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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세종 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

 

세종 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이라는 부제를 단 [세종처럼]의 저자 박현모 교수는 실록에 나타난 세종의 모습을 우리 시대를 이끌 최고의 한국형 리더십 의 표본으로 세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어록으로 살펴본 세종의 10계도 실려  있는데, 이 중 리더십의 부재가 얼마나 많은 혼란을 초래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요즘, 어떤 분야의 리더들이든 필수적으로 머리와 가슴에 새겨야 할 [세종 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를 좀더 상세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세종 리더십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세종 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

 

 세종 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

 

먼저 어록으로 살펴본 세종의 10계명과 세종실록에 실린 글입니다.

 

1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굶어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2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 법을 시행하려고 할진대, 모름지기 금석같이 굳어야 하고 분분히 변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인재를 기르고 선발하고 맡겨라 내가 작은 벼슬을 제수할 적에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하물며 정승이리오?

 

4 싱크탱크를 활용하고 회의를 잘하라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 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관리를 임명하고자 한다.

 

5 억울한 재판이 없게 하라 어린 자는 허물을 고칠 수 있고, 노인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아니한 자이니 다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것은 마땅치 않다.

 

6 외교로 전쟁을 막고 문명국가를 건설하라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7 영토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 군령이란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연후에야 공을 이룰 수 있는 법인데, 만약 주장하는 자가 하나가 아니면 군졸들이 좇을 바를 모르게 되어 그 해가 작지 않다는 것을, 옛사람들도 이미 그 폐해를 말하였던 것이다.

 

8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온힘을 기울여 실천하라 무릇 오곡이 토양의 성질에 적합함과 같고,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법과 잡곡을 번갈아 심는 방법을 모두 각 고을 노농들에게 물어서 요점을 모아 책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9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라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

 

10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라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이다.

 

 

신뢰주는 법과 제도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信)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종실록(07/04/14)

 

 화폐정책의 변화와 관련해 정부의 신의있는 태도가 중요함을 강조해서 한 말이다.

 

이미 법을 세웠으니 어찌 반드시 다시 명을 내린 후에야 검찰하리오. 자주 명령을 내리면 도리어 명령이 가볍게 생각되리니, 경이 검찰하되 좇지 않는 자가 있거든 아뢰고 의논하라. -세종실록(02/01/11)

 

 김점이 "창고관리들이 마음을 쓰지 않아서 여러 해 동안 이미 쓴 물건을 아직껏 중기(重記)에 올리지 않았다"면서 이에 관한 왕영의 하달을 요청하자 세종은 <잦은 명령의 폐단>을 말하고 있다. 

 

*중기(重記) : 예전에, 이전 관리가 신임 관리에게 사무를 인계할 때 전하는 재산 목록 따위의 행정 문서나 장부를 이르던 말

 

법을 시행하려고 할진대, 모름지기 금석(金石)같이 굳어야 하고 분분히 변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12/08/13)

 

 일관된 법 시행으로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세종의 신념이 다시 확인되는 구절이다. 그렇다고 세종이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수하려 한 수구적 인물은 아니었다. "국가의 대체를 위해 필요하다면 새 법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뭄이 대단히 심하니, 이것으로 보아 금년이 다 지나가도록 비가 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장차 길에 굶어죽은 사람이 가득차 있을 까 두려운데, 재앙을 구제하는 계책을 듣고자 하면 기껏 말하는 것들이 수령의 육기(六期)의 법을 고치자거나 전폐(錢弊)를 사용하지 말자거나 선군(船軍)을 구휼하자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이미 만들어진 법이므로 다시 번거롭게 고칠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법이 만들어지면 한 가지 폐단이 생긴다'고 하니, 나는 이 말을 옳게 여겨 새 법을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의 대체에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어찌 새 법이라고 해서 만들지 않겠는가. -세종실록(08/04/28)

 

 모든 제도는 장점과 함께 단점을 가지고 있다. 새 제도의 폐단을 강조하면 자칫 수구적인 논리가 도출될 수도 있다. 세종은 국가에 유익하면 새 제도를 기꺼이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은 기본적으로 법 개정에 관한 한 '보수적인 정치가'였는데, "법을 변경하는 것은 그 전법에 열 가지 폐단이 있고, 새 법에 한 가지 폐단도 없는 뒤라야 변경할 수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전폐(錢弊) : 화폐제도가 확립되지 못하여 일어나는 폐단

*선군(船軍) : 해안방어를 담당하던 수군. 양인층의 의무 병역

 

법을 세워서 지키지 아니하면 한갓 문구에 지나지 않으니, 언관(言官)은 들은 바를 반드시 진술함은 가하나, 법 밖의 알을 감히 말함은 불가함이 없을까. 헌부에서 별고(別告로)서 논하고 그 죄를 청하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전교를 어기고 상소하였으니, 이미 잘못인데도 또한 억지로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은 정치를 하는 체통이 아니다. -세종실록(15/02/29)

 

언관은 풍문만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억지로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은 정치하는 체통에서 어긋난다는 것이다.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세우리라 : 인정(仁政)

 

수성(守成)하는 임금은 대체로 사냥놀이나 음악, 여색을 좋아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세우기를 즐겨하는 폐단이 있다. 이것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상의 왕위를 계승하는 임금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내가 조종의 왕업을 계승하여 영성한 왕운을 안존(安存)하는 것으로서 항상 마음먹고 있다. -세종실록(14/11/19)

 

세종은 자신을 '수성의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너무 큰일을 일으켜 왕조와 민심의 안존을 방해하거나 현상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창업의 정신을 지켜가면서 동시에 새로운 변화에 적용해 가고자 한 것이다.

 

감역관들이 단지 빨리 이룩하기만 힘을 서써서 기일이 다 되기 전에 끝을 마쳤으니, 견고하기에 힘을 쓰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그의 벼슬을 파면시켜서 후일을 경계함이 가하다. -세종실록(12/06/26)

 

 청계천의 수축공사가 더딘 것과 관련해 허성이 건축 감독관들이 설계를 잘못하여 쌓자마자 무너져서 재력을 허비한다고 하자 세종은 허술한 공사계획의 잘못을 물어 오명의 책임 등 책임자를 파면시켰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공사를 빨리 끝내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아침 일찍 시작하고 밤늦게 파하는 등 노고가 극심하여 질병이 발생하기 쉽고 이로 말미암아 횡사하는 자가 있다. 이제부터는 많은 사람을 모아 부릴 경우 불시에 현장을 검사하여 혹심하게 부리는 것을 금하고, 만일 질병에 걸린 자가 있으면 이원에게 약품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도록 하라"고 공조에 지시했다. 

 

 

▶ 국왕의 추대

 

백성들이 하려고 하는 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임금을 세워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찌 다스리는 체통에 해롭지 않겠는가. -세종실록(13/06/20)

 

 세종에게 국왕이라는 지위의 존립 근거는 "백성들의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근이나 가난으로 굶지 않게 경제를 잘 꾸리는 일이었고, 백성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재판을 통해 잘 풀어주는 일이었으며, 군사력을 강화해 외적의 침입을 막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국왕추대설'로 조선 건국기 정도전의 백성관이나 조선 후기의 정약용의 '원래의 정치론' 내지 '아래로부터의 정치'와 맥을 같이한다.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항상 가슴에 생각하라. 옛날에는 백성에게 예의염치를 가르쳤으나, 지금은 의식이 부족하니 어느 겨를에 예의를 다스리겠느냐. 의식이 넉넉하면 백성들이 예의를 알게 되어 형벌에서 멀어질 것이다. -세종실록(07/12/10)

 

 최덕지 등을 고을에 내려보내면서 한 당부다. 의식을 넉넉하게 한 다음 예의와 염치를 가르친다. 그래서 자연히 형벌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 세종의 정치하는 순서였다.

 

마음이 바르면 사무를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근래에 부정한 짓을 범하는 지방관들이 간혹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일선에서 백성과 가까이할 관리를 선택하여 친히 접견하고 보내는 것이다. (....) 오히려 나의 정성과 공경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까 염려하여 두려워한다. 그대들은 오늘 내가 가르치는 말을 받아들여 관직에 있는 동안 부디 조심하ㅕ여 긴급하지 않은 공사에의 동원은 모두 중지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전하게 하리라. -세종실록(08/01/17)

 

 하늘을 감동시키는 정치는 세종이 추구한 목표였다. 세종에 따르면, 재난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있고 인간이 저지르는 것도 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감응하면 하늘의 재변이 위에서 나타나는 것은 정한 이치인 만큼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군사 일이 가장 긴요하기는 하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중하다. -세종실록(09/11/24)

 

 세종이 생각하는 정치의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가뭄이 시작되니 매우 염려된다. 하늘의 뜻을 사람이 돌이킬 수는 없으나,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 하라. -세종실록(13/05/02)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세종의 정치철학이었다.

 

 

정치를 어렵게 여기는 마음

 

이 몇 해 내려오며 계속 흉년이 드니,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는 완만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곡식을 옮겨서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나, 농사일이 한창인데 백성들은 모두 심히 굶주려 운반할 일이 없다. 매일 일을 아뢸 적에는 흉년에 관한 정사를 제일로 삼으라. -세종실록(04/12/04)

 

 "흉년에 관한 정사를 가장 먼저 아뢰라"는 세종의 말 속에서 세종의 정책 우선순위를 읽을 수 있다.

 

대체로 보아 군주가 처음에는 비록 정치에 부지런하더라도 종말에는 반드시 게을리하게 된다. 당나라 현종과 헌종이 더욱 밝은 거울이 되니 내가 이를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세종실록(24/06/16)

 

 세종은 '재위 말년에 게으른 군주'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훙서(薨逝)했을 때 사관은 "즉위한 이래 한 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 한 임금'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근면함 덕분에 그의 임기 동안 형옥의 판결이 지체됨이 없고 모든 사무가 폐기되지 않았다.

 

훙서(薨逝) : 왕이나 왕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

 

내가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사람의 의논에 좇지 않고 대의를 가지고 강향한 적이 자못 많다. (...) 근일에는 공법(貢法)을 시행하려고 하니, 모든 신민들이 또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내가 상세하고 명확하게 효유(曉諭)하였으나 아직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니, 내 공법의 시행을 정지하고자 한다. -세종실록(26/07/23)

 

 세종은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 그저 신하의 의견을 좇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논의를 배제하고 시행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훈민정음 창제나 북방영토 개척, 세제개혁, 내불당(內佛堂), 양녕대군 보호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내불당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들이다.

 

단순히 인기를 따라가거나 눈앞의 편리함만을 추구했더라면 세종치세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공법이라는 세제개혁 역시 모든 신민들이 불가하다고 반대하고 있지만, 세종은 이들 반대를 봉쇄하기보다는 일단은 경청하고, 또 필요하면 잠시 멈추어서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소지를 바로잡은 뒤에 명확하게 효유하면서 합의를 형성해 갔다.

 

*공법(貢法) : 조선시대 1430(세종 12)년에 제정한 지세제도(地稅制度)

*효유(曉諭) : 잘 알아듣도록 타이름

*내불당(內佛堂) : 1448년(세종 30) 세종이 왕실 불교를 위해 경복궁 안에 세운 불당이다. 조선은 태조 이래로 억불숭유정책을 폈으나 세종이 만년에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에 불당을 건립하고 그 안에 황금불 3구를 안치해 불교를 보호했다. 대외적인 정책면에서는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나 왕실에서는 선왕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목으로 보호되어 조선 중기까지 유지되다가 선조 이후에 없어졌다.

 

이상, 세종 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였습니다.