀리하거나 외면하는 정도는 시쳇말로 양반이다. 아부가 심했던 사람일수록 더욱 맵차게 관계를 끊으면서 마음껏 비웃거나 심지어는 해꼬지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더 가관인 것은, 이런 사람들일수록 더욱 잽싸게 자신이 섬겨야 할 또 다른 리더 곁으로 몰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천성적으로 갑들이 마음껏 갑질을 할 수 있도록 온몸을 던져 멍석을 깔아주는 비열한 을들의 자화상이다. 바로 이런 을들 때문에 갑들이 갑질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것이며, 그 때문에 다른 많은 을들이 얼마나 큰 불이익과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들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하긴 너나할 것 없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데에만 전전긍긍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누구도 '큰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의리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지라퍼'로 이성민 같은 사람은 보기 드문 캐릭터가 되었다. 그냥 거들먹거리며 해결사 노릇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던지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은 함부로 총대를 메는 사람이 없다. 아니, 없는 정도가 아니라 총대 메는 사람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보기까지 한다. 그래도 예전에는 자신은 총대를 메지 못할망정 총대를 메고 나서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분위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평생을 의리남으로 살아온 영화배우 김보성이 광고에서 울상을 지으며 "평생을 의리를 지키며 살아왔건만, 나는 누가 지켜주지?"라는 의미의 멘트를 날리는 것처럼, 각자도생의 힘겨운 삶을 살게 된 현대인들에게는 총대를 메거나 의리를 내세우는 것은 물론 그저 남 일에 소소하게 끼어드는 오지랖도 절대 삼가야 할 일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염치를 차리는 차원에서라도 서로 돕고 살던 우리의 인간관계는 마치 손바닥으로 퍼올린 모래처럼 한 알 한 알 다 흩어져 버리고, 골치가 지끈거릴 만큼 끈끈한 것으로 유명한 가족관계조차도 크게 변해버린 지금, "의~리!"까지는 아니라도 오지랖이라도 떨어주는 사람이 그리워질 법도 하다.
루쉰의 [고향]이라는 글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 동안 숱하게 보아온 글이지만, 사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라는 문장의 의미가 명확하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 한 분이 바뀐 요즘 왠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그 희망의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믿어도 좋다라고도 말하듯 선명하게 주변을 맴도는 느낌이어서 가슴이 셀렌다.
어차피 실체도 없는 희망, 가지면 뭐할 거고, 또 가진들 뭐가 달라지겠나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느껴지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덧없는 삶의 시간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주는 주변환경과 한 가닥 희망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암울한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한 삶을 각자도생하느라 어느덧 의리며 오지랖과는 거리가 멀어진 날들이었지만, 왠지 앞으로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만들어내는 세상이 아니라 의리를 지키고, 남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진정한 오지라퍼들이 활개를 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못 보고, 못 듣고, 말 못하는 삼중고의 삶속에서도 누구보다 행복했던 헬렌 켈러의 말처럼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이루게 해준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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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보안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될 뻔한 오지라퍼 형사 이성민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