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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임금님의 사건수첩 예종 이선균 쫄보왕이 아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임금님의 사건수첩 예종 이선균 쫄보왕이 아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어제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부처님오신날이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평생 불교를 믿으셨던 외할머니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전국의 절이란 절에는 다 가보셨던 외할머니 때문에 어머니도 천주교를 믿기 전까지는 절에 다녔고, 그 때문에 나도 어렸을 때는 어머니를 따라 종종 절에 가곤 했다. 어린시절 제주도에 살았을 때도 딸집에 다니러 오신 외할머니는 절부터 찾아나섰었다.

 

이처럼 불교에 심취했던 외할머니는 옛날이야기삼아 부처님 관련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는데, 그 중에는 최근 사태에 빗댈 만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를 데리고 길을 나섰는데 저 앞 길 가장자리에서 용변을 보는 나그네를 만나게 되었다. 부처님은 그 나그네에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왕이면 저 나무숲 안으로 들어가 용변을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타일렀다.

 

그런데 잠시 후 보니 또 한 나그네가 저 앞에서 이번엔 길 가장자리도 아니고 길 한복판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아무 말 없이 그 나그네를 스쳐 지나갔다. 제자는 의아한 얼굴로 "왜 길 가장자리에서 용변을 본 나그네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시더니 이번엔 길 가장자리도 아닌 길 한복판에서 용변을 본 나그네는 나무라지 않고 그냥 지나치십니까? 더 크게 혼을 내주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제자의 물음에 부처님은 "길 가장자리에서 용변을 보는 정도의 사람은 타이르면 받아들일 정도의 양심을 가지고 있지만, 저렇게 길 한복판에서 용변을 보는 자는 어떤 말이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셨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유구무언인 것이다. 어릴 때 들었던 이 이야기는 그 후 자라면서 절대 상대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에 대한 잣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살아오면서 경험해 보니 뻔뻔함과 몰염치의 극치를 넘어서는 사람들을 상대로 헛힘을 빼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을 일은 없다는 것을 더욱 뚜렷이 깨닫게 된다.

 

임금님의 사건수첩 예종 이선균 쫄보왕이 아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또 하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속담인데, "침뱉은 우물 다시 먹는다"라는 말이었다. 잘나갈 때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않을 것처럼 야박하게 굴다가 정작 아쉬워지면 다시 머리를 조아리는 비열함을 빗댄 말이다. 나아가 지금 이 순간 아쉬울 것 없다고 기고만장하거나 야박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자신이 침을 뱉고 떠난 우물에 다시 나타난 군단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 일이 있었다. 더욱이 침뱉은 우물에 다시 나타난 이유가 참으로 허접해서,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부끄러움이 느껴질 정도다. 비열함이 때로는 악보다 더 치떨리는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말이다. 누군가는 그들을 가리켜 배신자라고 부르기도 과분하니 '쫄보'라고 칭하겠다고 했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유구무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되도록이면 정치 관련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이번 일로 인한 씁쓸한 절망감을 문현성 감독의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임금님의 사건수첩]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예종(이선균)이 상당 부분 해소해 주었기에 이렇듯 긴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었다.

 

쫄보는 "몹시 좀스럽고 못난 짓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북한말이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쫄보들이 판을 치고 있지만, 픽션 속 예종은 절대 쫄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고마웠다. 예종 역을 맡은 이선균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에 병조판서까지 힘을 합쳐 만만치 않은 왕을 제거하고, 나이어린 왕을 보위에 올려 자기네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는 살얼음판 같은 정치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꿋꿋한 모습을 코믹하면서도 당당하게 잘 표현해 주었다. 더불어 침뱉은 우물 다시 마시러 오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밀어내고 형의 아들인 자산군(者山君)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치명적인 약을 먹게 함으로써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세력에 참여했던 형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한다. 

 

다음은 예종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다.

 

조선 8대 왕인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1457년(세조 3) 세조의 맏아들인 왕세자 장(暲, 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죽은 형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으며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다. 

 

세조말부터 신숙주, 한명회 등 훈신들이 승정원에 상시 근무하면서 정무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돼 있었고, 예종 즉위 후에는 이들 전직 대신들이 원상(院相)으로 현직 의정부 대신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무를 처결하는 등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다. 원상이란 왕이 병으로 직무를 보지 못하거나 나이가 어려 섭정을 할 때 원로대신 중 일부가 국정 전반에 걸쳐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던 승정원 내의 임시직책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원상세력과 이시애(李施愛)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뒤 정치적 지위가 상승한 남이 등 적개공신(敵愾功臣)  간의 권력다툼이 노골화되고, 그해 10월 적개공신 세력이 남이의 옥 사건으로 제거되자 이후 원상세력의 권세가 높아졌으며, 특히 한명회는 영의정이자 국구(國舅. 왕의 장인)로서 절대적 권력을 누렸다.

 

예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분경(奔競) 금지, 겸판서 폐지, 대납 금지, 면책특권 제한 등 훈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결단을 실행에 옮겼지만 역부족이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으며, 독살설이 대두되기도 한다. 이렇듯 아쉬움과 의혹을 남긴 채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20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어 덕종의 둘째아들인 자산군(者山君)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조선 9대 왕 성종이다. 

 

 

모든 사건을 직접 파헤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총명한 왕 예종을 보좌하기 위해 등장한 윤이서(안재홍)다. 학식, 가문, 외모(?)는 물론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비상한 재주까지 겸비한 신입사관인데, 의욕과는 달리 어리바리한 행동을 일삼던 그는 예종의 따가운 눈총을 한몸에 받으며 고된 궁궐 생활을 시작한다. 

 

때마침 한양에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예종은 모든 소문과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예종과 윤이서가 모든 과학적 지식과 견문을 총동원해 괴소문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나서면서 두 사람의 좌충우돌, 유쾌발랄(?)한 수사가 시작된다. 임금을 향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할 말은 곧 죽어도 하는 사관 역을 맡은 안재홍도 [응답하라 1988]에서의 정봉이가 생각날 만큼 영화의 재미를 위해 제 몫을 톡톡히 해낸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예종이 현실에서는 영화에서 보여준 것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진 왕은 아니었을지라도, 제발 그랬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 제일의 검객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을 음해하려는 대신들을 처절하게 응징해 주는 파워, 거기에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신하를 아끼는 속깊은 마음까지.. 이 정도면 쫄보왕은커녕 저절로 우러러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임금이 아닌가. 

 

분명 성인들이, 그것도 위엄을 갖출 대로 갖춘 왕을 위시한 사람들이 나와서 영화를 이끌어갔지만, 마음이 훈훈해지는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두말할 나위 없게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한 해피엔딩이어서 더욱 좋았다. 배신에 배신을 거듭해서 유구무언이게 만드는 쫄보들이 연일 그 뻔뻔한 얼굴들을 꼿꼿이 쳐들고 등장하는 바람에 고구마를 한꺼번에 여러 개 먹은 듯 가슴이 답답했는데, 잠시나마 그 꽉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를 시원하게 들이마신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부모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그 부모가 눈만 뜨면 싸우거나 폭언/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어서 자식들의 마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길 뿐이라면, 차리리 없는 게 낫다는 말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어느 분야에서나 리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리더가 아랫사람을 잘 이끌고 보살피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주변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할 것이다.   

 

부모가 꼭 훌륭하고 똑똑할 필요는 없다.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하면서 지켜봐주는 부모의 사랑이면 충분하다. 리더 역시 사실은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 속 예종처럼 모든 것을 다 잘할 필요는 없다. 그저 아랫사람을 눈밝게 적재적소에 잘 쓰는 인선(人選) 능력과, 그들이 저마다 자신의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잘 지켜봐주고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는 역할만 확실하게 하면 된다. 거기에 윗사람으로서의 품격과 인간적인 배려심을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어떤 사람이 이런 리더에 더 가까운지 진지하게 고민해서 투표를 잘해야겠다.   

 

이상, 임금님의 사건수첩 예종 이선균 쫄보왕이 아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